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行 閑談 20 

지난 일들을 산이 알고 있기에 - - - 

  


  
 

 온몸을 오싹 움츠리게 했던 반짝 추위도 화들짝 놀란 개꼬리 감추듯 맥을 못 춰 봄날 같이 포근한 날씨가 이어진다. 그래도 겨울은 겨울다워야 흥치가 나는데 한편으로는 아쉬움도 많다. 그러나 마치 후한 인심 쓰듯 날씨가 따스해 마음을 설레게 한다. 

 

 본격적인 추위가 언제 오려나 조바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머지않아 본색을 드러내면 춥다고 호들갑을 피울 것이다. 이처럼 사삭스러운 것이 사람들의 심보가 아니던가. 그러나 한 치 어김없이 원형이정(元亨利貞)의 원리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 자연의 이치기에 초겨울의 문턱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숙연한 마음가짐이 필요할 것 같아 산으로 간다. 
 

 지난주에는 실타래 헝클어지듯 여러 일들이 한꺼번에 꼬여 이를 핑계로 술자리가 계속된 여파인지 오르막을 오르기가 너무 버겁다. 술이 체질에 맞지 않아 적당히 마시려고 작심하지만 몇 순배(巡杯)오가다보면 쓸데없는 객기로 애꿎게 술만 축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도통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폭탄주를 퍼마신 탓인지 하염없이 흐르는 땀줄기에서 술내가 물씬 풍긴다. 
 

 산은 이처럼 진솔(眞率)하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무엇을 하면서 지냈는지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그 결과를 소상하게 알려준다. 순간적인 취기로 부질없는 짓거리에 몰입하다보니 몸과 마음이 심하게 멍들어 그 후유증으로 이토록 고초를 겪고 있으니 후회스럽기 그지없다. 
 

 끓어오르는 심화(心火)를 가라앉히려고 술을 마셔보지만 마음의 잡동사니들은 치워지지 않고 몸만 상한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절제하지 못하니 아마도 나이를 헛먹었나 그저 한심스러울 뿐이다. 이처럼 분별없는 행동을 자제하면서 분수를 지켜나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아빠 오늘은 쓰레기 많아서 빨리 내려가겠어요.”

 “그래 빨리 주워 담아 봉투에 가득 차면 내려가자.”

  

 아직도 애티가 가시지 않는 귀여움이 철철 넘치는 아이와 함께 오르막을 오르면서 쓰레기를 줍는 아버지와 아들간의 얘기를 들으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절망으로 가득하지 않고 아직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 기분이 상쾌해지면서 지친 몸에 생기가 돈다. 
 

 산에서 쓰레기를 줍는 사람들을 만나면 왠지 미안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무슨 까딱일까?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일을 저 사람들은 왜 할까? 그렇다면 나는 왜 그 일을 하지 못할까 용기가 없어서 일까 아니면 무엇 때문에 서슴거리고 있을까? 수많은 망념(妄念)에 사로잡히게 한다. 
 

 과일껍질이나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면 과태료를 부과한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얼핏 생각하면 과일껍질은 야생동물의 먹이가 되고 썩으면 양분이 되지 않을까? 그런데 왜 과일껍질을 못 버리게 할까? 의구심이 불러일으키겠지만 과일껍질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농약에 찌들어 야생동물에게 해를 끼쳐 생태계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산은 스스로 생명력을 유지하기 때문에 그 어떤 꾸임도 과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내보이는 것을 정명(正命)으로 여긴다. 무심코 버린 쓰레기나 과일껍질은 산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한다. 그저 보기 싫은 흉물로 남아 줍는 사람들의 수고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과일껍질이나 휴지를 버리면 안 되는 것이다. 
 

 많은 산우들이 자신의 쓰레기를 되가져가는 것이 습관화 되고 있지만 아직도 지각없이 아무 곳에나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들이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산에 오르면 가슴에는 추억을 배낭에는 쓰레기를 담아가는 습관을 길들어야한다. 그런데 왜 쓰레기나 과일껍질을 함부로 버릴까? 아마도 허구적 독특성(False Uniqueness)의 효과 때문이 아닐까. 
 

 즉 내가 하면 낭만적인 로맨스지만 다른 사람이 하면 주책이고 스캔들이라고 간주하는 아주 이기적인 사고를 말한다. 자신은 남들과 다르기에 정당히 반칙을 저질러도 괜찮다는 사회풍조가 팽대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남이 반칙을 저질러도 나만은 규칙을 지키겠다는 인식과 발상의 전환과 더불어 실천하는 풍조가 확산되어야 반칙은 없어진다. 
 

 최근에 세간을 깜작 놀라게 한 엄청난 수능시험 부정사건이 일어나 어안이 벙벙하고 가슴이 답답하기만 하다.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성적지상주의와 학벌주의가 판을 치기에 상상하지도 못할 일들이 벌어져 참으로 서글퍼진다. 모두가 내 탓이라는 심정으로 참회와 자성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사회적 병리현상으로만 여기지 말고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여 도덕과 윤리가 바로 설 수 있도록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여야 한다. 
 

 누가 뭐래도 계층적 수직사회에서는 창의력보다는 기억력이 중시되고 있다. 창조력을 도외시하면 미래를 사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살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기억력보다는 창의성이 존중되는 다원적 수평사회로 탈바꿈되는 전인교육이 이루어져야 희망이 있다. 
 

 오랜만에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능선 쉼터에서 쉬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득하게 보인다. 누런 황금벌판을 이룬 산등성이 억새풀숲 여기저기에서 멀어져가는 잔추(殘秋)의 낭만을 애써 붙잡으려고 버둥거리며 해바라기에 열중하는 산우들의 모습이 퍽이나 여유로워 보인다. 
 

 능선을 한바퀴 돌아 내려가는 길목에 들어서니 지친 탓인지 코끝에 단내가 묻어나면서 다리가 후들거린다. 나이가 지긋하신 아주머니 두 분께서 쓰레기가 가득 들어있는 비닐봉지를 들고 내려간다. 산에 올 때마다 쓰레기를 줍는다고 한다. 몸이 피곤하지만 쓰레기봉투를 들고 내려가야 왠지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산에 오르는 것도 힘든데 봉사활동을 펼치는 여유로움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아직까지도 이렇게 봉사할 수 있는 여력이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기에 힘들 줄 모른다고 한다. 늘그막을 멋있고 보람되게 보내고 있는 것 같아 부러움이 앞선다. 머지않은 훗날 내 자신이 누군가를 위해 어떤 봉사활동을 할 수 있을까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분명코 버리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는 것이 아닌데 왜 우리는 아무런 생각 없이 무심코 버리려고만 할까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저지른 반칙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미리 생각하는 예지를 길러야한다. 규칙을 지키는 삶이 그리 쉽지 않고 힘들고 손해를 본다는 생각이 앞서겠지만 언제나 당당할 수 있기에 지켜나가려고 무던히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양손에 쓰레기봉투를 들고 내려가니 어깨가 뻐근해지면서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힌다. 그러나 왠지 마음이 홀가분해지면서 가슴이 뿌듯해진다. 별일도 아닌데 왜 이럴까? 반칙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부끄럽지 않는 떳떳한 삶을 살아가면 이렇게 기분이 좋아질까?(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