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산행개요


 


-         일자 : 2004. 1. 17 (土)


-         안내 : 월드컵 산악회


-         시간 : 4시간 30분


 


운두령 1,089m 출발(10:30) → 1,492봉(11:50) → 정상 1,577m 도착(12:30), 중식 → 고개 삼거리(13:30) → 이승복 생가터 (14:50) → 버스 정류장(15:00)


 


2.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 산경표(山經表)에 이름없는 계방산


 


 계방산은 홍천군 내면과 평창군 용평면 사이에 있는 1,577m 높이의 산으로서 남한에서는 한라, 지리, 설악, 덕유산에 이어 다섯 번째 높은 산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등산 안내서에는 운두령을 산행기점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그 운두령은 해발 1,089m 높이로 우리나라에서 차량이 통과하는 가장 높은 고개라고 한다.


 


 산행에 앞서 계방산이라는 이름이 관심을 끌었다. 한자로는 계수나무 계(桂), 꽃다울 방(芳)이니 계수나무가 꽃처럼 아름다운 산이라는 뜻이리라. 그러나 계수나무는 우리나라에는 없는 나무다. 어려서부터 듣고 자란 동요의 한 구절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가 우리들의 가슴속에 새겨져서 계수나무는 의례 달 속에나 있는 상상 속의 나무려니 치부하고 있었지만 국어사전을 보면 계수나무 과의 낙엽교목으로 중국남부나 인도에 있다고 한다.


 어쨌든 우리나라에는 없는 계수나무가 꽃처럼 아름다운 산이라니 그 이름은 어디에 연유하는 것일까?


 


 우선 산경표에서 그 이름을 찾아보기로 했다. 산경표는 조선 영조때 어문학자이기도 신경준이 지은, 우리나무의 산줄기를 계통적으로 표시해 놓은 산의 족보라고도 할 수 있는 책이다. 우리나라의 산맥을 일본학자들이 태백산맥, 소백산맥, 차량산맥 등으로 이름 붙이기 훨씬 이전에, 1대간(大幹), 1정간(正幹), 12정맥(正脈)으로 정리한 책으로 유명하다. 그 산경표를 보면 백두대간(白頭大幹)이 금강산 → 설악산 → 오대산 → 두타산 • 청옥산 → 태백산 → 소백산으로 이어지는데 오대산에서 갈라져 나온 계방산은 나타나 있지 않다. 계방산과 비슷한 연방산(燕方山), 운두령과 비슷한 은두산(銀頭山)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높은 산이 조사에서 누락되었을 리는 없고 산경표 이후 산이름이 바뀌었거나 와전되었을 것이다.


 


 산경표는 한북정맥, 한남정맥, 금북정맥, 금남정맥, 낙동정맥, 낙남정맥이라는 정맥이름에서 보듯이 한강, 금강, 낙동강 등 강을 기준으로 분류하였다. 그러다 보니 북한강과 남한강 사이에 있는  계방산, 치악산, 유명산 등 이름 있는 산들이 정맥으로 인정 받지 못하고 백두대간의 곁가지로 남게 된 것 같다.


 


 계방산이라는 이름의 연유를 기록상으로는 찾을 수 없어 실제 산행에서 찾아보려 했다. 아래에 다시 쓰겠지만 나는 이 산행에서 참으로 멋진 천년 주목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우리 조상들은 그 주목을 달 속의 계수나무라고 생각하고 그 멋진 모습에 꽃다울 방(芳)자를 붙여 계방산이라고 이름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 운두령에서 정상까지


 


 운두령은 차량이 넘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개라고 등산안내서에 소개되어 있지만 버스를 타고 올라보니 지리산 성삼재보다 훨씬 낮게 느껴졌다. 고개를 오르기 시작하는 지점의 고도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리라. 운두령에는 먹거리집 몇 군데가 있고 우리 버스 외에도 두 대의 버스가 더 있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이젠과 스패취를 착용하고 윈드 자켓까지 걸치고 10시 반에 산행을 시작했다. 약간 흐리지만 바람은 별로 없고, 영하 2~3도로 느껴지는 등산하기 좋은 날씨이다. 경사 급한 계단을 오르고 보니 눈 쌓인 능선 위로 외길이 이어져 있고 쌓인 눈 위로 산죽이 푸른 잎을 흔들고 있다.


 


 등산객들은 서너 명씩 짝을 지어 얼마간의 간격을 두고 떠들석하게 이야기를 하며 걷고 있지만, 나는 언제나처럼 혼자서 걷는 쪽을 택했다. 여기까지 와서 세상일을 두고 떠들고 싶지도 않고 산이 주는 즐거움을 조금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이다.


 


 등산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 제법 길게 뻗은 나뭇가지 하나에 약속이나 한 듯 일렬로 매단 리본들이 울긋불긋 바람에 날리고 있는 게 보인다. 어렸을 때 성황당에서 본 형형색색의 천 조각들과 그것이 주는 무서움증이 떠올랐다. 


 


 등산을 시작한지 1시간쯤 지나 해발 1,300m쯤 올라왔다고 느껴질 즈음, 시작할 때 10cm쯤이던 눈은 30cm가량 깊이 쌓였고 산죽은 앞 끝만 조금씩 보인다. 사람들은 신이 나서 눈을 배경으로 디카를 눌러대기 바쁘다. 나는 카메라 대신 가슴속에 담으려고 아름다운 설경을 보기에 바쁘다.


 


 해발 1,400m를 넘었다고 생각될 즈음, 나무들은 갑자기 왜소해지고 산죽마저 보이지 않는다. 바람은 점차 세어지고, 그 바람에 산 허리에 있는 눈을 몰아다가 능선에 쌓아 1m도 넘을 눈톱(?)을 만들어 놓았다. 사람들은 그 눈톱을 피하여 눈길을 트고 산을 오르는 것이다.


 


 12시 반경 높이가 1,577.4 m라는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임을 알려주는 표석이 있고 그 옆에는 돌무더기라고 해야 옳을 엉성한 돌탑이 쌓여 있다. 그 높이가 0.6~0.7m 되니 산 높이도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정상 아래 제법 넓은 마당에는 삼삼오오 모여 앉아 점심을 먹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세어진 바람 앞에서 추위에 떨며 김밥 몇 덩이를 먹고 서둘러 바람찬 정상을 떠났다.


 


. 뜻 밖에 만난 천년 주목


 


 정상에서 정류장까지 가는 데는 직접 내려가는 길과 고개 삼거리를 경유하는 길, 2 개의 길이 있다. 대부분 직접 내려가는 짧은 길을 택했지만 나는 눈길을 오래 걷고 싶어 긴 우회로 쪽을 택했다. 고개 삼거리로 내려가는 도중에 몇 군데 가파른 곳을 만났지만 눈이 깊게 쌓여 있어 넘어져도 다칠 염려가 없어서 좋았다.


 


 오후 1시 반경 떠밀리듯이 눈길을 내려와 고개삼거리에서 우회전하니 흰 눈을 둘러쓴 천년 주목이 눈앞에 나타났다. 흉고직경(胷高直徑) 30cm 정도의 큰 줄기 넷이 - 한 그루인지, 두 그루인지 알 수 없었다.- 기둥처럼 웅장하게 20여 미터 높이로 서 있고, 줄기마다 중간 쯤부터 큰 가지들을 뻗었고 – 아랫부분은 굵고 길고, 올라 갈수록 가늘고 짧게 그 질서가 잘 잡혀 있었다.- 거기서 다시 수없이 많은 잔가지들이 뻗어 나와 무성한 잎을 피워 나무둘레를 둥그렇게 드리웠는데 그 위를 흰눈이 덮고 있다.


 


 전체적으로 경사 급한 지우산 모양인데 그 안에 들어가니 방안처럼, 놀랄 만큼 아늑한 공간이 10여 평이나 형성되어 있다. 어떻게 이렇게 크고 멋진 나무가 있을 수 있을까 하고 감탄하고 있는데 강릉영림서에서 붙인 표찰이 보인다. 거기 쓰여 있으되 ‘보호수 15-3-3-1-207’.


 보호수라는 이름에 주민등록번호 같은 번호를 붙여서 보호하고 있는 것은 고맙지만 이 나무를 스쳐 흐른 세월의 두께인 수량과 수고, 둘레 등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게 주목에 대해 결례를 하는 것 같아 섭섭했다. 이 주목을 본 것만으로도 오늘 등산은 충분히 보람 있었다고 생각하면서 몇 그루를 문화재 관람하듯이 더 둘러보았다.


 


 이상한 것은 주목 군락지에 많이 보이는 고사주목의 모습, 잔가지를 잃고 큰 가지만 벌리고 서서 풍상을 견디고 있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의문은 얼마 가지 않아서 풀렸다. 30m쯤 될 고사목들은 서 있는 대신 길을 가로막고 또는 길을 피하여 누워 있었던 것이다. 나무는 엄청나게 크고 가지는 많은데 지반에 자갈이 많고 바람이 세니 견디지 못하고 애처롭게 쓰러졌으리라.


 


 그 큰 고사목들이 서 있다면 얼마나 멋지랴 하고 생각하다가 어느 묘비명이 문득 떠올랐다. 쓰러져 누운 주목은 살아서 서 있는 주목에게 자기들 말로 가르쳐주지 않을까.


‘그대가 지금 건강함을 자랑하면서 웅장하게 서 있듯이 나도 전에는 건강하게 서 있었노라. 내가 지금 여기에 누워 있듯이 그대 또한 언젠가는 누워있게 되라라’ 라고.


 


. 호젓한 하산 길에서 만난 한시 강설(江雪)


 


 정상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직접 내려가는 길을 택했는지 따라오는 사람이 없어 한가롭고 조용했다. 온 산은 흰 눈을 덮고 고요 속에 잠들어 있는데 나만이 깨어 눈길을 걷고 있다. 눈은 오다가 그치기를 반복하고 그 눈마저 싸락눈과 함박눈이 번갈아 온다.


 


  눈 속에 깊히 잠든 활엽수림을 지나고 송림을 지나고 꽃잎을 떨군 억새들이 늘어선 언덕을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의 한 사람인 유종원의 한시 강설이 떠올랐다. 이 시는 직장친구 심재영이 고등학교 때 배웠다며 가르쳐준 것이다. 여기 옮겨 놓으니 눈길을 걸으면서 또는 눈 오는 날 홀로 낚시하면서 한번 읊어 보시라.


 


      천산조비절 (千山鳥飛絶)


      만경인종멸 (萬徑人踪滅)


      고주사립옹 (孤舟笠翁)


      독조한강설 (獨釣寒江雪)


 


      일천 산에는 새 날기를 그치고


      일만 길에는 사람자취 사라졌네


      외로운 배엔 도롱이에 삿갓 쓴 늙은이


      눈 내리는 찬 강에서 혼자 낚시하네.


 


. 이 승복 생가 터를 지나며


 


 산길을 벗어나 평지에 들어 얼마를 걷자 이 승복 생가 터가 나타났다. 거기 서있는 안내판이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그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 승복이 마지막에 공비들에게 외쳤다는 그 말,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그 말은 남북대치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던 군사정권 시절에 반공정신의 표상처럼 외쳐대던 말인데, 군사정권이 종식되고도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이승복이 그 말을 한 사실이 없다고 어느 잡지가 보도하여 논란이 되었던 기억이 떠옹라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한다. 그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제 와서 달라질게 무엇이랴.


 


 한 번 철거했다가 복원했다는 이승복의 집은 역사책에서나 본 귀틀집이었다. 통나무를 짜 맞추어 지은 3~4평 짜리 방 둘에, 부엌 하나, 부엌 앞에 이어진 외양간이 전부였다. 귀틀집은 선사시대에 우리 조상들이 살았다고 하여 역사책에만 남아 있는 줄 알았더니 1960년대까지 실제로 존재했고 그 속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했다.


 


  약속시간까지 집결지에 대기 위하여 서둘러 떠나는 눈길에, 이승복과 우리들이 겪은 1960년대의 고단했던 삶의 한 자락이 깔리고 있었다. ( 2004.1.25)


 




▣ 이창범 - 3년전 우계명님이 남기신 지리산 종주기를 잘 기억하고 있는 데, 이렇듯 오래간만에 우계명님의 산행기를 다시 뵈오니 반갑습니다. 항상 좋은글 부탁드립니다. 건강하세요...
▣ 윤도균 - 아 계방산에 이렇게 아름다운 전설과 깨우침을 할수있는 천혜의 자원이 있다니요 꼭 그곳에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님의 산행기가 은은하게 맘에 와 닿는듯한 공감을 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