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산행일자:2008. 3. 29일(토)

           *소재지  :경남합천/경북성주

           *산높이  :1,430m

           *산행코스:백운동입구-백운암사지-서성재-칠불봉-상왕봉

                     -석조여래입상-해인사-주차장

           *산행시간:10시45분-15시51분(5시간6분)

           *동행    :은하수산악회 

 

 


 

  제가 가야산을 처음 오른 것은 대학교 3학년 때의 일입니다.

1970년 11월21일 토요일 밤에 22회 생일을 자축할 뜻으로 혼자서 2박3일의 가야산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이번에 은하수 산악회와 함께 세 번째로 가야산을 오르며 38년 전의 가야산 여정이 마치 며칠 전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된 것은 그 때의 여행이 이번 산행과는 분명하게 대비되어서였습니다. 밤9시에 서울역에서 밤차를 타고 장장 6시간을 달려 꼭두새벽에 대구역에 도착해 하차한 일, 해인사 가는 버스를 기다리느라 대합실에서 4시간 동안 오들오들 떤 일, 해인사를 둘러본 후 계곡 위에서 텐트를 치고 두려움 속에 하룻밤을 지새운 일, 밤중에 잠을 설쳐 뜬눈으로 밤을 꼬박 새며 한 산형에 장문의 편지를 쓴 일, 사흘간의 긴 여정으로도 겨우 가야산만 올랐다가 그것도 군부대가 점하고 있는 정상은 올라가지 못한 채 바로 되내려온 일, 그리고 하산해서 버너로 떡국을 끓이다 휘발유가 떨어져 불이 꺼지는 바람에 낭패를 본 일 등등은 요즈음의 당일치기 명산탐방과는 너무나도 다른 풍경들입니다.


 

  기억이 쌓이면 추억이 되고 추억이 오랜 세월을 참아내면 전설로 남습니다.

이제 겨우 60년을 갓 살아온 제가 38년 전의 여행으로 이 산에 이토록 아스라한 추억을 갖고 있는데 가야 나라보다 훨씬 먼저 생성된 가야산이 이렇다 할 전설을 갖고 있지 않는데서야 말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가야는 망했어도 가야산이 그대로 남은 것은 이 산이 전해주고 싶은 전설이 많아서입니다. 이 전설들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일은 가야산을 오르내리는 산객들의 몫일 것 같아 집에 돌아와 이 책 저책을 뒤적거렸습니다. 과연 가야산은 우리나라 12대 명산답게 전설도 꽤나 다채로웠습니다. 가락국 개국과 해인사 창건에 관련된 전설뿐만 아니라 후삼국의 영웅들과 신라 최고의 문인 최치원의 발자취를 훑어볼 수 있어 가야산이야말로 아날로그 문화의 보고처럼 느껴졌습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만들어지는 디지털 문화가 오늘을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빠르기와   효율을 제공해준다면, 우리 선조들의 땀과 얼이 배어 있는 아날로그문화에서 우리들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한 구슬로 꿰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0과 1의 비트(bit)로 결판내는 디지털로는 세월의 지혜가 농익어 숨어있는 아날로그적 가치를 재현할 수는 없습니다. 설사 이 세상이 오늘을 살아가는데 더할 수 없이 편리하고 유용한 디지털로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꿰뚫는 아날로그적 통찰과 지혜가 없다면 이 세상은 참으로 가볍고 삭막할 것입니다. 이런 저런 전설들이 살아 숨 쉬는 가야산과 이 산에 자리하고 있는 해인사, 그리고 이 절이 몇 백년간 무탈하게 보관해온 팔만대장경 등 이 모두가 세월이 발효해 만든 대표적인 아날로그 문화이기에 이번 가야산의 산 오름은 단순한 명산탐방이 아니고 아날로그 문화탐방을 겸했다 싶어 지분대는 봄비를 무릅쓰고 집을 나서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아침10시45분 59번 국도가 지나는 백운동 입구의 가야산마트를 출발했습니다.

주차장을 막 지나 뾰족한 뱃머리 모양을 한 가야산야생화식물원 건물을 바라보면서 서방의 극락정토로 향하는 반야용선의 선두(船頭)가 저토록 날카로워서는 아니 되겠다 했습니다. 백운동탐방지원센타에서 자료집을 받아들고 다리를 건너 용기골계곡을 왼쪽으로 끼고 올라가며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아취식의  예쁘장해 보이는 첫 번째 주홍색 철교가 백운1교로 계곡이 끝나는 백운사지에 이르기까지 1개의 철다리와 2개의 나무다리를 더 건넜습니다. 산행시작 40분 만에 백운1교와 2교를 건너 상왕봉 전방2.7Km지점인 석성 위 공터에 다다랐습니다. 백두대간의 대덕산에서 뻗어 나온 가야산이 워낙 큰 산이라서 경남의 합천과 거창, 그리고 경북의 성주 등 3개 군을 어우르고 있는데 이 산의 60% 이상이 성주 땅에 속해 있어도 해인사가 자리한 합천의 가야산으로 더 많이 알려져서인지 성주군에서 이 작은 공터에 커다란 가야산 안내판을 세워놓았습니다.


 

  11시47분 서성재로 올라섰습니다.

석성 위 공터를 막 지나 이제껏 걸어온 돌길이 끝나고 나무계단 길이 시작됐습니다. 0.7Km를 더 걸어 나무로 만든 백운 3교와 4교를 마저 건너자 백운사지가 나타났습니다. 돌무더기 몇 개라도 남아 있지 않았다면 이곳을 옛 절터로 추정하기 쉽지 않겠다 싶은 백운사지를 지나 산 죽 사이로 낸 나무계단 길로 올라서며 용기골을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몇 분 안 지나 다다른 서성재에는 나무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는 산객들이 꽤 여러분 있었습니다. 서성재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몇 걸음 옮기자 너덜겅(block stream)이 나타났습니다.


 

  너덜겅이 발달한 대표적인 산을 들라면 단연 경남 밀양의 만어산입니다.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 때 용왕의 아들을 따라 온 일만 마리의 물고기들이 변해서 너덜겅이 생겼고 그래서 절 이름을 만어사로 정했다는 전설은 여기 가야산의 칠불봉의 전설과 동시대의 것이어서 혹시나 여기 너덜겅이 칠불봉의 전설을 잉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칠불봉의 전설인 즉 이러합니다. 김수로왕이 아유타국공주인 허황옥과 결혼해 낳은 왕자 열 명 중 장남은 왕위를 계승했고 차남과 삼남은 허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나머지 일곱 아들은 칠불봉 밑에서 3년간 수도한 후 생불이 되었다는데 왕비 허황옥은 칠불봉의 그림자가 비치는 해인사 앞 영지를 찾아 발심 출가한 일곱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는 이야기입니다. 성주 땅 칠불봉이 1,433m로 합천 땅 상왕봉보다 3미터 더 높음에도 이 산의 주봉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것은 이 봉우리가 가야산을 대표하는 법보종찰 해인사의 경내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짧은 너덜길이 끝나고 한참을 더 올라가 꽤 긴 계곡이 한눈에 잡히는 널찍한 전망바위에 올라 10분가량 쉬었습니다. 그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올랐는데도 여전히 후미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대간이나 정맥 종주처럼 선의 산행에서는 선 잇기 자체가 훌륭한 스토리가 될 수 있기에 사진을 그리 많이 찍지 않아도 집에 돌아가 산행기를 쓰는데 큰 어려움이 없지만 명산탐방처럼 한 산을 정해 오르내리는 점의 산행에서는 전망 좋은 점들에서 숨을 가다듬으며 셔터를 눌러대야 하기에 자연 산행시간이 더 걸립니다. 워낙이 발걸음이 느린 터라 언감생심 선두자리는 바라지 못해도 너무 늦어 산악회 일정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 되겠기에 저 나름대로 산행을 서두르는데도 항상 후미를 벗어나지 못해 발 빠른 산악회를 따라다니는 것도 이제 몇 년 안남은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13시22분 해발1,430m의 상왕봉에 올라섰습니다.

전망바위에서 되돌아와 첫 번째 철 계단에 올라선 시각이 12시37분이었습니다. 머리 위 칠불암이 어서 올라오라고 손짓하는 데도 가파른 철 계단들과 좌우의 비경이 발목을 잡아 반시간이 거의 다된 13시5분에야 해발1,433m의 칠불봉에 올라섰습니다. “겨울이 오면 봄이 멀 수 있으랴?”는 영국의 서정시인 셀리의 명시 “서풍부(Ode to the west wind)"가 무색하게, 여기 칠불봉은 상고대가 꽃피운 겨울 꽃이 만발해 봄이 와도 봄이 아니라는 “춘래춘 불사춘(春來春 不似春)” 문구가 더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이 정도 높이라면 허 왕비가 생불한 자식들을 만나보고자 여기 칠불봉까지 오를 수 없기에 해인사 앞 영지(影池)를 찾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산의 주봉은 서쪽으로 200m 떨어진 상왕봉입니다. 겨울의 끝자락을 움켜쥐고 봄의 길목을 막고 있는 잔설들이 종종 눈에 띄는 암릉 길을 걸어 상왕봉으로 옮겼습니다.


 

  상왕봉에 올라서자 꽤 많은 산객들이 벌써 자리를 점하고 있어 표지석 옆에 배낭을 세워놓고 기념사진을 찍겠다는 생각을 접고 표지석만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세 번의 산행 끝에 가야산 정상을 처음으로 올랐습니다. 1970년 늦가을에는 군부대가 들어 있어서, 그리고 5년 전 겨울에는 눈보라가 너무 드세서 오르지를 못하고 그냥 내려갔기에 이번 산 오름이 가야산 정상은 초등인 셈입니다. 가야산은 그 별명이 다섯 개나 되는데 그 중 우두산(牛頭山)이 가장 많이 알려진 것 같습니다. 부처가 성불한 보드가야(Buddha Gaya)에서 유래했다는 가야(伽倻)라는 말은 힌두교 교도들이 숭상하는 소(牛)를 뜻한다 하니 소머리를 닮은 가야산이 자연스럽게 우두산으로 불렸을 것입니다.


 

  상왕봉에서 넓은 공터로 내려서 해인사로 향하는 하산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공터 바로 앞의 우뚝 선 암봉을 오른쪽으로 에돈 후 한참을 내려가 바위 끝에 매달려 있는 고드름을 만났습니다. 작년 1월 금북정맥 종주 중 계룡산에서 만난 고드름에 보냈던 찬사를 가야산의 이 고드름에도 그대로 올리고자 합니다.


 

  “바위 위에 내려앉은 하얀 눈이 그 끝에 붙어서 얼기와 녹기를 되풀이하며 키워 온 빙주의 고드름이 이리도 처절하도록 아름답게 느껴진 것은 이렇게 해서라도 자기생명을 늘려가고자 하는 하얀 눈의 고군분투에 감탄했기 때문입니다. 정신없이 하늘을 날다가 이 땅에 내려앉아 얼마고 쉬다보면 날씨가 풀리고 그래서 녹아버리면 일생이 끝나는 눈이 오랜 시간 생명을 부지해가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아마도 얼음상태의 고드름으로 변해 얼음기둥을 키워나가는 것이 아닐까 해서였습니다. 진작 흰 눈으로부터 생명을 이어가는 지혜를 보고 배웠다면 이틀 후면 몸속의 나이테에 원 하나가 더 그려지는 이 세밑에서 가는 세월에 섭섭하다고 마냥 투덜대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13시57분 큰 길에서 오른 쪽으로 조금 들어가 석조여래입상을 둘러보았습니다.

목도 발도 모두 잘려 다시 이어 세운 여래입상은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원형이 제대로 보존되지는 못했지만 질그릇 같은 투박한 모습에서 당시 부처님을 바라다보는 백성들의 심성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제 길로 돌아와 10분가량 더 걸어 나무의자가 세워진 쉼터를 지났습니다. 푸르른 산죽사이로 난 계단 길을 부지런히 내려가 계곡을 만났고 다시 20분을 내려가 해인사로 들어가는 나무다리를 지났습니다.


 

  15시10분 해인사(海印寺) 앞에 도착했습니다. 

해인사로 들어가는 나무다리를 막아놓아 이 다리에서 10분을 더 내려가 해인사 경내로 들어섰습니다. 왕후의 불치병인 등창을 법력으로 치료해준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라의 애장왕이 서기 802년에 창건해줬다는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을 모시는 법보종찰(法寶宗刹)로 잘 알려진 명찰입니다만, 이 깊은 산골짜기에 지은 절 이름을 왜 바다를 연상케 하는 해인사(海印寺)로 명명했을까 그 내력이 자못 궁금했습니다. 한국의 산하 사이트에 명 포토에세이를 남기시는 일만 성철용 선생님의 산행기에 따르면 해인(海印)이란 “대방광불 화엄경” 속의 “해인삼매(海印三昧)”를 줄인 말로 그 뜻이 “바다에 온갖 사물의 그림자가 비치듯이 부처님의 지혜바다에는 온갖 불법이 나타난다.”라는 것으로 화엄의 진리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해인사(海印寺)로 이름을 지었다 합니다. 백운동의 가야산야생화식물관의 건물이 왜 뱃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 가에 대한 의문도 같이 풀렸습니다.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대적광전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한 해인사 장경판전(藏經板殿)이 팔만대장경을 모시는 곳입니다. 저는 팔만대장경이야말로 우리나라 아날로그문화의 결정판이라는 생각입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디지털로는 팔만대장경을 재현할 수 없는 것은 혜량할 수 없는 콘텐츠의 깊이와 양 뿐만 아니라 목판에 배어있는 우리 선조들의 온갖 지혜와 땀 때문입니다. 1,511종의 경이 담긴 6,802권의 대장경을 가로70cm, 세로24cm, 두께 2.8cm의 목판 81,258매에 일일이 새겨 넣은 불심도 대단하려니와, 판본이 상하지 않도록 기울인 세심한 배려도 이에 못지않다는 생각입니다. 자작나무, 산벗나무와 돌배나무 등 주로 남해바다 여러 섬에서 자라는 10여종의 나무들을 베어내 3년 동안 바다에 담근 후 조각을 내어 이 조각들을 소금물에 삶아서 그늘에 말렸다가 대패질을 해서 붓으로 쓴 다음 끌로 글자를 새겨 넣은 후 마지막으로 판 전체에 옻칠을 해 벌레들이 좀먹지 못하도록 한 팔만대장경을 온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통풍이 잘되도록 해인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장경판전을 지었고, 이 때 바닥을 깊이 파고 숯, 찰흙과 횟가루를 다져 넣었다는 우리 선조들의 지혜는 단 하나도 빼놓아서는 안 되는 우리 고유의 아날로그문화의 소중한 유산인 것입니다.   


 

  15시47분 해인사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고운 최치원선생이 거닐었을 계곡 길을 따라 내려가 주차장에 도착해 산악회에서 준비한 국밥을 들어 요기를 했습니다. 

 

  마지막 사족은 견훤과 궁예, 그리고 왕건에 대한 일화입니다.

관혜스님과 희랑스님은 한 스승아래서 수학했습니다. 유불선및 천문지리에 조예가 깊은 관혜스님은 궁예와 견훤을 제자로 삼아 가르치면서 이 두 사람에게 서로 힘을 합쳐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라고 당부한 후 두 사람 모두 산에서 내려 보냈다 합니다. 희랑스님은 가야산 최고의 도량터인 백련암에서 멀지 않은 희랑대에서 견훤에 쫓겨 목숨이 위태로운 왕건을 구해주었고 이때에 관혜스님은 해인사에 계셨습니다. 동문수학한 두 스님의 반목과 갈등이 이들 때문에 생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끝내는 화엄종이 북악과 남악으로 갈라진 것으로 보아 두 스님 간의 반목은 더 심화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 시대 최고의 석학 중의 한 분이신 이어령 교수께서 그의 저서 “디지로그 선언”을 통해  “디지로그(Digilog)”를 주창했습니다. “디지로그”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융합을 뜻하는 것으로 첨단정보사회에서 미래를 읽는 키워드가 바로 “디지로그”라고 갈파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 세계의 디지털문화를 주도하고 있는 것이 정보도 먹어 삼킬 정도로 무엇이든 먹어버리는 아날로그문화가 엄청 강하기에 가능하다면, 이미 우리나라 사람들은 디지로그를 실천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기는 저도 아날로그문화를 치켜세우고자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며 이 글을 쓰고 있고 또 가야산과 해인사의 문화유산을 디지털카메라에 담아 왔습니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최고의 아날로그적 문화유산을 남긴 분들이 우리의 선조일진데 이 팔만대장경을 디지털화해 온 세계에 널리 알리는 것은 우리 후손들의 몫이라는 것이 가야산을 다녀온 명산탐방 소감입니다.


 

  *위 글은 일만 성철용선생님의 가야산 포토에세이와 유인학님이 지은 우리명산답사기를 많이 참고하고 또 인용도 했습니다.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