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다 보면 가끔은 별 이유없이 미치는 수가 있다는데

내가 요즈음 꼭 그꼴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렇게 미치는 사람이 나 말고도 더 있어서

호송차(?)를 타고갈 때 심심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 동안 잠잠했던 야행본능이 갑자가 도져서

요즘들어 걸핏하면 야밤에 집을 나서기 일쑤이다.

나선다기보다 아예 집으로 갈 생각을 안한다는 게 맞을 것이다.

  

2005년 4월 28일

나는 평소보다 좀 일찍 돈 버는 일을 중지하고

운동화에 신사복바지를 펄럭이며 땅거미를  거슬러 용천사에 도착했다.

일단 차는 용천사 앞에다 세워두고 용천사 좌측길로 접어들어

비슬산으로 올라 갔다.

거 뭐 가는 길이야 뻔하니 여기다 적을 필요는 없고

늦은 밤 홀로 오른 비슬산은 황홀무아경이었다.

어슴프레하나마 제법 자세를 가다듬은 달빛에 취해

밤나들이나온 비슬산 참꽃들이

도무지 집에갈 생각을 하지않는다.

  

- 저녁 9시에 입산하여 같은날 자정에 하산완료

- 월하독작이라는 단어의 본 뜻을 이해했음.

- 음측대상자에서 제외되었음. (전 걷은 후에 내려 왔으므로...)

  

2005년 4월 29일

입이 방정이라고 했던가......

자랑삼아 떠벌린 입방정이 그만 화근이 되어

29일에 또 가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아리따운 선녀가 둘이나 동행하니

이 아니 즐거웁겠는가!

(사실은 이날  이 선녀들이 나를 코꿰어 그리로 데려갔음.)

  

사실 선녀라고하기는 뭐 좀 그렇지만

그 선녀(?)가 혹시 이글을 읽고 기분 좋아져서

나중에 쐬주라도 한 잔 사지않을까 해서.....(히~)

  

헐티재에 오르는 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고

꼬불꼬불 분위기도 좋아서 한 번 가면 또 가고싶어진다.

산 들머리는 입구가 철조망으로 막혀있는데

낚시바늘처럼 급격히 꼬부라지는

헐티재 장상에다 일단 차를 세우고

다시 조금 아래로 보면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이 오름길은 낮이나 밤이나 분위가가 참 좋다.

  

동행하시는 두 여자분은 무섬도 안타고

성큼성큼 잘 진행했다.

중간 중간 쉬자고도 하련만은

쉬도 안마려운지 그냥 올라간다.

  

마침 날씨가 흐린터라 산길은 좀 어두컴컴했다.

중간에 잠시 쉬면서 한 잔씩 나누는 그 술맛이란......

이럭저럭 비슬산 코밑 좀 펑퍼짐한 안부에 다다르니

갑자가 뒤에오던, 무게 좀 많이 나가는 선녀가

그만 돌아가자고 한다.

???

무게가 조금 덜 나가는 선녀가 그 말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홱 돌아서는 빠르기가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

나는 선두에 잘 가다가 갑자기 꼴지가 되었다.

  

이 코스는

일반적으로 약 1시간 20분정도 걸린다고  알려져 있는데

밤이라 그런지 정상까지는 1시간 50분 정도 걸릴 것 같았다.

  

하산길은 그사이 밤안개가 슬슬 덮여오기 시작하여

좀 음산하기까지 했는데

알바를 조금 곁들여 차를 세워둔곳까지 오니

역시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조금만 더 지체했으면

귀신들이 활동을 시작하는 시간이라 꽤 재미있었을 테지만

우리는 그냥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 21시 20분에 입산하여 0시 10분에 하산완료

- 겁없는 여자들을 목격함.

  

2005년 5월 1일

속았다!!!

비는커녕  실안개도 끼지않은 금쪽같은 일요일을

오전 내내 배꼽으로 방바닥마사지를 했다.

그래도 오후에는 대충 차비하여 집앞에서 시작되는

용지봉 오름길을 지나서 대덕산을 거쳐

지난 주에 11시간을 걸었던 건너편 성암산줄기와

욱수골을 두루 조망하며 자양산을지나 신매동까지

꽤 괜찮은 산행을 즐겼다.

  

월드컵경기장 뒤쪽의 높은봉을 자양산이라고 하는데

적당한 암릉이 섞인 능선길과

내리막 아카시아 숲길은 요즈음이 제철이다.

  

아이들 학교 문제로 욱수골입구(신매동)에서 한 3년 살았었는데

이 코스는 저녁에 가족이나 지인들과 함께 

간단히 즐기기에 안성마춤이다.

  

한 번은  이 코스로 해서 용지봉을 넘어 범물동으로 갈 요량으로

저녁 뉴스가 끝날무렵 입산하여 처음엔 잘 진행 했는데

대덕산을 조금 못미친 지점에서 길이 헷갈려

한 밤중에 된통 고생한 적이 있었다.

언젠가는 설욕전을 벌여야겠다고 벼르고 있던터라

꼼꼼히 길을 살피면서 지도를 대조하며 좀 천천히 가고 보니

시간이 무려 6시간이나 걸렸다.

  

2005년 5월 2일

저녁 8시에 사무실 문을 잠그고 설욕전에 나섰다.

욱수골에 도착하여 자양산을 처다보니

몇 번 들락거려서 그런지 좀 만만하게 보였다.

대충 한 4시간쯤 잡고 슬슬 산 들머리로 접어들어

자양산에 올라 사방을 두루 살펴보니

이 혹독한 불경기속에서도

가로등 불빛만은 늠름하게 줄지어 서있다.

저 멀리 하양을 지나 금호와 영천 땀고개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이 자양산 꼭대기는 지난 번 월드컵경기 때

군인들이 단 하루 근무를 위해 나무를 싹 다 베어 버려서

산이 원형탈모가 되어있다.

  

도시는 점차 멀어지고 산은 점점 컴컴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유유자적 걷다보니 시각이 자정을 넘어섰다.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평소 무급수 훈련으로 컨디션은 최상이어서

오늘 설욕전은 그냥 간단히 판정승으로 끝날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길이 없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청계사 안쪽 골짜기인 것 같은데

이리가도 저리가도 길이 보이지 않는다.

이럭저럭 시계는 새벽 2시가 가까워오는데

길은 보이지 않고 배도 좀 고파지고

무서운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저승행 지름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잠시 앉아서 정신을 가다듬으며

어느 분에게 문자를 보냈다.

물론 자느라고 못볼 터이니 답을 바라지는 않고

다만,

다음날 신문기사에 해설을 좀 해 달라는, 일종의 부탁이었다.

  

호랑이 뱃속에서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해서

천천히 정신을 수습하니 좀 희끄므레한 곳이 보였다.

어쭈구리~

대덕산이 나를 보고 히죽 웃는다.

  

생각같아선 한 대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시간이 시간인지라 그냥 조용히 진밭골로 내려섰다.

그래도 집 안방 시계를 보니 4시를 넘기지는 않았다.

결국 설욕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 입산 : 욱수골(덕원고 앞)에서 저녁 9시

- 하산 : 다음날 3시 30분 쯤 용지봉을 벗어남.

- 실패한 요인 :  간이 좀 부어서 준비를 소홀히 했음.

                        지도와 나침반은 물로 손전등도 없이 갔음.

- 결론 : 작은산도 산이다 자만하면 코깨진다.

  이에 이 반성문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