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은 백두대간을 잠시 쉬고 철쭉이 유명하다는 지리산자락 하동에 있는 성제봉을 찾았다. 산행 도중에는 철쭉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보고 산행 후에는 보너스로 드라마 ‘토지’의 촬영장인 악양면 평사리를 찾아 고래등같은 기와집 최참판댁과 예쁜 초가집들이 들어선 멋진 마을도 관람할 욕심이었다.

 

지리산의 남쪽 줄기인 성제봉의 능선에는 성제봉의 남쪽에 있는 1,050봉과 더 남쪽의 신선대 사이에 약 15,000평의 철쭉자생지가 있어 해마다 철쭉꽃이 만발한다고 하여 철쭉철을 맞이하여 내 구미를 당기게 해주었었다.


일요일 아침 5시 40분경 안내산악회 모임장소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선다. 해가 길어져서 아파트단지는 이미 훤하게 밝아온다. 포장도로 옆으로는 활짝 핀 철쭉이 인사하며 오늘 자기 동료들을 잘 보아달라고 부탁하는 것만 같다. 6시 30분이 조금 지나자 버스는 출발하여 서울시내 여기저기에서 산님들을 태우곤 7시 15분쯤 경부고속도로에 진입하여 남쪽으로 남쪽으로 달려간다.


경부고속도로로 대전을 지나고 통영으로 가는 중부고속도로에 진입하여 9시쯤 금산의 인삼랜드휴게소에 도착하니 관광버스 수 십대가 서 있고 사람들이 들끓는다. 바야흐로 나들이 철이 온 것 같다. 그런데 여기 휴게소 화단에도 철쭉꽃들이 만발해 있어 사람들이 꽃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꽃옆에 앉아서 쉬기도 한다. 철쭉꽃 때문에 분위기가 한결 부드럽게 보인다. 오늘 꽃산행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짐을 느낀다.


버스는 장계에서 고속도로를 나와 국도를 타고 장수와 남원을 거치고 구례로 해서 섬진강변을 달려간다. 19번국도의 차창밖으로 펼쳐지는 경치가 아주 좋다. 왼쪽으론 지리산의 산줄기와 거기 붙어있는 마을들이 보이고 오른쪽으론 섬진강의 푸른 물줄기와 하얀 백사장이 조화를 이룬다. 여기 저기 눈에 뜨이는 철쭉과 논에 심어놓은 자운영꽃이 이채롭다. 꽃이나 길, 집들의 배경이 되는 연초록의 신록은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자운영은 곧 꽃채로 갈아 엎어져서 거름이 될 것이지만 자기의 마지막을 아는지 모르는지 최후의 핑크 빛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었다.


11시 43분 버스는 청학사 절에서 약 1km 떨어진 지점에서 산님들을 하차시킨다. 날은 개여 있으나 약간의 황사가 비치는데 기온이 높아졌는지 날씨가 제법 덥게 느껴진다. 청학사를 향해서 아스팔트길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가는 길에 멀리 오늘 올라야 할 봉우리들이 잘 보이며 경치가 제법 좋다. 구름다리가 걸려있는 신선대와 1,050봉, 그리고 성제봉의 두 봉우리가 비교적 뚜렷이 보이고 있었다.

  


초입에서 보는 성제봉능선 : 좌측 튀어나온 봉우리가 신선대, 중앙이 1,050봉, 거기서 신선대만큼 떨어져 우측으로 살짝 솟은 두 봉우리가 성제1,2봉이다.

 

오늘 산행은 시옷(ㅅ)자의 형상을 띠게 된다. 동남쪽에 있는 청학사 밑에서 계곡을 타고 정상을 향하여 올라갔다가 제1성제봉에서 180도 돌아서서 남쪽으로 능선을 좇아 내려올 예정인데 그 길의 모습이 시옷자이다. 전체거리는 지도를 어림해 보니 약 10km 정도로 아주 어렵지는 않은 거리였다.(그러나 산행후의 생각인데 치고 올라가는 계곡산행이 힘들어 제법 난코스였다고 생각됨.)

 

길은 아스팔트포장에서 콘크리트 포장길로 바뀌는데 길옆으론 보리가 패어있고 유채꽃, 탱자꽃, 거기다가 겹벚꽃은 물론 빨간색 철쭉이 길손을 반겨준다. 민가들의 뒤편으론 대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진 숲이 있고 과수원은 연한 녹음이 덮기 시작하고 있는 초여름 정경이었다. 과수원을 지키는 목장승의 표정이 아주 재미있었다.

평화로운 마을 풍경

봄이 오는 과수원과 장승

  

12시 17분 청학사에 도착하였다. 청학사는 건물 3-4개로 이루어진 비교적 작은 절인데 수도가 있어 물을 보충할 겸 수돗물을 마셔 두었다. 여기에서 콘크리트 포장길은 끝나고 흙으로 된 산길로 접어드는데 비탈은 그 경사도가 좀 세지기 시작한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인지라 높은 기온에 바람이 안 부니 매우 덥고 갈증이 난다. 자주 쉬면서 수통의 물을 마시게 된다.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도 들리는데 길은 갈수록 다 가팔라지는 것 같다. 제법 힘든 산행이 되고 있었다. 어쨌든 계속해서 올라가는 길 뿐이다. 아마 성제봉까지는 계속 올라갈 모양이다. 가다 보니 샘을 두 개나 만날 수 있어서 머리에 물을 뒤집어 쓰기도 하고 물도 보충하며 갈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아무리 비탈길이지만 끝은 있는 법, 드디어 두 봉우리(성제봉은 두 개의 봉우리로 되어있었음)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능선 위 삼거리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급경사는 끝난 셈이었다. 그 시각이 오후 2시 10분으로 산행 시작후 2시간 25분이나 지난 시각인데 약 3.5km가 되는 거리를 계속해서 쳐올라 왔기에 제법 힘이 들었던 오름길이었다. 왼쪽으로 가면 남쪽방향인데 오늘의 산행방향이자 가장 높은 봉우리로 가는 길이었다. 우선 북쪽인 오른쪽으로 틀어서 170m 떨어져 있는 뒤쪽의 제1 성제봉으로 먼저 오른다. 바위산을 올라가니 성제봉과 철쭉을 설명해주는 안내판이 있고 국기게양대가 있었다.


북쪽 성제봉

  

정상에는 바람이 제법 세차게 불어서 여태까지 지나온 무풍지대와는 달랐다. 더위를 실어가는 것은 물론 이제는 추울 지경이다. 여기서도 멀리 왼쪽으로 중국의 이름을 땄다는 악양들판이 보이고 주위의 산맥을 조망할 수 있는 위치이긴 하나 남쪽의 경관을 잘 보기 위해서는 좀더 남쪽으로 가서 제2 성제봉이나 1,050 고지로 갈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바위를 다시 내려와 제2 성제봉으로 향하는데 몇그루의 키가 큰 진달래가 핑크빛으로 활짝 피어 반겨준다.


 

남쪽 성제봉과 그 앞의 1,050봉

 

아까의 삼거리를 지나 제2성제봉에 도착하니 2시 26분이다. 이 지점이 오늘 산행에서 가장 높은 지점으로 해발 1,115m이다. 검은 표지석에는 한자로 聖帝峯이라고 쓰여있다. 원래 이 산의 이름은 형제봉이었는데 지역민들에게 성제봉으로 불리우다가 아예 한자를 채용하여 성스러운 제왕 봉우리라고 바뀌어진 것으로 추정하는 설명을 산행대장에게서 들었었는데 정말 한자로 그렇게 적어 놓았다. 가장 높은 지점이지만 남쪽을 내려다 보는 경관은 조금 더 가서 1,050봉에서 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서 다음 봉우리인 1,050봉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부터의 길은 능선길로 경사가 완만하여 아주 부드럽고 푹신한 길을 즐겁게 갈 수 있었다. 1,000m가 넘는 고지인지라 기온도 적당한데다가 능선길인지라 서쪽에서 부는 바람에 아주 쾌적하게 산행을 할 수 있었다. 계곡을 쳐올라올 때의 악조건과는 너무나 대비가 되었다. 어려움이 있으면 좋은 때도 있는 것이 세상이치인가 보다.

  

2시 40분 오늘 산길 중에서 가장 조망이 좋은 1,050봉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넓은 평지에 헬리포트가 그려져 있고 동쪽에서 서쪽 남쪽으로 멋진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었다. 오늘 들린 곳 중 가장 좋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었다. 조망안내판이 있어 여러 지점들의 명칭을 알려주고 있었다.


좌측으론 칠성봉-금오산-구재봉-분지봉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완연하고 그밑으론 악양평야의 바둑판같은 논들과 섬진강의 백사장이 보인다. 남쪽으로 옮겨보면 구름다리를 걸고 있는 신선대와 그 밑의 신선봉, 586봉등의 봉우리가 보이고 더 멀리로는 섬진강너머의 산들이 옅은 황사속에서 흐릿한 실루엣으로 보인다. 중국명칭을 따온 동정호는 안내판에는 있으나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너무 작고 멀어서인 것 같았다. (중국의 동정호는 매우 큰 호수라고 들었었다.)


 

1,050봉에서 남쪽으로 봄. 신선대와 구름다리가 보인다.

  

여기서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 ‘登岳陽樓’를 떠올려 본다. 두보가 중국의 경승지인 악양루에 올라서 동정호를 바라보며 지었다는 시로 조선시대 선조들에게는 꽤 알려져 있던 시였을 것이다.(인터넷에서 퍼옴)


 昔璞庭水,(석문동정수) : 지난 날 동정호에 대해 듣다가


今上岳陽樓.(금상악양누) : 오늘에야 악양루에 올랐다


吳楚東南坼,(오초동남탁) : 오나라와 촉나라가 동남으로 나눠 있고


乾坤日夜浮.(건곤일야부) : 하늘과 땅이 밤낮으로 동정호수에 떠있구나


親朋無一字,(친붕무일자) : 가족과 친구로부터는 한 글자 소식도 없고


老病有孤舟.(노병유고주) : 늙고 병들은 나는 쪽배를 혼자 타고있네


戎馬關山北,(융마관산북) : 관산의 북쪽 중원 땅은 아직도 전쟁 중이라니


憑軒涕泗流.(빙헌체사류) : 난간에 기대서니 눈물만 흘러내린다


읽어보니 시 자체가 큰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나 중국에 있다는 악양루의 경치가 매우 좋았으리라는 상상은 간다.


조선시대, 두보의 시가 널리 퍼진 뒤에 선조들이 보니 이곳 하동 악양의 경치가 중국의 악양루 못지 않게 좋은지라 지명을 악양(면)으로 하고 산아래에 있는 작은 호수를 동정호라고 명명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1,050봉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정말로 멋지고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사진기를 들고 경치를 여러 장 찍다가 두보를 흉내내어 시도 지어보며 걸음을 쉬어본다. 아예 점심식사를 근처에서 하기로 하고 봉우리 약간 남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두보의 시에는 바람 이야기가 없었다. 1,200여년전 두보가 악양루라는 정자에 올랐을 때는 바람이 불지 않았는지 궁금하였다. 지금 이 봉우리에선 센 바람이 서에서 동으로 계속 불어제낀다. 내가 시를 쓴다면 바람에 관해 한 구절은 할애해야 할 것 같다. 2시 55분 자리를 털고 일어나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이곳 1,050봉에서부터 신선대까지는 철쭉나무가 아주 많은 군락지이다. 매년 철쭉제가 행해지는 곳이라고 한다. 예년같으면 찬란하게 철쭉꽃들이 피었을 시기이나 올해는 날씨가 차서 아직 꽃소식이 없다. 가지마다 봉우리는 맺혔으나 꽃이 피려면 좀 있어야 할 것 같다. 오늘 산행의 큰 목적이 철쭉꽃 감상으로 정했었는데 예상이 어긋나 아쉬웠다. 먼저 핀 진달래가 가끔 반겨 주지만 그 수는 철쭉나무에 비하면 과소하다.


 

철쭉군락지 : 기다리던 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아파트를 나설 때부터 철쭉과 마주쳤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국도에서 또한 산 아래 마을에서도 철쭉을 볼 수 있어 어디가나 철쭉을 보는 날인줄 알았는데 가장 중요한 핵심에 철쭉이 없다. 다른 곳에서 충분히 본 것으로 마음을 위로하고 매주 가는 산행이니 다음 산행시 어느 산에선가 철쭉을 만나리라고 자위해 보았다. 철쭉은 없지만 악양이라는 이름과 같이 경치는 정말 볼 만하다고 해야겠다.


오후 3시 10분쯤 신선대에 도착하니 구름다리가 두개나 있고 중간에 철계단이 있다. 먼저 작은 구름다리를 건너는데 바람에 몸이 약간 흔들린다. 조심해서 천천히 건너고 100단쯤 되는 계단을 힘들게 올라가니 제법 큰 구름다리가 나온다. 바람이 휘몰아쳐 다리가 흔들거리니 공포감이 밀려온다. 다른 길이 없으니 조심해서 천천히 건널 수 밖에 없다. 조심조심 몸을 움츠리고 밧줄을 잡아가며 나무바닥으로 된 다리를 건너는데 바람이 불어서 몸이 흔들거린다. 무사히 건너고 나니 매우 짜릿한 감흥이 인다. 이때 시각이 3시 14분이었다.


산길을 자꾸 내려감에 따라 고도는 낮아지고 반대로 기온은 급격히 올라간다. 거기다 바람마저 약해지니 더위가 다시 기승을 부린다. 땀을 훔치고 물을 마셔서 더위를 달래며 운행한다. 이제는 제법 키가 크고 구부러진 소나무들이 밀집된 숲길을 간다. 신선봉과 통천문을 지나 4시 40분경 꽤 아래 쪽의 고소성에 도착한다. 네모난 돌들을 단정하게 쌓아올린 성인데 신라시대 소정방이 쌓은 성이라고 한다.  여기서 조금 내려가다가 왼쪽으로 난 넓은 길을 15분쯤 내려가니 한산사라는 절이 나온다. 특징이 별로 없는 아주 작은 절이었다.


한신사 바로 밑에는 공중화장실을 잘 지어 놓았기에 잠시 들렀다. 여기서 동쪽으로 포장길을 따라 잠시 산을 내려가니 드라마 ‘토지’를 촬영했던 세트장 마을(평사리)이 나왔다. 시각은 5시 10분이었다. 이 마을 복판 약간 높은 곳에는 토지의 여주인공 서희가 살던 고래등같은 기와집인 최참판댁이 있고 주변에는 민초들이 살았던 초가들과 장터, 물레방앗간 등이 지어져 있었는데 옛날 정취가 나도록 마을 전체가 잘 꾸며져 있었다. 지친 몸을 추스르며 최참판댁으로 향했다. 많은 관람객들이 입장해 있었고 그들을 따라 만석꾼집을 돌아 보았다.

  

참판댁을 나와보니 마당 한켠에 철쭉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반겨준다. 어차피 철쭉과 인연은 있는 날인가 보다. 마당에 서서 악양들판과 섬진강 푸른물과 흰빛 모래사장에 눈을 주어 본다. 평화롭고 눈이 부신 날이다. 

 

이제 버스로 갈 시간이었다. 정문을 나와 주차장을 향했다. 5시 30분이다. 시간이 조금 남기에 주점으로 향하니 처음 보는 산님들이 반겨준다. 막걸리와 도토리묵 그리고 녹두빈대떡을 맛보았다. 값은 눅지 않으나 맛은 있었다.

 

오후 6시 30분경 지체된 산님들이 도착하자 버스는 산님들을 태우고 서울로 떠날 수 있었다. 철쭉꽃의 부재가 아쉬웠다면 좋은 경치와 덤으로 얻은 촬영지 관람 때문에 흡족한 하루였다. 서울에 도착해 보니, 영남지방이 30도가 넘어서 최근 들어서 가장 더웠던 하루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