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봉산(威鳳山) 장대봉 산행기
(전북완주군소양면동상면/위봉산성 서문-위봉산성-장대봉-입석리 예인촌-송광사/한뫼산악회 따라)

*. 송광사(松廣寺)에 벚꽃 보러 갔다가
 가을에 제비가 간다는 강남(江南)이라는 중국의 항주, 상해를 갔더니 제비는 한 마리도 보지 못하였고, 분명 봄은 와 있던데 꽃구경을 얼마 못하고 왔다. 꽃구경도 먹고 살만해야 하는 것이로구나 하면서 돌아와서 한국의 봄을 보니 길도, 들도 산은 물론 집집마다 꽃 천지라.
그래도 북상한다는 꽃을 찾아 남쪽으로 우리는 송광사(松廣寺) 벚꽃 놀이를 가고 있다. 가면서 아내와 줄 곳 마음에 정하지 못한 것이 있다. 송광사 벚꽃 놀이를 할 것인가. 아니면 거기 있다는 524m의 위봉산(威鳳山)을 오를 것인가.
오는 길에 들른 전주 시내에는 목련은 물론 살구꽃, 벚꽃이 피기 시작한 것을 보고 왔다. 몇 년 전의 쌍계사 입구 십리 벚꽃 터널의 장관을 그리면서 드디어 송광사(松廣寺) 입구에 도착하여 벚꽃 터널이 시작되는 모습을 보니 벚꽃은 피기 시작하고, 상인들이그 축제 준비도 한창인데 이상하다. 인파도 없고 벚꽃 길이 오리에도 훨씬 못 미친다.
그래도 오랜만에 송광사(松廣寺) 도 보고 벚꽃 길도 거닐겠다고 산을 포기하고 버스에서 내렸더니 어, 승보 사찰 송광사(松廣寺)가 아니네. 여기는 완주 종남산 송광사(松廣寺)였던 것이다.
그래서 산행이나 하기로 하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지난 보름 동안 중국 황산, 항주, 상해를 다녀온 여행기를 쓰느라고 오늘은 건성 따라 나선 것이 불찰이었으니 누구를 탓하랴. 이렇게 위봉산(威鳳山)이 나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 이 태조 어진(御眞)을 위한 위봉산성

송광사를 지나 산길을 오르다 보니 옛 성벽(城壁)이 산으로 오르고 있다. 위봉산성(威鳳山城)이었다.
이 산성은 전쟁을 위해 쌓은 성이 아니라 전주 경기전(慶基殿)과 조경묘에 있던 이태조의 초상화와 위패를 유사시에 모시기 위해서 이조 숙종 때 이 부근 주민을 동원하여 7년 동안 쌓은 산성(山城)이다.
우리가 조금 전에 지나온 전주는 태조 이성계의 관향으로 그래서 태조는 전주 이씨의 시조가 된다. 그 전주에서 태조의 어진(御眞, 임금의 초상화)을 모신 곳이 경기전(慶基殿)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인근 향교가 있었는데 글 읽는 소리가 경기전을 어지럽게 한다하여 멀리 옮겼다 한다. 옛날 조상의 숭배 사상이 이와 같았다.
젊었을 때 족보를 샀다고 했다가 망신당한 일이 있다. ‘대대 조상의 이름이 들어있는 족보를 어떻게 샀다고 하시는가. 모셨다고 해야지-.’ 지금 사람들도 조심해 말할 일이다.




산성은 큰 돌을 정방형으로 깎아 쌓은 것이 아니라 주위에 뒹구는 돌들을 주워다가 쌓은 것 같다.
그 길이가 16km, 높이가 4~5m, 너비가 3m로 축성 당시에는 정문인 자하문(紫霞門)과 동문, 서문의 3개 문이 있었는데 지금은 서문(西門) 하나만 홍예 석문으로 복원 되었는데 이름 없는 산성치고는 그 모습이 너무 멋있다.
 등산이란 지금까지 힘들여 올라온 곳을 뒤돌아 바라보는 전망도 좋지만, 앞을 향하여 양파 껍질 까듯이 새롭게 열려 가는 새로운 산봉우리을 바라보는 기쁨이다.

그런데 저 멀리 성 밖 커다란 고목 옆에 암자가 봄 잠을 자는 듯이 양지에 묻혀 있다. 노란 개나리가 한창인  저 암자가 태조가 젊었을 때 청운의 뜻을 품고 공부하였다는 태조암(太祖庵))인가 보다.

거기서 더 성 따라 오르다 보니 암문이 있다. 암문(暗門)이란 적이 발견하기 어려운 곳의 성벽에 편리하게 드나들 수 있게 만든 다락집 없이 만들어 놓은 문으로 여기서는 태조암을 드나 들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 같다.

*. 왜 위봉산(威鳳山)이라 했을까
얼마를 더 너덜겅 같은 성벽 위 돌길 따라 다리  품을 파니 쉬어가라는 듯이 널찍한 바위가 오른쪽에 있는데 바라보니 그 산록엔 방금 보고 온 송광사보다 더 큰 가람이 있다. 위봉사(威鳳寺)였다.

신라 말 한 서민이 이 산에 올f라서
숲에서 노닐고 있는 세 마리 봉황새 보고
이 곳에
큰 절을 세워
위봉사(威鳳寺)라 이름하였다네



옛날에는 이 절을 위봉(圍鳳)이라고 했다는데 ‘圍’(위)는 둘레요, ‘威(’위)는 위엄이란 뜻이다. 위봉사가 1911년에는 전북 일원 46 개 사찰을 관할하던 31본 본사였다. 지금은 비구니의 사찰이다.
하산하여 버스 타고 오는 길에 간신히 달리는 차 속에서 이 절에서 동쪽으로 300m 자리에 있는 위봉폭포 한 장을 찍을 수 있었다. 옛날 위봉산성의 동문(東門)이 있었다는 곳에 있는 폭포로 높이 80m의 2단 폭포였다. 이런 곳에서는 버스를 천천히 몰아야 하는 것이 도리일 텐데 그런 관광 버스 기사를 보지 못하였다. 산악대장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 진달래 하산 꽃길
 앞서 간 고운 이가 만들어 놓은 표시 따라 가다보니 성벽 길은 없어지고 나뭇잎이 길을 덮고 있는데 근심 없이 쑥쑥 자란 아름드리 소나무가 무성하다.
아직도 쌀쌀한 봄 날씨 때문인가 별로 힘들이지 않은 곳에서 일행과 함께 먼저 온 아내와 유여사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여기가 위봉산 정상 장대봉인 것 같은데 표지 하나 없으니 엉뚱한 곳을 정상이라 하고 하산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앞선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길에도 이정표 하나 없는 것을 보면 완주군 당국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저 산 아래 멋진 동상저수지를 가리는 나무들을  탓하며 지금부터는 하산길인데 지금까지 듬성듬성 하던 진달래가 모여서 피기시작하고 있었다.  
‘산에는 꽃이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ꁜꁔꁞ’ 소월이 이 시를 쓴 때가 ‘갈, 봄, 여름’이라 노래 한 것을 보면 가을이었나 보다.  꽃이 질 무렵의 내 아내와 그 친구처럼.
정상이라고 생각한 곳에서부터는 줄 곳 가파른 내림 길이라서 힘들기는 하지만 방금 피어 난 듯한 진달래꽃이 아아, 너무 선명하구나. 그 꽃길을 따라 나타나기 시작하는 예송 마을에는 우리를 송광사로 태워 줄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 완주 송광사(松廣寺) 구경
송광사(松廣寺)는 산사(山寺)가 아니라 인가 근처에 있는 절이다. 602m의 종남산(終南山) 기슭에 있지만  이 산도 먼 곳에서 찾아올 정도의 산이 아니다. 기이한 바위나 울창한 산림 어느 하나 갖춘 것 없는 한 마디로 평범한 산이다.
그러나 절의 경내에 들어서자 일주문 뒤에서 웃으며 반갑게 맞고있는 장승 보살이 범상한 절이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굴뚝, 정원의 목각, 부처들이 한결 같이 웃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예수님이나 그 제자 중에는 웃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이 절에서 유명한 것은 한국 유일의 십자각의 종각과 건물 속에서 있는 부처로는 한국에서 제일 크다는 대웅전의 소조삼불상(塑彫佛像)(이다. 이 부처는 호국불의 화신인가 나라가 어지러울 때마다 몸에 땀이 난다는 불상이다.
송광사의 말없이 맞는 보살들처럼 나도 백문불여일건(백문불여일견)이라니  그림으로 말을  대신할까.

옛날에 이곳을 지나던 한 선사(禪士)가
한 샘에서 마신 물 맛이 범상치 않았다.  
훗날에  
제자(弟子) 시켜서
세운 절이 송광사(松廣寺)였다네.


일주문 스마일장승 사천왕 대웅전 한국최대 대웅전불상 지장전 스마일보살 웃는 굴뚝한국유일의 십자형 종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