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산을 오르는 횟수는 일년에 서너번 정도 밖에 안될만큼 산을 자주 찾는 것은 아니다.
또 산을 오른다고 해서 특별한 산행 준비를 갖추는 것도 아니다. 꼭 격식을 갖추고 멀리 떠날야
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는 간단한 륙삭 조차 없이 등산화도 신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IMF 명퇴 이후 근 일년 간을 거의 매일 산행을 했던 친구의 말 처럼 복장을 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자주 산행을 하고 산을 아끼는지 알수 있다는 견해를 따를때, 나는 산을 찾을 기본
예의도 없다는 우스갯 소리이지만 좀 뼈있는 그의 한마디를 귀새겨 들어야 할 만큼 어느때는
동네 산을 오르듯 입던 옷 그대로 오후에 훌쩍 가는 두 세 시간의 소박한 산행을 하길 즐겨한다.

산을 찾는 경우는 참으로 다양하다.
조용한 산 자락에서 마음 공부를 하러 깊은 산을 찾는 경우도 있고 쓰라린 세속에서의
아픔을 치유하러 가는 경우도 있으며, 혹은 어려운 고시 공부를 하러 들어 가기도 한다.
또 산을 자주 찾는 사람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도 산을 오르는 이유를 구하기도 하지만
어느 사람에게서는 산을 통해 삶을 배우고자 한다는 답을 듣기도 한다.
세상이 나를 버린 경우나 내가 세상이 싫어진 경우에도 산은 그 모두를 다 받아줄 만큼
너그럽기도 하여 예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은 산 자락을 벗삼아 一山一詩의 흔적을 남기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새해를 맞이하는 보통의 우리들은 새해 첫날 치는
보신각 종소리와 함께이거나 첫 해돋이를 보기 위해 동산에 올라 새해의 소망을 담아 보고자
하기도 하지만, 나의 경우 영기 있는 서울 근교의 산을 찾아 조그만 소망을 깊이 다짐 받고
싶었다.

어제는 마침 날씨가 한 겨울 같지 않게 바람도 없고 오후 한 낮은 약간 포근하기도 하여
산을 찾기 좋은 날씨였다. 새해 소망을 세우고 담아내기 좋은 地氣 그득한 산이 어딜까?
새해 첫주의 날 좋은 토요일 나는 산을 찾아 내 소망을 담아 오고자 했었다.
인터넷을 뒤졌지만 적당한 산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마침 옛날 군포 시절의 직장 동료였던
진박사로 부터 전화가 왔고 잠시의 통화후 그도 나와 똑같은 생각임을 확인한 후, 우리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오후 1시 반에 양평 쪽으로 차를 몰고 있었다.
일단 시간이 오후 산행을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가끔 가곤 했던 용문산
설매재를 타서 유명산 이웃한 어비 계곡으로 진입하는 비 포장 산행도로를 타려고 했었다.
이미 지금은 맛 기행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 명소가 되어 버린 쏠비알을 향하던 중,
사나사 절 표지판을 보고 결국은 방향을 그쪽으로 바꾼 것은 결과적으로 잘한 일인성 싶다.
사나사는 옥천면 깊은 산 중에 있는 고찰이기 때문에 근처의 용문산 한 봉우리라도 오후 한 때의
산행을 의미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근처는 비교적 내가 자주 찾는
단골 드라이브 지역이기도 해서 자주 오기도 했었지만 유독 사나사 절로 들어 가는 계곡은
이번이 처음인 것도 오늘 사나사 쪽으로 길을 가게한 또 다른 이유이기도 했었던 것 같다.

사나사를 오백여 미터 앞두고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 인근 지역 명소를 그림으로 안내한
표지판을 보니 사나사를 기점으로 장군봉, 함왕성혈, 용문산, 그리고 백운봉이 각각 거리와
함께 그려져 있었다. 그 지역에 익숙한 나는 백운봉이 마음에 들었다. 경강도로를 타고 양평
초입으로 차를 몰다 보면 유난히 뾰족하고 그 아래로는 치마 처럼 완만히 넓게 펼쳐져 있는
산자락. 어쩌면 산의 그런 남 다른 지형 때문에 불행히 군의 중 대형 사격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그 낮게 펼쳐진 부채살 등성이를 볼라치면 참 산이 시원하고 맵시있게도 생겼다는 생각이
드는 그 산. 글을 쓰는 지금, 어제의 산행 감흥을 되세기고 싶어 인터넷을 치자 산을 좋아하는
누군가에 의해 이미 그 봉우리는 한국판 마테호른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나사에 도착한 것은 벌써 오후 세시, 때문에 근처의 함왕성지나 상원사 등은 다음 기회에
찾기로 했고 바로 백운봉을 두 사람은 오르기로 마음을 정했다. 아직 눈이 녹지 않아 잔설에
미끌어지기도 하면서 그리 가파르지 않은 계곡에 흐르는 풍부한 수량으로 크고 작은 바윗돌을
메우는 맑은 물이 내 육체와 마음의 찌꺼기라도 쓸어 갈 수 있도록 나는 귀와 눈을 봉긋 열어
놓으며 산을 올랐다.
백운봉을 오르는 주 능선 까지는 눈은 덮였지만 많은 낙엽이 그 밑을 바치고 있었고 대부분은
육산으로 그리 힘들지 않게 오를 수 있었다. 이 후, 산을 오르는 길이 계곡을 이미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할 때, 장군봉 까지 2.36km, 함왕성 1.76km, 백운봉 725m 의 푯말이 서 있는 주능선
까지 우리는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시간을 보고서 4시 반이 가까이 되었음을 알았다.
이미 거기서 산허리 아래의 마을도 많이 기울어진 햇살 한 켠에 옹기 종기 모여 있는 모습과
산 등성이들이 이리 저리 갈려져 있는 모습을 발 아래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허기가 느껴져
왔다. 사실 점심 식사도 거른채였기 때문에 진박사는 시간을 이유로 여기 까지 산행을 한 것을
만족하고 하산을 하자는 것이었다. 내려가는 길은 눈길이라 더 어려울 거라는 이유로. 여기 까지
오른 이상 정상을 보고 가야 오늘 산행의 의미가 있는 거 아니냐는 나의 말은 허기와 갈증으로
눈을 먹으며 올라 왓다는 그의 얘기에 더 이상 어쩔 수 없어 마지막 산행길은 나 혼자 하는 것으로
했다.

마지막 산 정상 까지의 500 여미터는 그야 말대로 지금 까지의 육산에서 암산으로 바꾸더니 쉽지
않은 산길로 오르고 있었다. 가파른 눈길에 가끔씩 모라 부는 바람에 손이 시려웠지만
군데 군데 로프와 철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산길을 도왔다.
오르면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본 봉우리들, 멀리 용문산 공군 기지가 보이고 여러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좍 펼쳐쳐 있음이 예사롭지 않다.
아, 이걸 여기서 보다니. 아직도 날은 구름 한 점 없어 먼 봉우리 까지 눈 앞에 들어 왔다.

그런데 백운봉 정상 까지는 좀 더 가야 한다. 또 다시 철 계단과 로우프를 갈아 타고.
다시 돌아 보았을 때, 발 아래 봉우리들은 아까 보았을 때와 사뭇 또 다르다.
어찌 이렇게 곱게 펼쳐 놓았을까?
......

어느새 해는 많이 기울어져 백운봉의 뾰족한 봉우리는 옆의 봉우리 언덕에 반듯한 삼각 그림자를
만들어 놓았다.

능선의 마지막 구간이듯한 곳에 이르러 빈 가지에 이 삼 십여마리의 새까만 독수리떼가
까악까악거리며 나를 경계한다. 하긴 이시간에, 아니 오늘 산행 중에 한 사람도 보지 못 했으니
예 까지 올라온 내가 낯선 것도 이유였으리라.

로프를 마지막으로 잡고 올라 깊은 숨을 쉴 수 있었다.
와! 정상이다. 사방이 탁 트여 속이 다 시원타 못해 통쾌하기도 하다. 남으로는 남한강이 구비쳐
있고 아래 양평 시가지며 강 건너 강상면 까지 훤히 보인다. 이렇게 후련할 수가.
많은 산을 오르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후련하게 트여진 전망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무엇 보다 압권은 동북방으로 펼쳐진 크고 작은 봉우리들의 행렬일 것이다. 저 봉우리 중에는
용문산을 한 쪽에 두고 중원산, 유명산, 중미산, 도일봉, 장군봉, 그리고 이름 모를
봉우리들이 나를 부르듯 가까이 맞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아, 저리도 영기 넘치는 산과 계곡이
거기 있었음을 보았다. 축복받은 산하여. 아, 축복받은 사람들이여.

해발 940m 백운봉을 새긴 화강암 바위와 백두산에서 떠다 옮겨 왔음을 새긴 통일암은 이곳이
백두 대간의 한 줄기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진박사로 부터 전화가 왔다. 추워서 자기는 조금씩
내려 가고 있다고. 빨리 내려 오라고. 시간은 벌써 5시가 넘어 있었다. 그래, 내려 가마.

한 번 더 둘러 봤다. 그리고 가족 모두의 건강과 안녕과 평화를. 뜻한 일이 모두 이루어 지기를
소망하며 여기 백운봉에 새겨 본다. 어려운 일이나 힘들어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오늘
백운봉에서 배워갈 수 있기를 빌어본다.

하산은 마침 산 위에 높이 뜬 달이 눈길을 밝게 비춰 어렵지 않게 내려올 수 있었으며 사나사에
이르렀을 때 시간은 6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도로가 비교적 잘 닦여진 사나사로 부터 그 아래 마을 까지의 길을 환히 비추고 있는 달빛,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 병풍 처럼 높게 둘러친 올망 똘망한 기암 괴석, 그리고 참 오랜만에 보는 하늘 위에
박힌 많은 별들, 저거는 카시오피아, 저건 오리온, 저기는 큰 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