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오세요!! 문학산 ~ 청량산 속으로   

  

   

 

  

  

담쟁이 넝쿨과 여름과 남성과   

문학산 주변의 역사

지도 : 학익, 문학 지석묘 : 인천도호부청사 : 관교동 은행나무 : 인천향교 :
문학산성 : 안관당 : 학산서원 : 사모지 고개 : 중바위 : 갑옷바위 : 연경산정자

  

  

인천의 지형은 산맥을 살펴볼 때 세가 약해서 그 줄기를 살피기는 어렵지만 자세히 보면 계양산에서 뻗은 줄기가 철마산, 주안산, 소래산에 이르기까지 남북으로 해안선과 평행되게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계로 인천의 생활 문화권은 고대 국가 시절부터 자연환경과 더불어 문학권과 계양권으로 각각 독립되어 발전해 왔다. 문학권은 문학산을 중심으로 문학동, 선학동, 관교동 등을 끼고 발달했고, 계양권은 계양산을 중심으로 계산동지역에 발달되었다. 그러다 일제의 침략으로 제물포항이 열리면서 웅봉산을 중심으로 개항장이 생겨 상권이 형성되며 동인천 지역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 중 문학산을 중심으로 한 문학 문화권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인천의 진산으로 알려진 문학산은 남산 또는 학산, 속칭 배꼽산이라고 불리는데, 인천의 진산답게 각종 유물, 유적이 문학산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다. 이미 기원 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문학 지석묘와 학익 지석묘가 이곳에서 발굴되었다. 그리고 문학산 정상에는 비류왕릉과 비류정, 봉화대가 있었다는 문학산성, 임진왜란 때 김민선 부사가 왜적을 맞아 싸우다 과로로 순직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는 안관당터 등 많은 전설들이 산재해 있다. 또 옛 도읍지임을 알 수 있는 인천 도호부청사 일부와 향교가 아직까지 남아 있어 구읍으로서의 위용을 근근히 말해주는 듯 하다. 

  

학익, 문학, 지석묘

  

지석묘는 청동기 시대 족장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는데, 인천에 지석묘가 산재해 있다는 것은 선사시대부터 이미 이 지역에 부족세력이 형성되었음을 알려 준다. 이렇게 볼 때 인천의 역사는 우리 인천인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백제에서 거슬러 올라가도 한참을 가야 될 것이다.

  

채집경제 생활을 하던 시절 사람들은 물가 특히 해안가를 따라 생활하고 있었다. 바다는 훌륭한 어장이었던 것이다.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주안역은 염전지대였으며 학익동에 있는 한불화학, 동양화학 자리는 모두 펄이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문학산 일대는 우리 선인들의 생활터전으로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문학산 등성이로 아침 해가 솟기 시작하면 그들은 연경산을 넘어 바닷가로 나갔다.

  

그리고 전날 수로에 쳐놓은 나무발에 걸린 고기들을 거두었다. 펄에서는 조개도 캐고 낚시도 했을 것이다. 많은 수확이 있던 날에는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잔치도 했을 것이다. 이런 생활을 하며 살다가 우두머리가 죽으면 그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커다란 돌로 무덤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지석묘인 것이다.

  

학익 지석묘는 지금 인천구치소 자리에서 일제 때 발굴되었다. 인천부사에 의하면 발굴당시에 5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소년형무소를 지으면서 4기는 없애버리고 1971년 교도소 확장공사시 1기는 자유공원으로 옮겼다가 현재 송도에 있는 인천 시립박물관 앞에 다시 옮겨 놓았다. 이 중 발굴된 지석묘는 3기로 모두 북방형이었으며 내부에서 토기의 파편과 돌화살촉, 파편, 돌칼, 숫돌 등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은 현재 국립 중앙박물관 창고 속에 보관되어 있다. 인천 시립박물관에서 전시될 날을 기다려 본다.

  

문학 지셕묘는 학익동 신동아 아파트에서 문학으로 넘어가는 도천현 남쪽 밭 가운데 있었는데 개석만 발견되었다. 개석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원위치에서 이동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인지 유물은 발굴되지 않았다. 그러나 문학산주변에서 돌도끼 4개, 돌칼, 돌화살촉 등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일정한 세력을 이룬 무리가 살았을 것이라 추정된다. 현재 수봉공원의 반공회관 앞 능선에 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선조들의 무덤인 이 지석묘가 제자리에서 이동되어 다른 곳에 놓여 잇다는 것이다. 무덤을 옮겨 놓고 감상한다는 것이 왠지 꺼림칙하다. 다른 곳에는 모형을 만들어 놓고 원형은 제자리에 놓아 두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후손들이 어느 곳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던가를 상상할 수 있으며, 주변과 어우러진 유적 유물을 통해 과거로의 여행을 보다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연륜의 이끼가 켜켜이 내려앉은 역사물을 바라보면서 선인들과 묵언의 대화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를 살아 있게 하는 한 방법인 것이다.

  

  

조화 자연과 인간의 만남

  

  

문학경기장 역을 나와 들머리 구간으로 가고 있지요

  

  

산행지도 산초스님 제공 

  

 산행일시 : 2005년 5월 10일 (화요일)

 산 행 지  : 문학산~연경산~노적산~청량산

 산행코스 : 문학경기장역-문학산-연경산-노적산- 쉼터 점심식사- 청량산- 흥륜사-송도-동

                      막역

 산행인원 : 7명(조대흠님, 운해님 ,산초스님 ,메이저님 ,미나리님 ,수잔나님 , 나 )

 산행시간 : 4시간40분

  

  

  

문학경기장 역 주변에 핀 황매와 연산홍

  

 산행기

  

근 한달여 기간 동안 내가 운영하는 독서실을 이용하는 학생 고객들이 중간고사 기간중이라 모처럼 산행을 나서도 다람쥐 체바퀴 돌듯 하며 서울 근교 산을 배회하는것이 고작이어서 갈등이 있었는데 마침 우리 독서실에서 착실히 공부를 하여 대학 진학을 한 학생이 군 전역후 다니던 학교를 휴학을 하고

  

전문분야 공부를 하기위하여 다시 독서실을 이용 하기 왔기에 중학교때 부터 너무도 내가 잘 아는 학생이고 친숙하여 공부를 하면서 나의 업무를 틈틈히 봐주는 아르바이트를 시키기로 결정을 하니 모처럼 알바생을 믿을만한 학생으로 선임을 하고 보니 한결 마음이 가볍고 홀가분하다

  

그동안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산하사랑 화요산행길에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업무관계로 계속 불참을 하였었는데 이번주 화요산행을 문학산에서 청량산까지 산행을 한다고 산초스 아우에게 연락을 받고 보니 일단은 무조건 OK로 문학산을 가기로 결정을 한다

  

화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늘 아침이면 8km씩 속보 걷기운동을 하는 습관으로 운동화끈을 묶고 현관문을 나서니 앗뿔사 오늘은 화요산행이 있는날인데 무슨놈의 아침운동을 한단 말이야 자전거 페달을 공원으로 향할것을 돌려 부평 깡 시장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단골 아줌마에게 가서 주섬주섬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끈따끈한 족발을 사고 김밥 2줄을 사고 꽁꽁 얼려놓은 음료수와 물을 배낭에 챙겨넣고 발에 불이나도록 인천 지하철 부평역으로 달려 가니 이미 몇분의 반가운 산님들을 만나 이곳에서 문학경기장까지 인천 지하철을 타고 가 하차를 하니

  

이미 문학 경기장 역에는 시흥에서 늘 열성적으로 화요산행에 참석을 하시는 조대흠님과 수잔나님이 오셔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계신다 반갑게 가벼운 인사를 나눈후 우리들은 곧바로 산행을 시작한다

  

지난 2002년 월드컵이 내가 살고 있는 인천 하고도 이곳 문학 경기장에서 열리며 전 세계적으로 그 함성이 울려퍼진 자랑스런 곳인데도  그 소중한 기회를 놓치고 월드컵 구장도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근처에 오는 영광을 얻게되니 내가 생각을 하여 보아도 정말 너무 촌놈 치고도 상 촌놈에 속하는 무지렁이 인생이 아닌가 나를 돌아보게 한다

  

  

들머리 구간을 오르는 일행들의 모습

  

  

이날 산행은 정말 날씨좋고 시계도 좋고 게다가 산행로에는 희뿌옇게 송화가루가 휘날리고 있고 싱그러운 솔향과 실록이 우거져 마치 우리들이  마치 예쁜 한폭의 수채화 속으로 우리들이 빨려 들어가고 있는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할 정도로 환상적이다

  

  

연녹색 자연속으로 ...

  

  

세상이 온통 싱그러움으로 가득하지요   

늘 부평에 있는 삭막하기 이를때 없는 계양산을 오르내리다

이렇게 녹음속으로 스며들게 되니 감탄 감탄 감탄 뿐입니다

  

  

잣나무 숲에서 오전 10시도 안된 시간에 우리들은 삼림에서 풍겨 나오는 자연의 영양분을 만끽을 하지요 어디 그뿐입니까 미나리님께서 챙겨오신 구기자주에 메이저님의 가오리 안주는 정말 찰떡 궁합이되어 우리들 모두의 목을 즐겁게 해주었지요

  

  

이날 산행은 정상을 오르는 쾌감이 없어도 그리고 산이 얼마나 높을까 하는 고도의 희열이 없어도 그리고 산행의 진수를 느끼게 하는  암벽구간을 오르 내리는 스릴이 없어도 그리고 산행하면 늘 명산을  고집하던 그것이 아니어도 얼마나 가슴이 꽉차고도 흘러 넘치는듯한  즐거운 느낌이 함께 하는지 아마 이런맛에 산으로 오는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게 할정도로 아주 낭만과 운치가 곁들인 산행길이더라구요

  

  

흔히 아무산에서나 볼 수 있는 수목이지만 이곳 문학산의 공기는 인천 앞바다에서 불어오는 싱그러운 바람때문일까 시원한 선들바람을 가로 지르며 마음이 함께 하는 산 칭구들과 하고 있으니 세상에 이렇게 좋을 수 가?

  

  

문학산 산행길에 돌아본 월드컵 문학 경기장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저 멀리 바라보이는 정상에 레이다 기지가 있기 때문에 정상을 우회하여 산행을 하지요

  

  

너무도 선명한 시계속에 자연 친화적인 아파트 모습도 장관입니다

  

  

잉! 웬 청춘남녀? ㅋㅋ 우리 산하의 영원한 이정표 조대흠님과 워킹 산행엔 처져도

바위만 만나면 신바람이 나 꼭 오르고나야 직성이 풀리는 여자 수잔나님 / 아니 수전노인가 ?

  

  

이날 산행에 함께한 산님들 나만 빼고지요

  

  

   

  

또 녹음 속으로...

  

  

  

  

사모지 고개

 

학산서원터에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문학산과 연경산 사이의 고개 마루에 다다르는데 이곳이 여러 가지 전설이 얽혀 있는 사모지 고개이다. 지금은 청학동으로 가는 도로를 내느라 문학산과 연경산의 비탈흙을 깍아 메워 둥글번번한 마루턱이 되었으나 옛날에는 좁고 잘룩한 고개였다고 전한다.


이 고개에 대한 전설 중 삼호현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중국으로 가던 사신들은 육로나 해로를 택했는데 해로를 택할 경우 서울에서 부평의 이별고개를 거쳐 이 고개를 넘어 한나루(지금은 매립하여 논으로 쓰고 있는데 송도역 앞 옥련동에 위치)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 그런데 그때 사신을 배웅하러 따라 나왔던 가족들은 별리현에서 가슴 아픈 이별을 했다고 한다. 중국까지는 멀기도 했지만, 풍랑을 만나 어떤 불행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에서였다.

  

한편 사신들도 이 삼호현에 이르면 멀리 보이는 별리현에 그때까지 서있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오랫동안의 이별을 마지막으로 안타까워 했다. 그래서 사신 일행은 "모두들 잘 있거라." " 그동안 잘 있거라" "다녀올게, 잘 있거라."하며 이별의 아픈 소리를 했다고 한다. 별리현에 서있는 가족들을 향해 세 번 큰소리로 외치면서 넘은 이 고개, 이러한 까닭에 사람들은 이 고개를 세 번 부르는 고개라 하여 삼호현이라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삼호연 고개를 지나 우리들은 다시 연경산속으로 가지요...

  

연경산 정자

  

사모지 고개 꼭대기에서 연경산으로 10여분 정도 오르면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 지금 산 정상에는 정자가 있는데 3,4년 전에 지은 것이다. 이곳에 오르면 인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백제의 요서경락설을 뒷받침하는 능허대가 보이고 월미도, 자유공원, 수봉공원, 계양산, 철마산, 소래산 등 인천 시가지를 자세히 살필 수 있다. 날씨가 좋은 날은 서울의 북한산까지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바라보는 낙조의 모습은 장관이라 한번 바라보기를 권하고 싶다. 또 해뜰 무렵, 문학산을 배경으로 안개가 깔릴 때면 마치 깊은 산중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아늑하고 포실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인천 팔경 중에 문학산의 맑은 아지

랑이를 꼽고 있는데 이 모습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한가지 아쉬운 점은 우리 인천 시민이 자연의 소중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인천 역사의 산 증인인 문학산과 연경산이 차례로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서해안 고속도로의 건설로 인해 연경산은 이미 학익동 쪽으로 7부 능선까지 깍여 나갔으며 인천의 옛 도읍지며 진산인 문학산은 지금 한창 산자락을 깎는 중이다. 학익동 멀리서 보면 마치 커다란 학이 날개를 펴고 포근히 자리잡은 형상인데 이제는 날개죽지를 다 뽑아내고 기부스한 모습으로 숨을 할딱이고 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산자락 밑으로 낼 수는 없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또 서해안은 한창 매립공사 중인데 그 매립지를 따라 고속도로를 내는 것이 경비나 경치 면에서 훨씬 효울적인 공사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땅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은 과연 나만의 것인지 묻고 싶다. 우리는 이 땅을 잠시 빌려 사는것이 아닌가? 우리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주어야 할 이 땅을 우리가 소중히 지키지 않는다면 누가 보존할 것인가? 또 우리 후손들은 선조들의 이러한 모습에 과연 박수를 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렇지 않아도 전국 제일의 공해도시 인천이라는 소리를 듣는데 그나마 얼마되지 않는 녹지를, 산소의 저장고인 산을 마구잡이로 헐어서야 체면은 둘째로 치고 사람사는 꼴이 말이 아니다. 신선한 공기 쾌적한 환경은 우리의 노력에서 얻어지는 것이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나무를 심어 녹지를 늘려 나가도 시원찮은 판에 있는 것조차 보존 못하는 시민 정신의 실종이 아쉽다.

  

  뿌리없는 도시 인천, 고향 상실의 무력감에 빠져 있는 인천인은 이제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 할 것이다. 이 땅이 바로 내가 누릴 땅이요, 이 땅이 바로 우리의 피붙이들이 살아가야 할 땅이라는 자각이 싹 터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문화 유적지를 보존하고 자연을 더욱 가꾸어 우리의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물려 주어야 할 것이다  

  

  

연경정 (팔각정) 아니 근디 하필이면 팔각정 앞에 흉물스럽게 이 철 구조물은 뭽니까? 밑에는 삼가점이 설치되어 있던데 삼각점은 당연히 있어야 하지만 이 흉물스런 철근 구조물은 무슨 목적으로 이용되고 있는지 사정은 모르겠으나 영 연경정 팔각정 건물의 운치를 잡치게 하고 있네요 인천 시장님 이곳의 시설물에 대하여 과연 꼭 필요한것인지 아니면 다른곳으로 옮기어도 되는것인지 잘 따저 보시어 웬만 하시면 치워 주시는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연경정 그 정자에 고대흠님과 운해 아우가

  

  

연경정 천정에 그려진 단청그림

  

  

뻥 뚫린 시야에 인천 앞바다 건너에 국망봉과 호령곡산이 있는 무의도가 보이네요

  

  

연경정을 돌아본후 우리들은 다시 노적산으로 가지요

  

  

소풍을 가는것이냐구요 / 네 맞아요 소풍이면 어떻고 등산이면 어때요

  

  

놀면 뭬합니까 그냥 무작정 걷고 있지요

  

  

멀리 청량산이 보이네요

  

    

  

  

노적산 정상의 삼각점

  

  

노적산 정상에서 바라본 아파트군 / 송도지역인가?

  

  

송도 매립지 이곳이 앞으로 우리나라의 가장 미래도시로 발전이 된다는데...

  

  

송도타운

  

  

녹음속에 바라보이는 성냥각속에 우리들이 살고 있지요

  

  

    

  

싱그러움의 절정

  

  

밥먹으러 가고 있지요

  

  

가도 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호젓한 산행길

  

  

산골짝에 다람쥐 아기 다람쥐 도토리 점심 가지고 어디를 가느냐?

  

  

고대흠님의 준비물 시바쓰리가 우리들을 현혹하지요 특히 누구 눈이 제일 빤짝였는지 난 알고 있지만 말은 못헙니다 모두다 그놈의 의리 때문이지요 / 아마 장세동이도 이런 환경에서 말 안하고는 못배겼을텐데 난 끝까지 안하지요

  

산초스표 족발에 깡시장 아줌씨 손맛이 있는 또 족발에 각자 가지고온 진수와 성찬이들의 향현이 40여분간 거하게 벌어지지요 그러다 보니 이제는 실실 또 우리들 갈길을 가야 하네요

  

  

여름은 남성의 계절

  

  

그리고 아름다운 여성 산님들이 산속으로 가고 있지요

  

  

조화 / 자연과 사람과 집구석 / 그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청량산으로 가기 위하여 횡단 보도를 건너지요

  

인천 연수구 청량산


청량산이미지청량산은 송도유원지를 감싸고 있는 산으로 일명 청룡산,청능산,척량산 등으로 불리워 지기도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이 산의 경관이 수려하여 이름을 청량산이라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청량산이란 이름이 올바른 이름이라 하겠다. 산이름을 청량산이라 지은 사람은 고려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화상이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이외에 재미있게 전해지는 유래로는 중국 산서성에 있는 유명한 산으로 그 본명은 오대산이라고 하는데 그 안에 청량사가 있고 이 사찰에는 화엄종의 육대조사이신 징관조사께서 머물렀으며, 유명한 스님들을 무수히 배출시켰다고 한다.


어느날 정관조사께서 열반에 드시면서 내 법을 동쪽 해뜨는 작은 나라에서 꽃피운다고 갈파했다고 한다.
이때 법통을 잇고자 하는 두 수제자가 백마를 타고 징관조사가 지적한 해뜨는 동쪽 작은 나라로 향하여 달리고 또 달려서 마침내 중국 대륙을 바라보고 서 있는 산인 지금의 송도 청량산 중턱에 당도하자마자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정지해 버리고 말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래서 홍륜사(옛날에는 인명사) 절터에 누군가가 두 마리의 백마를 상징하는 마상을 세웠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설에는 청량산이라는 이름이 중국의 산시성에 있던 오대산(청량산)에서 전래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위치〕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 청학동 동춘동 일원
〔면적〕 657,000㎡
〔높이〕 172m
〔기후특징〕 해면에 위치하여 대륙성 기후와 해양성 기후의 영향으로 기상변동을 심하게 받고 있으며, 산 전체가 안개로 뒤덮이는 때를 종종 볼 수 있음.
〔산의 형태〕 급경사와 암석으로 수직정상을 이루고 있음.
  주변이 해안에 접한 낮은 지대이기 때문에 고도감을 느끼게 함.

  

흥륜사

흥륜사사진
흥륜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613년 전(서기 1376년) 고려 우왕 2년 공민왕의 왕사로 계시던 나옹화상께서 개창하셨다. 처음 이곳의 경관이 하도 수려하여 절 이름을 청량사라 하였고 그에 따라 산의 이름도 청량산이라 이르게 되어 오늘날까지 이 산을 청량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후 청량산은 210여년 동안 전하여 왔으나 1592년 임진란의 변화로 소실된 후 340여년 동안 빈터만 남아있다가 서기 1938년에 절을 다시 세우게 되었다. 그 후 1966년에 노후 쇠퇴한 옛 건물들을 헐고 새로이 건물 8동을 세웠으며 1977년 6월에는 절 이름을 바꾸어 지금의 흥륜사로 개칭하여 사용하고 있다.


호불사

호불사사진
호불사의 원명은 청룡사로 처음 이 절을 지은이는 지금 주안시민회관 앞에서 금수당 한의원을 경영하고 있는 김현규씨다. 1958년 당시 경의대 한의학과 3학년에 재학하던 대학생으로 옥련동 산 65번지 소재에 건축허가를 내어 몸소 현장감독을 하면서 준공에 이르기까지 이 절을 짓는데 주역노릇을 했다. 이 절을 지은 목적은 당시 김원장이 위장병으로 고생하고 있어 그의 부모의 희망에 따라 이곳에 절을 짓고 조용하고 공기가 맑은 곳에서 은거하면서 건강을 회복시켜 주려는 뜻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절을 완공 후 김원장은 이 절에 살면서 인근의 약수를 장복한 결과 건강이 회복되었다고 한다.

  

병풍바위

병풍바위사진
호불사에서 우측으로 오르면 평평한 지점에 바위 모양이 마치 병풍형상을 한 깎아 세운 듯이 벼랑을 이룬 바위가 있고 그 곳에 약수가 솟구친다. 이와 같이 병풍형상을 한 바위가 있다 하여 병풍바위라 일컬어진다.
이곳에는 이른 새벽부터 밤이 깊을 때까지 약수를 뜨기 위하여 남녀노소 많은 시민들이 모여들고 있다.


범바위

범바위사진
청량산 중간지점에 위치하여 호불사를 통하여 가다 남쪽에서 능선을 넘어서면 당도하게 되는 곳이 바로 범바위이다. 바위의 모양이 범의 형상으로 되어 있으며 옛날에는 울창한 숲과 많은 무당들이 드나들며 굿을 하던 곳으로 전해진다. 이곳에서는 바위틈에서 쉬지 않고 솟아 오르는 약수 때문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오가고 있다.

 

뱀사골

뱀사골사진
흥륜사 뒤로 능선을 타고 넘어서면 동편에 작은 계곡이 있다. 이 골짜기를 따라 산책로가 나 있으며, 100여 미터쯤 내려가게 되면 많은 수목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이곳은 5개소의 약수터가 있으며, 이 약수터에서는 많은 생수가 솟아 오른다. 이 생수를 마시기 위하여 찾아오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이 골짜기는 옛날에 뱀이 많아서 인근 주민들 사이에 뱀사골이라 불러졌으며 한때 뱀이 무서워서 접근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오늘날엔 뱀이 모두 자취를 감추어 이 산책로야말로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요, 깨끗하고 소박한 오솔길이다.



포망골

포망골사진
이곳은 일제 시대때 일본군이 연못을 만들어 이를 표적삼아 포사격 훈련을 하던 곳이며 현재도 약수터 위에 있는 바위덩이가 그 당시 포탄을 맞아 일부가 파손된 흔적이 남아 있다. 그 후 이 연못의 물은 산 아래 지역에 있던 삼화농장의 식수 및 농업용수로 사용되던 중 1988년 위 농장이 아파트 부지로 확장되어 1990년 송도산악회 여러 회원들의 뜻을 모아 약수터로 확장 개발되어 많은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다
.

  

  

  

  

그리고 이날은 병풍길 방향으로 다시 들머리를 들어서고 있지요

  

  

청량산 정상이 올려다 보이네요

  

  

흔적 / 굳쎄게 살다 가노라

  

  

    

  

걸어다니는 이정표 / 조대흠님과 그리고 나

  

    

  

  

두분의 그림이 좋습니다 / 영화 촬영해요?

  

  

처음으로 만나는 너덜도 지나고...

  

  

동춘동 지역

  

    

  

  

청량산 정상에 송신 안테나

  

  

산 이름 만큼이나 정말 청량한 느낌을 하는 아름다운 산이지요

  

    

  

  

송도 타운

  

  

하산로

 

  

우리들은 흥륜사속으로...스며 들지요

  

  

웬 금불상 ? 번쩍 번쩍 / 진짜 금이라면 ?

  

  

부처님 오신날 을 준비하는 연등이 아름답습니다

  

  

  

  

  

또 금 좌불이 보이네요

  

  

범종각과 연등과 연산호 다산홍의 조화가 아름답습니다

  

  

조경의 아름다움

  

  

연꽃속으로... 극락속으로...

  

  

얼마나 드셨을까 / 다이어트라도 좀 허시지 ㅋㅋㅋ

어이 스님 무시기 산에 계시는 스님이 이렇게 쪘어요

  

  

여기도 저기도 흥륜사 중님들은 비만인가?

  

  

이제 곧 얼마 있으면 사월 초 파일 부처님 오신날이 오고 있지요

  

  

불교를 믿지는 않아도 경내를 돌아보니 숙연한 마음과 함게

석탄일에 대한 이해를 돕는 산행길이 되어

  

  

한결 마음이 푹은함을 느끼며

  

  

이날 산하사랑 화요 산행길을 마감을 하고

 버스를 타고 전절을 타고 달려 왔지요 집으로...

  

  

정수년,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들'


  

청파 윤도균의 사람사는이야기를 돌아 보세요

http://cafe.daum.net/salam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