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바람 속의 환상방황(環狀彷徨=링반데룽)

 

Mt. 0525   284.4봉 외 무명봉 - 전남 장흥군. 강진군

 

산 행 일 : 2005년 5월 5일 목요일
산의날씨 : 흐린 후 비바람
산행횟수 : 초행
동 행 인 : <단독산행>
산행시간 : 4시간 33분 (휴식30분포함)

 

자울재 <0:24> 안부 사거리 <0:16> ▲284.4봉 <0:20> 벼랑 바위봉 <0:24> ×398봉 <0:26> 약
370봉 <0:32> 장흥 위씨 묘지 <0:35> 약 370봉 <0:18> 풀 없는 무덤 <0:29> 무덤 2기/약 170봉
<0:19> 장항 마을

 

 

                                                   오늘 산행 구간도

 

오늘 산행을 탐진기맥 2차 종주로 보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고 그렇다고 묻어 두자니 다음
산행과 연결 짖기가 애매하여 그냥 단일 산행으로 간주하고 참고하려한다.

 

히터를 틀고 앞이 제대로 안 보이는 2번 국도를 무려 2시간 10여분이나 걸려-갈 때는 1시간 10분
이 소요되었지만 열가재 교통사고와 순천 우회도로상의 교통사고로 더 지체되었음- 귀가해서 옷
을 갈아 입으며보니 정강이서부터 무릎 위까지 가시에 찔린 반점과 함께 푸르딩딩 멍이 들었다.

이런 결과가 초래된 것은 못된 자만과 지형도를 보다 세밀히 살펴보지 못한 탓이니 오로지 스스
로 반성하고 보다 나은 산행을 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일기예보에 해안부터 비가 내리겠다고 했지만 아침 날씨는 그런 대로 좋고 이미 계획했던 일이라
집을 나서니 아내는 "1회용 비옷을 챙겨가라"고 하나 가시밭길에 들어서면 판쵸우의나 값나가는
비옷은 감히 못 입고 1회용은 금새 걸레가 돼 버린다.

"도중에 비가 오면 종점 답사만 하고 올 테니 염려 마라"며 2번 국도를 신나게 달린다.

오늘은 자울재에 차를 두고 골치재나 석남동으로 하산한 후 관산 택시와 버스를 이용할 생각으로
자울재에 닿아 지난 일요일 내려섰던 절개지 밑 갓 길에 주차하고 길을 건넌다.

 

08 : 10 들머리 나뭇가지에 표지기 하나 걸고 절개지 가장자리를 타고 오르는데 초입부터 무성한
산딸기 덤불에 걸리고 가시에 찔리는 힘든 산행이 시작된다.
어렵게 능선으로 오르면 억센 잡목이 걸리적거리나 걷기가 훨씬 편해진다.

 

08 : 30 돌무더기를 지나 돌보지 않은 무덤 같은 것이 있는 첫 봉, 약 230봉에 올라 한참 진행하
다 발견한 좁고 낡은 표지기가 반가워 살펴보니 검정 매직으로 '春川 夫婦山行'이라 쓰였다.

 

산행 중 암봉을 돌아 오르다 한 번 더 보았으며 284.4봉에서 본 남해 정병훈 님 부부의 표지기
한 개가 전부였는데 우선 나부터도 선뜻 매달 수 없으니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보이는 쓰레기마
저도 사람이 지났다는 징표이니 그리 반가울 수가 없다.

어쨌던 기맥 지맥이 아니면 산 타는 맛을 느낄 수 없다는 정병훈 님 부부와 신경수 님 부부 외
또 다른 부부 꾼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08 : 40 안부 사거리에 이르자 멧돼지 흔적이 곳곳에 보여 신경이 곤두서 미리 챙긴 호루라기를
꺼내 '호루루 호루루' 불며 가니 와중에도 웃음이 절로 나는데 발 앞에서 작은 물체가 휙 지난다.
알 여섯 개를 품고 있던 작은 새가 놀라 나간 것이다.

 

 

                                                어미가 놀라 몸을 피한 새 둥지

 

08 : 56 잡목이 베어진 길을 조금 오른 곳을 284.4봉으로 여기고 삼각점을 찾으려고 주변을 살피
며 진행하다 좌대가 많이 훼손된 것을 발견하였다.

 

 

                                                     284.4봉의 삼각점

 

아직 비는 내리지 않으나 나무들이 촉촉이 젖었으며 바람이 세게 불고, 이곳에서 시계 고도를 조
정했는데 284.4m를 254.4m로 봤으니 당연히 255m로 맞췄고 빗속에서 환상방황을 하게된 빌미를
만든 큰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09 : 15 바위지대가 펼쳐지며 길도 없으니 좌우 틈새를 따라 어렵게 진행한다.
09 : 24 처음 만난 벼랑 바위, 바람에 내몰리는 비구름 아래로 어북제가 내려다보인다.
날씨만 좋다면 조망이 기막히겠다.

 

 

                                                처음 만난 벼랑바위

 

"오늘은 날씨가 이러니 큰 물병은 필요 없을지 모르겠다"는 아내 말을 안 듣고 배 즙, 콩 음료까
지 두어 개씩 챙겼으면서 미련스럽게 큰 물병을 얼려왔는데 갈증을 느끼지 못하겠다.

 

09 : 29 벼랑바위를 조심스럽게 벗어나면 산죽이 나타나고 길다운 길이 없어 팔다리가 고생하고
수시로 호루라기를 불어야하니 숨이 턱에 찬다.

 

 

                                        길 없는 바위지대가 수시로 애를 먹였다.

 

위험한 바위지대를 돌고 돌아 오르면 전과 비슷한 벼랑바위가 나오고 다시 험한 곳을 지나면 또
벼랑바위가 나타나는데 조망을 즐길 수 있는 곳이겠으나 오늘은 귀찮은 존재일 뿐이다.

 

 

                              날씨만 좋으면 조망이 기막힐 것 같은 벼랑바위가 많았다.

 

10 : 03 높은 벼랑바위에 이르자 몸을 가누기가 힘들 정도로 바람이 강하고, 이미 비가 내렸던지
물기 머금은 나무를 스치며 진행하니 옷은 벌써 젖어버리고 말았는데 빗방울이 들리기 시작한다.

 

한산에 따라가기 님의 산행기가 있으나 나와 달리 역 주행을 해서, 다음에서 탐진기맥을 검색해
보니 단 한 분의 산기가 있는데-이 분도 역 주행- 석남동에서 자울재까지 두 번으로 나눠 종주
를 했으므로 오늘은 골치재는커녕 석남동 갈림길까지도 언감생심이고 잘해야 장고목재에서 운주
리로 내려서던지 그도 못하면 괴바위산을 넘어 임도를 이용하여 산행을 접어야 하겠다.

 

 

                                           파란 지붕 집이 얼핏 보였는데...
 
10 : 19 잡목 덤불 바위 등이 어우러진 지독하게 고약한 봉우리.
시계를 보니 340m를 나타내고 진행할 방향에 나침반을 확인하니 북서쪽이다.
바람재를 아직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340봉이라니?

 

-두 번째 부주의했던 점은 사전에 지형도 봉우리마다 연필로 고도를 표시하고 산행 후 지워버리
는데 이곳 약 370봉을 270으로 기재했으며 바람재를 넘은 약 390을 340으로 착각한 것이다-  

 

10 : 25 서쪽으로 진행해야 하나 북서쪽이라 약간 혼란스럽긴 해도 "호루루 호루루" 호루라기를
불며 출발하는데 우측으로부터 이름 모르는 새가 "꾸꾸꾸꾹 꾸꾸꾸꾹" 화답하니 재미있다.

 

10 : 32 길 없는 능선을 따라 작은 봉우리를 넘고,
10 : 45 굵은 나무가 어지럽게 누워있는 지점을 애써 통과하니 풀 없는 무덤 1기가 있으며 고맙
게도 길이 보이더니 장흥 위씨 묘역이 나오면서 자동차들의 용쓰는 소리가 가깝게 들린다.

 

우측 멀리 2번 국도가 지나긴해도 높은 고개를 오르는 듯이 엔진소리가 시끄럽진 않을 것이다.
비에 젖은 송화가루가 범벅된 나침반을 확인해보니 진행방향은 서쪽이고 뒤는 동쪽이어야 하는데
북쪽과 남쪽을 가리키고 있으니 도중에 길을 잘못 들었음이 분명하다.
         
11 : 00 얼핏 좌측으로 거무스레한 산줄기가 보여 이런 악천후속에서 마루금을 조금 벗어나면 어
떠랴 싶어 멧돼지 길 같은 사면을 돌아 허우적대며 오르니 한 번 들어온 물이 밖으로 안 빠지는
고어텍스 신발 단점대로 철떡거리는 발은 퉁퉁 불은 듯 싶고 길을 찾으려고 온 신경을 집중시키
는데 새소리가 이제는 약을 올리는 것 같다.

 

아주 힘겹게 능선에 올랐는데 어? 바위와 어지럽게 쓰러진 나무 그리고 똑바로 서서 가게 못하던
맹감 줄기가 낯설지 않다.
땅바닥엔 발자국이 있을 리 만무하나 지난 곳을 되돌아 오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11 : 35 빗물을 닦아내며 지형도를 살펴보던 지독한 봉우리.

아∼ 말로만 들었던 환상방황, 링반데룽(Ringwanderung)에 빠지고 만 것이다.

 

땅이 푹 꺼져 내리는 기분이 들고 현기증이 나는가 싶더니 턱이 덜덜 떨린다.
그래! 
내가 있음에 기맥 지맥을 종주할 수 있는 것이지 그 어떤 것도 아니다.
나침반도 들여다 볼 필요 없이 고개를 넘어 가는지 용을 쓰던 자동차 소리를 향해 내려가자.   

이미 속옷까지 흠뻑 젖어 한기를 느끼게 되니 부지런히 걷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어금니를 악다물고 미친 사람 마냥 틈을 찾아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급하게 걸으니 정강이와 무릎
위의 쓰라림은 아량곳 없고 가로지른 나뭇가지를 들이받아 별이 반짝하고 가시덤불에 발이 걸려
나뒹굴기도 한다.

 

12 : 01 예의 그 풀 없는 무덤-기록이 불가능해 숫자를 되뇌며 걸었다-에 이르자 아까는 보지 못
했던 좌측에 좋은 길이 있다.
좋은 길과 무덤은 마을이 가깝다는 의미가 있다.

 

12 : 30 무덤 2기가 있는 곳에서도 능선으로 계속 이어지고 좌우로 내려가는 길이 없더니 이제는
아예 가시밭이 전개되고 만다.

 

12 : 42 또 다른 무덤이 있으나 어디로 올라 벌초며 성묘를 했는지 흔적조차 찾지 못하겠고 앞이
트이는 곳에 이르자 들판 너머로 바라보이는 가로지른 도로가 2번 국도 같으니 부용산이 있을 용
산 쪽이 아니고 정 반대인 북쪽으로 내려서고 있는 것이 아닌가?
  
12 : 49 엄청난 비탈을 줄줄 미끄러져 내린 곳은 한 집 마당이었으며 다행히 사람이 없어 서둘러
골목으로 나서자 장흥군 보호수로 지정된 푸조나무 몇 그루가 섰고 회관에 걸린 현판을 보니 장
항 마을이다.

 

 

                          장항 마을 회관 앞에 이르자 제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꼴이 말이 아니어서 택시도 부를 수 없어 2차선 마을 도로를 따르다 농기계 보관창고에서 황토
빛이 밴 못자리용 폐비닐을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쓰니 몸이 따뜻해지는 느낌이다.

비바람에 펄럭거리는 비닐을 뒤집어 쓴 모습이 불쌍해선 지 대부분 자동차들은 간격을 두고 비껴
갔으나 어떤 이들은 빗물을 퉁기며 스쳐 깜짝 놀라게 만든다.
집 없고 차 없다면 서러워서 살겠는가?
괄시 말게 이 사람들아!
욕이 터져 나온다.

 

빠른 걸음으로 고개 주유소 옆의 식당에 들려 선체로 뜨거운 커피 한 잔으로 몸을 추스른다.

 

13 : 55 자울재에 이르러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자동차를 보니 자신에게 화가 나고 목이 메이면
서 뺨을 타고 입으로 스며드는 액체가 짭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