『수도산』소묘(素描)

수도산은 입산통제 지역이라는 정보에 접하고서도 어쨌든 입산이 가능하게될 것이라는 막연하고 무책임한 기대를 가지고 장도에 올랐다. 늘 그러했던 것처럼 예정시간을 훨씬 넘겨서......
출발시간 지연 - 시간관념이 결여된 소치일 수도 있겠으나 이것은 이제 관행화된 상규일 뿐 더 이상 흉이 아니라고 본다. 어차피 하루를 산행을 위해 바쳤다면 그만큼 늦게 돌아오면 그만일 테니까.
그보다는 보다 많은 "반달곰" 가족이 여행과 산행의 즐거움을 더불어 나눌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목적지로 향하는 도중 간간이 불확실한 가능성에 도박을 건 듯한 개운치 않은심정이 나를 괴롭혔다.(입산을 거부당해 헛걸음을 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널리 공지된 사실이 선언적인 구호에 그치기를 바라는 자신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산이 좋아 산으로 향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기대이기에 죄의식까지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자위하며, 행운이 모든 것을 다 잘 되게 할 것으로 믿고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안강, 영천을 거쳐 경부고속도로를 타는 낯익은 경로를 따라 김천까지 갔다. 거기서 좌회전하여 거창 방면으로 향하는 3번 국도로 접어들어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관기 조금 못 미친 곳에서 다시 좌회전하여 성주 방면으로 나가는 30번 국도를 탔다.

출발한 지 세 시간을 훨씬 넘긴 시각.
우리가 목적지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을때, 산행 들머리로 잡은 마을이 고산지대에 속해 있음을 암시하듯 차창 밖으로 '가래재'가 헤아릴 수 없는 고도로 대담한 구도의 갈지(之) 자를 그어 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마치 천상의 세계로 이끄는 가도와도 같이 환상적이었으며, 미지의 세계에 대한 신비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가래재'를 헐떡거리며 뿌리치듯 넘어 온 우리는 이내 평촌리, 수도암으로 향하는 갈림길에 당도했다.
거기서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잡고자 잠시 머뭇거리고 있을 때 그 곳 촌로로부터 과분한 길 안내를 받았다. 단순히 나아갈 방향만이 아니라 목적지까지의 거리와 주차할 장소까지 세심한 배려가 깃든 그런 안내를......
삶의 지혜란 것이 별게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 순간이었다.

여기서부터 산행기점인 수도 마을까지는 5km 남짓한 거리.
차량의 교행조차 수월찮아 보이는 콘크리트 포장길을 따라 줄곧 이어지는 이름 모를 골짜기의 개울은 거기서 놀던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며 정겨운 모습으로 흐르고 있었다.
마을 근처의 밭에는 안타깝게도 거두어지지 못한 배추포기들이 추위와 서리에 시달리다 못해 부르트고 문드러진 희멀건 고갱이를 드러낸 채 유골같은 몰골을 하며 널브러져 있었다. 농부의 한이 배어있을 듯한 그 광경은 보기에 민망할 지경이지만 내가 어찌해 볼 도리가 없구나!

얼마 후 우리를 실은 버스는 아까 그 촌로가 일러준 마을의 주차장인 듯한 공터에 도착했고, 버스 여정의 종점인 그 곳에서 모두 하차했다.
산촌의 대기는 맑고 냉랭했으나 날씨는 겨울철답지 않게 포근한 편이었다.
한눈에 조용한 마을은 작고 아담해 보였으며 한낮의 햇살아래 포근하고 평화스러워 보였다. 마을의 주변은, 우리가 조금 전 이 곳으로 진입한 곳만 열려 있을 뿐 온통 구릉과 산지의 경사면으로 에워싸여 있고, 그 산자락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20여 호의 농가들은 마치 깔때기 형태의 용기 속에 담겨져 있는 듯하다.

11시를 조금 넘긴 시각.
우리는 신발끈을 고쳐 매고, 배낭을 챙겨 걸치고 마을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오르막길을 따라 산행에 나섰다. "등산로 폐쇄, 입산통제" 플래카드가 내걸려 있었으나 어느 누구로부터도 실제 입산을 통제받는 일은 없었다. 다행으로 생각해서 부끄럽지 않은지 죄책감을 느껴야 마땅한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기분이다.

길 옆 축대 위에는 팔려고 내놓은 듯한 온갖 종류의 약초를 담근 술병들이 햇빛을 투과시켜 한층 맑고 깨끗해 보이는 그 불그스름한 빛깔로 행인을 유혹하고 있었다.
어느 한 집에서는 가정의 대사라도 치르려는지 그 옆에 장작더미가 있는 커다란 가마솥에서 김을 뿜어 올리며 무엇인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또 한 집 굴뚝에서는 연기가 풀풀 뿜어져 나오고 있었는데, 시골정경에 대해 간직하고 있을 우리들의 기억을 일깨우는 단편들이 아니었나 싶다.

이 마을에도 여느 시골마을처럼 주민들이 자랑으로 여기며 애지중지 보살필 듯한 일단의 거목이-구상나무인 듯한-갑옷같이 투박하고 꺼무튀튀한 껍질로 치장한 채, 축대로 쌓아 올려진 공터(쉼터)에 뿌리를 박고 근위병처럼 버티고 서있다.
그리고 그 한 편에는 마을 사람들의 수많은 기원의 축적물일지도 모를 자그마한 돌탑 하나가 단아한 자태로 터잡고 있다.

시골마을을 특징짓는 또 하나의 물체가 눈에 뜨이는데 그것은 거목들 중 하나가 그 꼭대기 가지 위에 동네 확성기를 매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거목들의 숲에 아주 특별한 악센트를 부여하며 어떤 비구상 화가의 미술품 같기도 했는데, 나발같이 둥그런 아가리의 한가운데는 꽃의 암술같은 돌기가 돋아나 있고, 그 끝이 오목하게 함몰된 모양이 익살스러워 보였다.

가지에 다닥다닥 흑진주를 꿴 듯한 고욤나무에 군침을 흘리며 걷다보니 어느새 마을을 벗어나 수도암으로 이어지는 콘크리트 포장길로 접어들었다.
고도를 높여 가면서 경사는 차츰 가팔라져 가슴이 길바닥에 닿도록 상체를 몹시 숙여야 하고, 걸음걸이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갈지 자를 그리며 어기적거리고, 숨은 턱 끝까지 차 오른다. 잠시 휴식이다. 쉴 시간을 미리 정한 것도 아니고, 우리들 중 어느 누가 딱히 휴식을 이끈 것도 아닌데 하나 둘 길바닥에 퍼지러져 앉는다. 이쯤에서 쉬어 가야겠다는 인식이 우리 모두에게 작용한 듯하다. 휴식에는 으레 간식이 곁들여진다. 귤이나 사과가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지고 돌려진다. 산행도중 서너 너덧 번 갖게 되는 이런 타임을 통해 우리는 어떤 공동체 의식같은 것을 확인하며, 서로에게서 따스한 애정도 느끼게 되는 가보다.

길 옆 숲에는 그 줄기와 가지에 수 십 수 백년 세월의 때가 켜켜이 낀 참나무, 단풍나무, 박달나무 등 온갖 활엽 잡목들로 가득하고 드문드문 수 백년은 묵었을 구상나무도 눈에 띈다.
몸을 돌려 남서 쪽으로 향하면, 수도산에서 남동 쪽으로 능선을 돌아 나온 단지봉이, 그 좌우로 완만하게 그려내는 지붕과 같은 형국의 능선과 함께 하늘금에 맞닿아 있는 모습이 역광 속에 아득히 건너다 보인다.
경사가 좀 완만해 지는가 싶더니 저만큼 앞에 수도암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비탈길을 올라오느라 갈증을 느낀 탓인지 수도암 뜰 옆 돌담 아래에 놓여 있는 샘터로 몰려가, 맑고 차면서도 꿀맛같은 이른바 감로수라 일컬어 손색이 없을 샘물을 마음껏 들이켰다.

내가 삼층석탑이 놓여 있는 대적광전 앞마당에 이르러 주변을 둘러보던 중 누군가 옆에서 "가야산이다!"라고 소리쳤다. 그 외침에 나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남쪽으로 향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저 멀리 능선 위로 가야산임에 틀림없는 산봉 하나가 달처럼 떠오르고 있지 않은가! 순간 눈이 번쩍 뜨이고, 가슴이 고동침을 느꼈다.
그것은 부화의 순간처럼 지평선의 정적과 평온을 깨뜨리며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덩치를 막 솟구쳐 일으키고 있었다. 그 광경은 너무나 해맑고 숭고하기까지하여 신선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런가 하면 뫼 산(山)자의 형상을 한 산봉은 한 거대한 도깨비가 알 수 없는 호기심으로 능선을 따라 울타리처럼 둘러쳐진 잡목림 너머로 그 머리를 삐죽이 내밀어 이쪽을 엿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우리는 사찰건물, 삼층석탑, 석등 등 수도암을 구성하는 여러 축조물과 주변 환경에 잠시잠시 눈길을 보내며 경내의 이 곳 저 곳을 기웃거리다가는 이윽고 하나 둘씩 우측 산비탈로 옮겨 붙었다.
나는 경내 주변의 풍경을 필름에 담느라 미처 일행을 따라 잡지 못하기도 했다.

우리는 산비탈을 가득 채운 활엽 잡목림 사이로 난 등산로를 요리조리 빠져 나간 다음 청암사 쪽에서 올라오는 길과 마주치는 주능선상의 갈림점을 확인하고, 방향을 남서 쪽으로 틀어 오르막길을 따라 전진을 계속했다.

이 길을 걸으면서 불현듯 7년 전 여름에 가졌던 이 곳 정기산행이 떠올랐다.
숱한 정기산행 중 수도산행이 유독 추억에 남는 산행 중 하나인 것은, 산행 중 겪었던 고생이 유별스런 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날은 밝고 맑은 대기도 없었고, 빛나는 햇빛도 없었으며, 찬란하게 펼쳐지는 조망도 없었다. 그 대신 짙고 어두운 안개와 폭우의 음침한 기운만이 여름 숲과 하늘에 가득했다.
산행이 시작된 지 얼마되지 않아 우리는 억수같은 폭우에 노출된 채 이 능선상의 어느 한 지점에서 점심시간을 가졌다.
판초 우의를 나뭇가지에 대충 얽어매어 차양을 만들고, 그 밑에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고 웅성거리며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빗물에 밥을 말아먹다시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수도산은 한 때 "반달곰" 가족들 사이에서 "수도꼭지산"으로 빗대어 회자되기도 했다. 그 추억은 오늘 이 곳 산행에 참여한 우리 모두의 공유물은 아니다.
그것은 이제 몇몇 사람들만이 가슴에 간직하고 있을 전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일순간 그리움이 움트며 외로움이 엄습했다. 나는 오늘 여기에 혼자가 아니면서도 지금 이 순간 혼자이다.
아! 그 때 그 사람들과 다시는 함께 할 수 없는 것인가......!

얼마나 올랐을까, 오르막은 잠시 그 기세를 죽여 완만한 평지길로 변했고, 주변의 참나무들은 허공을 찌르는 메마른 가지 끝에 무슨 훈장인 양 겨우살이를 숱하게 매달고 있다.
겨우살이는 기생식물로서 겨울에도 푸른 빛을 잃지 않으며, 그 가지가 얼기설기 얽혀 있는 모양은 탱자나무 가지를 연상하게 하며, 멀리서 바라보면 둥그스름한 외모로 인해 까치둥지로 오인하게 한다. 그리고 작은 구슬같은 열매를 무수히 맺고 있다. 자세히 보면 우무같은 육질의 투명체 속에 씨앗이 갇혀 있는데 흡사 부화하기 직전의 개구리 알처럼 생겼다. 기생식물인 주제에 그처럼 영롱한 열매까지 맺을 수 있다니 몰염치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가상하다고나 해야 할지...

다시 가파른 오르막이 얼마간 계속되다가 비탈을 다듬어 만든 테라스 같은 헬기장에 이르렀고 거기서 점심식사를 했다. 적은 인원에 비해 그 곳은 매우 넓어 모처럼 우리들 모두가 하나의 원을 그리며 둘러앉을 수 있었다.
이 곳은 여기까지 올라오는 도중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기도 하다.

수도산을 떠난 산마루는 그 왼편 사면에 갈퀴로 긁어내린 듯한 수많은 자잘한 구릉들을 빚어내며 장쾌하게 내닫다가 단지봉을 일으켜 세운 뒤 좌일곡령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1,125m봉을 넘으면서부터 더 이상 내 눈의 추적을 허용하지 않으며 동으로 동으로 내달리다 비로소 가야산이라는 걸출한 암봉을 빚어내고 소멸한다.
저 멀리 동녘 하늘 아래 가야산은 자신의 몸을 보여 줄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그 전모를 드러내고 있다.
삼각구도의 준수한 자태로 가부좌를 틀고 그 머리에 뫼 산자를 왕관처럼 얹고 있는 암봉은 그것이 곧 미륵인 듯 온화하면서도 위엄이 넘치는 모습으로 거기 그렇게 놓여 있다. 그 광경은 어떤 알 수 없는 마력으로 한참 동안 나의 시선을 붙잡아 두다가 어느 순간 또 하나의 종주산행 욕구를 자아내고 있었다. (수도산~가야산 종주! 분명 새로운 도전이며, 멋지고 장쾌한 산행이 되리라.) 나는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머지 않은 장래에 이 곳을 꼭 다시 찾을 것이라고.
수도암은 우리가 겨우 여기까지 밖에 못 왔나 싶을 정도로 저만큼 아래에 내려다 보인다.

점심을 마친 우리는 헬기장을 떠나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응달진 경사면을 덮고 있는 낙엽은, 그 위에 흩뿌리기 기법으로 처리된 듯 한줌씩 밖에 되지 않을 눈을 드문드문 얹고 있었다.
수도산 산정에서 우측으로 흘러내리는 경사면은, 잡목림의 끝부분을 태양광이 낮은 각도로 슬쩍슬쩍 비끼며 만들어 내는 회백색의 광택과 그 아래 검고 음산한 그늘이 묘한 대비를 이루는 가운데 냉랭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산은 그 정수리가 인간의 발 아래에 놓이는 것을 쉽게 허용하지 않으려나 보다.
전장에서 최후의 고지가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비로소 점령되듯이 저기 산정이 손에 닿을 듯 빤히 올려다 보이는 데도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다. 바위를 섞은 나지막한 언덕같은 봉우리를 서너 개 넘고 나서야 길 왼편으로 전위봉이 하나 나타나고, 그 건너 북서 쪽으로 수도산 산정이, 그 꼭대기를 장식물처럼 치장한 케른(cairn)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전위봉에서 바라본 산정은 주변 능선보다 조금 높게 무딘 송곳처럼 뭉툭하게 튀어 올라 여러 사람이 올라서기에 비좁아 보이며, 난잡하게 쌓아 올려진 크고 작은 바위들의 무더기 같다.

산정이란 무엇이며, 사람들은 왜 힘들여 그 곳에 올라가려고 하는가?(나는 "정상"이니 "정복"이니 하는 용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투의 물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실 "왜(Why?)"라고 이유를 묻는다면 "산정이 거기에 있으니까"라는 답변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을 것도 같다.
산정이란 산세를 형성하는 한 지점에 불과한 것이며, 거기에 올라가는 것은 산행과정에서 거쳐 가는 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For what?)"때문에 라고 목적을 묻고 싶다면 한번 올라가 볼 일이다.

사람들이 산정으로 향하는 목적이 될 만한 것들을 거기서 취하게 될 것이다.
오늘처럼 괜찮은 날씨라면, 찬란한 햇살과 명징한 대기와 현란한 파노라마를 즐기고, 빛의 오묘한 변화를 음미하며, 멋진 사진을 얻고, 풍부한 상상의 날개를 가진 사람이라면 훌륭한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구의 한 모퉁이 혹처럼 돋아난 한 점 산정에 서있는 자신을 확인하고는 웬지 모를 전율에 떨기도 하며, 자신이 우주(대자연)의 일부이자 주인임을 깨닫고는 가슴 깊은 곳에서 삼라만상에 대한 사랑이 움틈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새아침 먼동을 향해 소망을 빌며 무한한 희망과 용기를 얻기도 할 것이며, 순리와 절제와 중용의 미덕을 배우고, 이를 통해 세속에 부대끼어 헝클어지고 헤어진 자신을 추슬러 그 심성이 새로이 태어남을 느끼고는 한량없는 희열에 젖어 들게 될 것이다.

잠시 후, 드디어 산정!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
사방팔방을 둘러보아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허공과 가없는 광야 뿐이다. 분명 나는 지금 그 가운데 솟은 한 점 산정에 서있다. 비로소 내가 대지를 뻗디뎌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인(人)임을 실감한다.
한편으로, 내가 우주 한가운데에 내던져져 그 산정 바위에 묻어 있는 한 점 티끌에 불과한 존재임을 느낄 때는 그러한 상념은 오만의 소치임을 깨닫고 웬지 모를 전율에 몸을 떤다.

그러한 상념도 잠시. 끝 간데 없이 현란하게 펼쳐지는 파노라마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으로 탄성이 터져 나옴도 잊게 하고, 넋을 송두리째 뽑아 내는 듯한 무아지경에 이르게 한다.
어디서 시작된 지도 모를 능선들은, 제각기 겅중거리며 춤을 추듯 절제되지 않은 자유곡선으로 사선을 긋기도 하고 높고 낮은 산봉들을 그리는가 하면, 그 사이사이에 골짜기를 열어 삶의 터전을 일구며 엷게 드리운 이내 속에서 부침과 교차를 반복한다.

북서방향으로는, 장성처럼 겹겹이 둘러쳐진 능선들 너머로 덕유산이 그의 허물과 같은 스키 슬로프의 흔적을 허옇게 드러내 보이며 하늘금에 맞닿아 있고, 그 왼편으로 이어 달리는 백두대간 마루 끝에 남덕유산과 서봉이 아득히 바라다 보인다. 그리고 그 왼편 아래쪽으로 푹 꺼져 내린 곳이 육십령일 것이다.

태양이 떠있는 정반대 쪽 북동 방면의 조망은 광활하기도 하며, 가무잡잡하고 푸르스름한 기운에 휩싸여 차분해 보이기는 하나 역동적인 맛은 덜하다. 그것은 계절과 시각과 지구의 공전궤도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현상이리라. 그리고 개발과 건설의 상처들을 산기슭과 골짜기 곳곳에 희끗희끗 드러내 보일 뿐 특별히 감흥을 불러일으킬 만한 풍광은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시선을 다시 남서 쪽으로 돌려 본다.
자연이 오늘 우리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듯한 풍경 하나가 거기 남서 하늘에 벽걸이처럼 걸려 있으니 다름 아닌 지리산 원경이다.
그것은 빈 하늘의 한 귀퉁이를 할애하여 우리의 시계를 벗어난 어떤 곳으로부터 거기에 옮겨다 놓은 것만 같다. 게다가 엷은 구름층이 태양을 그 안에 가두어 역광의 강렬한 휘도를 적절히 통제하면서 그 귀한 그림을 또렷이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우리는 오늘 억세게 운이 좋은 가보다.
그 그림이 내게 특별하게 다가서는 이유가 지리산의 위용에 관한 일반적인 인식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지금 너무나 먼 곳에 있을 뿐만 아니라 물에 잠긴 한 마리 악어의 형상을 하고 있어 지리산 본래의 웅장한 면모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 대신 꿈속에서나 그려 봄직한 선경이 그 속에 담겨져 있다고 보기 때문이리라.

지리의 등날까지 차오른 운해는 속세의 한계를 설정하려는 듯 길게 수평선을 그어 나가며 그 위로 선경을 연출하고 있다. 천왕봉은 세속의 속된 기운들을 배격한 채 수평선 위로 고고하고도 신령스런 자태를 또렷이 드러내 놓고 있다. 그 오른쪽으로는 백리에 이르는 지리의 등날이 구름 속에 잠길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나가다가 그 끄트머리에 반야봉을 손톱만큼 봉곳이 드러내고 있다. 이렇듯, 지리산 원경은 단연 오늘의 파노라마 풍경의 하이라이트라 일컬어 무방하리라.

풍경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우리는 아직 잠이 덜 깬 사람들처럼 비실거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하산길에 나섰다.
김천과 거창을 가르며 단지봉으로 나아가는 능선상의 이름없는 한 고개를 만나고, 거기서 왼쪽으로 구릉을 따라 수도 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다.
하산은 부담이 없고 그 발걸음이 언제나 가볍고 경쾌하다. 우리들은 지금 생각하면 무슨 말인지 제대로 기억도 하지 못할 진담, 농담, 무용담 따위를 섞은 이야기들을 지절거리고 희희덕거리며 가파른 산비알을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한편으로 이별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낄 때면 우리들 가슴에 아쉬움이 깃들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다. 하산하면서 아쉬운 마음에 힐끗힐끗 산정을 뒤돌아본다. 우리들이 거기서 서성이느라 잠시 끊겼던 한 토막 공지선은 다시 파란 하늘로 메워지고, 무섭도록 고요하게 정적만이 감돌았다. "만약, 지금 내가 저기에 혼자 서있다면 얼마나 서글프고 눈물이 날까?", 괜한 공허감이 일었다.

하산하면서 내려다 보이는 수도 마을은 두 손바닥 위에 모두 받혀질 것처럼 그렇게 빈약해 보일 수가 없다.
비탈길에는 온갖 덩굴들이 전선의 버려진 가시철망처럼 어수선하게 널려 있고, 그 까칠까칠한 손들은 옷자락을 잡아 끌고 얼굴과 목덜미를 간지럽히는가 하면 갈퀴가 되어 팔과 손등을 할퀴기도 했다.
다시 시선을 왼쪽으로 돌렸을 때 높은 곳의 산사면 잡목숲은 어느새 저녁 햇살에 노랗게 물들어 있었고, 양털을 풀어 놓은 듯 그처럼 따스하고 포근해 보일 수가 없었다.
우리는 조림된 수목들이 마치 수 백 수 천의 군병들이 창검을 치켜든 채 교착상태로 대치하고 있는 듯한 구릉 사이를 빠져 나와, 자작나무의 희디 흰 몸매가 유난히 반짝이는 오솔길을 지나 마을에 도착했다.
하산 완료 - 4시간이 채 걸리지 않은 산행이었다.

공터 옆 도로변에 한 아낙네가 리어카에 배추를 잔뜩 싣고 나와 우리가 그 옆을 지나칠 때 좀 사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네 포기 한 부대에 천 원! 싸기도 하다. 회원들 대부분이 한 두 부대씩 샀다. 입장료 같은 것도 없어 아무 것도 남길 것이 없던 터였는데 별것 아니지만 배추라도 팔아 주었으니 누군가에게 무언가 도움을 주었다는 생각에 웬지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다.

귀로에 우리는 오전에 우리에게 친절을 베푼 그 촌로 집에 잠시 들러 생두부에 막걸리 한 잔 즐기는 여유를 가졌다. 눈을 들어 먼 산을 바라보니 산비탈에 깃든 음영은 그 위 햇살이 닿는 곳과의 경계를 극명하게 드러내며 야금야금 산등성이를 침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반달곰 손 승 일


▣ 신경수 - 안녕하세요 신경수입니다 산행기 잘 보았습니다 지금은 잊혀진 이름이지만 저의 별명도 한때는 북한산반달곰으로 불리운 적이 있었습니다 새해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시고 좋은 산행 많이 하시길 바랍니다
▣ 김양래 - 소요산은 제가 제일로 좋아하는 산입니다.요....일죽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