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금산(錦山) 산행기/
(2005년 5월 4일/복곡 주차장-망루-단군성전-보리암/내 어머니의 유랑의 아들과)

*. 찜질 방 여행
그제는 고성(固성) 바닷가 찜질 방 해수탕 신세를 지고 다음날 고성의 진산(鎭山)이라는 거류산(巨流山)에 올랐다. 어제는 삼천포 터미널 근처 찜질 방에서 잠을 자고 이른 아침 남해 금산(錦山)을 향하고 있다.
잘 자고, 잘 먹고, 잘 구경하며 다니는 것이 여행의 멋이라지만 나처럼 혼자서 마음 내키면 아무데고 훌쩍 떠나는 일수거사(一水去士, 한 물 간 선비)에게는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여행과 돈은 밥과 반찬처럼 가장 소중한 관계다. 경험에 의하면 국내 여행은 하루에 5만원, 해외여행은 하루에 20~30만원이 들었다. 물론 절약하는 여행을 말한다.
그런데 찜질 방을 이용하면 모텔에 들어 하룻밤 자는 비용만으로 숙식이 해결되고도 남았다.
그러나 애로도 많았다. 잠자리가 불편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후덕 지근한 방 온도가 피곤한 몸을 잠들게 하지 않았다. 게다가 손님 중에는 술이 거나해가지고 친구끼리 밤새도록 떠들며 잡담하기 위해 온 사람도 있어서, 약방에 들러 귀마개와 눈가리개를 사가지고 올껄- 하고 후회까지 하게 하였다. 참다 ,참다 못해서 한 마디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벽 3시가 가깝습니다. 잠 좀 잡시다.”
객지에서 취객을 상대로 하여 더구나 1대 다수의 이런 경우에는 믿을 수 있는 것은 백발밖에 없었다. 만약 ‘그들이 당신이 뭐요?’ 하고 역습을 가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을 것이다.
“저요, 나는 아무 것도 아닌데요.”
엊저녁 벽송(碧松) 시인과 함께 삼천포 어시장에 들러 펄펄 뛰는 숭어를 3천원에, 키조개, 2천원 개불 1만원 등을 주고 떠다가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남해로 이어진 환상적인 연육교를 바라보면서 회에 소주를 더하다가 찾아 들어간 찜질방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엔 나와 같이 잠 못 들어 하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림 소대를 찾아 전국을 찾아다닌다는 청년 화가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고약한 말버릇이 있어 무엄하게도 말끝마다 ‘제 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하거나 ‘제 말을 알아들으시겠습니까?’다.
그런 말투가 얼마나 실례가 되는가를 귀띔해 주어도 마찬가지여서 끝내는 버럭 성을 내며 2층으로 올라갔더니 갑자기 ‘어마나-’하는 여인들의 비명 소리가 난다. 아차, 홧김에 나는 빨가벗은 맨몸으로 남녀가 함께 쓰는 큰방에 들어선 것이다. 결코 남에게 자랑할 수 없는 조그마한 거시기를 내놓고.

아침 일찍 길을 떠나는 이가 나그네인데 찜질 방 아침 식사는 9시 정도나 가능했고 지방이라서 아침 일찍 식사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어제는 구멍가게에서 즉석 나면으로, 오늘은 구멍 가게에 들러 우유에 빵으로 아침을 해결하였다.
남해 금산에 가서 점심은 우유에다가 가지고 다니는 비상식 볶은 콩가루로 때울 작정이다.

*. 충(忠)과 효(孝)의 고장 남해
남해를 삼자(三子)의 섬이라고 한다. 따뜻한 남쪽 나라 섬이라서 유자, 비자, 치자로 이름 난 곳이란 말이다. 유자 껍질은 향신료(香辛料)로, 비자의 열매는 기름을 짜서 식용이나 등유, 도료로. 목재는 건축. 조선. 바둑판 등에 쓰인다. 치자는 이뇨제(利尿劑) 또는 적황색의 염료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남해(南海)는 충(忠)과 효(孝)의 섬으로 더 유명하다.
남해를 충(忠)의 섬이라고 하는 것은 이순신 장군으로 인연 된다.
남해대교가 있는 노량해협은 이순신 장군이 최후의 전적지로 왜적 400여척을 격파하여 대첩을 이룩한 곳이다. 이 해전에서 적의 유탄에 맞아 순국하신 곳이 남해 관음포다. 관음포란 고현면 해안가에 있는 약 800m 길이의 반도형 야산으로 그 앞바다에서 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을 추격하다가 적의 유탄에 순국하신 곳이다. 그래서 이 고장 사람들은 이 순신 李(이), 떨어질 落(락) 이락포(李落浦)라 이름하며 장군의 죽음을 추모하고 있는 곳이다.
출처: 남해군 홈피
남해 대교를 막 넘어 좌측에 충렬사(忠烈사)는 장군의 영구를 향리 아산(牙山)으로 모시기 위해서 노량해협을 건너기 위해 3년 간 머물었던 자리에 세운 사당이으로 이곳에는 이 장군의 가분묘가 있다.
남해를 효(孝)의 도시라고도 하는 것은 서포 김만중에서 유래 된다. 유복자로 태어나서 평생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던 서포가 옛날 이야기를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서 한글로 쓴 고대소설 구운몽(九雲夢)은 당시 유배지였던 남해에서 지었다.
서포 선생은 상주해수욕장 서쪽에 있는 작은 섬 노도(櫓島)에서 3년 동안 귀양살이 하다가 거기서 병사하였다. 그 노도(櫓島)는 서포김만중선생유허지라 해서 남해 7경으로 꼽고 있다.




*. 걸어 넘는 창선 , 삼천포 대교

좌측 그림 출처: 남해군 홈피
제천의 문학회 모임에서 만난 친구 벽송(碧松) 시인 따라 그의 고향인 경상도의 남쪽 끝 고성을 둘러보고 그냥 서울로 돌아가기가 너무나 아쉬워서 어제는 삼천포로 빠졌던 것이다.
작년 매물도에 다녀올 때, 그리고 어제 회를 먹으면서 바라보던 삼천포와 남해를 잇는 붉은 아치를 긋고 있는 창선 , 삼천포 대교가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그 다리를 걸어서 남해에 가기로 했다.
2003년 4월 28일 충무공의 탄신일에 맞추어 1,830여 억 원의 공사비를 투자하여 개통되었다는 다리다. 남해 창선도와 삼천포를 연결하는 다리로 남해가 자랑하는 남해 12경 중 12경에 해당하는 다리다.
이 다리는 그냥 단순하게 육지와 섬을 연결한 다리가 아니다. 초량섬, 모개섬, 늑도 등 4개의 섬과 섬을 5개의 삼천포대교, 초양교, 늑도교, 창선교, 단항교로 연결한 총연장 3.4km의 다리가 바로 창선 , 삼천포 대교다.
그 다리 모양도 PC빔교, 하로식아치교, PC BOX교, 종로식 아치교 등 각기 다른 공법을 이용하여 다리의 박물관이라 할 정도의 관광명소를 이룩하여 놓았다.
관광버스도 이 아름다운 경치를 그냥 넘기 아쉬웠던지 관광객을 풀어 일정 구간을 걷게 하는데 이 남쪽 나라 섬들에는 유채꽃이 만발하여 있었다.

TV에서 보던 죽방렴도 있었다. 물살이 빠르고 수심이 얕은 곳에다가 조류가 흘러오는 방향을 향해 V자 모양의 날개나 부챗살 모양으로 길이 10m 정도의 참나무 말목을 갯벌에 박아 놓고 밀물에 들어온 고기가 빠져나가지 못할 만큼 촘촘히 주렴처럼 엮어 놓는다. 그러면 앞으로만 향하는 고기의 습성을 이용하여 밀물에 걸려든 고기를 썰물에 필요한 만큼 건져 내는 원시어업이 죽방렴이다.
이것이 남해 12경중 4번째라는 창선교와 원시어업죽방렴이다. 시원한 바닷바람에 짓푸른 바다 위에 서니 시흥이 절로 난다.

다리에 들어서면 죽방렴의 고기처럼
그림 속에, 시 속에 바장이는 갈매기처럼
훨훨훨
한려수도(閑麗水道)에 갇혀
푸른 노래가 된다.


*. 금산(錦山) 가는 길
다리를 넘어서면 금산 가는 버스가 있다는 산천포 시내버스 기사의 말을 굳게 믿고 운치 있게 창선 , 삼천포 대교를 건넜지만 금산 가는 대중교통 차편이 없었다.
다리가 끝나는 단항에서 버스가 있다지만 수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몇 시간마다 있다하여 난감하였다. 어쩐다지? 돈도 달랑 달랑하는 지금의 나에게는 주유소에 해당하는 365일 현금지급기와 차편이 있다는 수산까지 가는 게 우선이다. 그러나 거기까지 7.4km를 걷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였다.
씽씽 달려가는 차에 구원의 손길을 보내고도 싶었지만 그러기엔 자존심이 허하지 않아서 무턱대고 걸었다. 도중 버스가 오겠지-. 아니면 마음씨 고운 운전사를 만나는 행운도 있겠지- 하면서.

그러다가 미터 요금만 주고 가기로 약속한 택시로 도착한 곳이 복곡저수지 지나서 있는 복곡 주차장이었다.

30년 전이던가 상주해수욕장 근처 상주리매표소에서 오르면서 본 용왕대, 도선바위와 쌍용문을 오르면서 전개되는 바위의 전시장 같은 금산의 아기자기한 기암괴석에 놀랐는데, 그래서 이렇게 무리해서 다시 찾아온 것인데, 싱겁게도 1,000원 하는 셔 틀버스를 타고 금산 8부 능선까지 10분에 올라오고 말았다.
연등이 길게 보리암으로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보니 석가 탄신일이 가까웠나 보다.

*. 금산(錦山)의 봉수대에서

금산은 제주도, 거제도, 진도에 이어서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인 남해에 있는 명산이다. 금산(錦山)은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유일의 산악공원으로 높이는 681m로 남해에서는 화방사가 있는 786m의 망운산(望雲山)보다는 낮지만 누구나 와보고 싶어하는 삼남 제1의 명산이다. 섬이면서도 전설 어린 38경의 기암괴석이 금강산을 빼어 닮았다 하여 소금강 또는 남해의 금강으로 불리는 산이다.
보리암은 뒤에 가기로 하고 정상 230m라는 이정표 따라 오른다.
키가 넘는 산죽 길을 지나니 기암괴석이 연이어 앞을 막는 오솔길이다.

정상이 가까와 질수록 바위가 더 많아지고 그 바위 위에 암각한 글씨가 더 자주 보이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정상이 나타나는데 정상에는 돌로 쌓은 탑 같은 사각형의 봉수대가 있다.

봉화(烽火)란 왜구의 노략질이 극심하던 고려, 이조시절, 평시에는 밤에는 불꽃을, 낮에는 연기를 1번만 올리다가 적이 바다에 나타나면 2번, 해안에 접근해 오면 3번, 접전이 시작되면 4번, 육지에 상륙하면 다섯 번을 올렸다.
그러면 창선도 대방산(470m)으로 해서 사천과 진주 등을 거쳐 서울 남산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서울의 남산은 봉화(烽火)가 도착하는 마지막 산이라 해서 종남산(終南山)이라고 한다.

망대와 마주하고 있는 정상 오르는 길목에 문어 같은 커다란 바위가 있고 그 바위 옆에 커다란 6자의 글이 있다. 명필바위라고도 부르는 문장암이었다.
'由虹門 上錦山'(유홍문 금산)은 직역하면 '쌍홍문(雙虹門)을 통하여 금산(錦山)에 올랐다'는 단순한 글이지만 거기에는 금산을 찾아온 기쁨과 우리 산하에 어린 사랑이 포함되어 있는 말이다. 이 글은 1543년에 우리나라에 최초의 서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 소수서원) 지었다는 주세붕 선생의 글로 전하여 온다.
30년 전 남해를 처음 방문했을 때 충렬사(忠烈사) 입구에 비석 하나가 있어서 보니 자암김구적려추모유허비(自庵金絿謫旅追慕遺墟碑)였다.
자암 김구(自庵 金絿) 선생은 중종 때의 문인으로 조선 초 4대 서예가의 한 분이다. 조광조의 기묘사화와 연루되어 15년 동안 이 남해에 유배생활을 하다가 풀려나서 고향 예산에서 작고한 말년이 불우한 분이었다. 그 자암 선생이 금산(錦山) 일대의 풍경을 그분이 지은 경기체가인 화전별곡(花田別曲)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天地涯 地之頭 一點仙島 (천지 가 땅의 머리에 신선 같은 섬 하나)
左望雲 右錦山 봉내 고내 (좌로 望雲山, 우로 錦山 흐르는 *봉내 고내)
山秀奇水 鍾生豪傑 人物繁盛 (산수 빼어나니 호걸 인물 번성하다)
위 天南 勝地 ㅅ 景 긔 엇더하니잇고 ( 아, 남녘 勝地 경치가 그 어떠합니까)
風流酒色 一時人傑 風流酒色 一時人傑 (風流와 酒色 한 때 人傑 )
위 날조차 몇 부니신고. (아, 나까지 몇 분입니까)
주)*봉내 고내: 지금의 봉내천과 화천

세상 사람들이 경치를 얘기할 때 물 좋고, 산 좋고 ,정자 좋은 곳이 어디 있냐고 한다. 그 셋을 아울러 다 갖추고도 더하는 것이 있는 곳이 금산이다.
기암괴석의 각가지 물형의 바위들, 유서 깊은 보리암,

보리암에서 보이는 활처럼 달처럼 둥근 원을 긋고 있는 우측의 상주해수욕장과 좌측의 송정해수욕장. 하늘보다 짓푸른 바다에 떠 있는 점점의 섬들은 자암선생이 말한 일점의 선도(仙島)요, 선산(仙山)이요 천하 절승이다.
나는 일찍이 산을 좋아하여 젊어서부터 산을 찾아 다니다가, 이제 숫하게 보낸 세월의 눈으로 다시 찾으니 그때 보지 못하였던 갖가지를 보게 되었는데, 요즈음은 다시 또 올 기약을 못하고 오르는 나이의 등산이 되고 보니 탄식이 절로 난다. ‘아아, 안타깝게도 나는 이제 늙었구나!’
자암 선생이 젊어서 수직을 설 때 밤 깊어 낭낭히 들리는 자암의 책 읽는 소리 듣고 찾아온 중종에게 바친 시조처럼 더 많은 산을 더 오를 수 있는 건강을 갖고 싶어진다.

오리 짧은 다리 학의 다리 되도록에
검은 가마귀 해오라비 되도록애
향복무강(享福無疆)하샤 억만세를 누리소서.


*. 전설 따라 찾은 금산

금산의 정문에 해당하는 쌍홍문을 통하여 오지 않고 오늘은 복거 주차장에서 올라와 정상을 기점으로 거꾸로 이 산의 이 봉 저 봉을 기웃거리는 것이라서 거의 다 바위의 뒤통수 쪽이라서 30년 전에 쌍홍문으로 들어섰을 때 보던 금산이 아니다.
전에는 쌍홍문 들어서자 만난 동물 형상의 바위가 마치 바위 동물원에 온 것인가 착각을 일게 하였다.
바위들은 보리암 주변에 다 몰려 있어서인가 그 바위마다 각가지 불교와 관련된 전설들이 열려 있었다.

대장봉 쌍홍문거북바위농주암화엄봉 금산기암만장봉


해골의 두 눈 같기도 하고 둘 '雙(쌍)', 무지개 '虹(홍)' 쌍무지개 같기도 하다는 쌍홍문(雙虹門). 날 '日(자)' 자도 같지만 다시 보면 '月'(월) 자 같다고, 일월암(日月岩). 굴속에 들어가 바닥을 두드리면 장구 소리가 난다는 음성굴(音聲窟). 원효대사인가, 의상대사인가 이 바위에서 화엄경을 읽었다는 화엄(華嚴)의 '華'(화) 자와 비슷하다는 화엄봉(華嚴峰). 보리암 경내에 원효대사가 좌선했다는 좌선대(坐禪臺) 높이가 만 길이나 된다는 만장봉(萬丈峰). 흔들흔들 흔들바위. 어미 돼지가 새끼 돼지를 업고 있는 모습이라는 저두암(猪頭庵) 등등-.

그 중 신분을 초월할 수 없어 주인집 아가씨를 짝사랑하다가 뱀이 된 전설이 어린 상사바위가 있다.

주인 딸 사랑하다 뱀이 된 머슴 총각
처녀를 칭칭감고 풀어 주지 않아서
굿을 해
벼랑에 떨어져
죽은 곳 상사바위라네


이와 다른 이야기도 전해 오고 있다. 여수의 한 총각이 고기잡이 왔다가 남해의 한 과수댁을 짝사랑하다가 상사병에 걸려 죽을 지경이 되매 과수가 이 사랑을 받아들여 이 상사바위에서 운우지락(雲雨之樂)을 나누어 고쳤다는 이야기다.

*. 우리나라 3대 관음 기도처의 하나 보리암(菩提庵)
신라 때였다. 원효대사가 이 산에 초당을 짓고 수도하다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하였다. 원효대사는 그후에 이 산 이름과 초당 이름을 보광산(普光山), 보광사(普光寺)라 하였다.
고려 말에는 이성계가 이 보광사에 와서 100일 기도한 후 뜻이 이루어지면 이 산 전체를 비단으로 싸주겠다고 약속했다가 나라를 세운 후에 금산을 영세불망(永世不忘)의 영산(靈山)이라 하여 그 약속을 어떻게 지켜야 하나 고민하던 중 현명한 신하의 의견 따라 산 이름을 비단 錦(금), 뫼 山(산)이라 하여 금산(錦山)이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18대 왕 현종(顯宗)이 이 말을 듣고 이 절을 왕실의 원당(願堂)으로 삼고 산 이름을 금산(錦山), 절 이름을 보리암(菩提庵)이라고 바꿨다고 전해 오기도 한다.
백일 기도로 왕위에 등극까지 하게 하였다 하여 이 보리암은 강원도 낙산사, 강화도의 석문도 보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관음기도처 중에서도 으뜸이 되는 절로 친다.
보리암 보광전(普光殿)에 200m 아래 제석봉 왼쪽에 '태조 이성계 기도하신곳'이라는 표지 따라 이씨기단(李氏祈壇)을 내려 가보고 싶었지만 생략하고 말았다. 가는 길이 아니고 다시 올라와야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보리암은 천년 고찰이라지만 마음 속에 기대하여 왔던 고풍은 거의 사라져 버리고 새로운 당우만이 있어 서운하였으나, 다만 인경의 명(銘)이 있어 나그네의 시름을 달래주었다.

南海錦山無限景(남해금산무한경)
天邊雲外此鐘聲( 변운외차종성)
森羅萬象非他物(삼라만상비타물)
一念不生猶未明(일념불생유미명)

남해 금산 무한경에 하늘 가 구름 밖에
보리암 종소리에 森羅萬象 타물(他物) 아닌데
未明에
홀로 서 있어도
한 생각 나지 않네


탑대에 내려가 보니 옛날에 없던 해수관음상이 남해 상주해수욕장을 바라 미소짓고 있다.
해수관음상은 강원도 양양 낙산사에도 있다. 양양의 대화재를 용케도 모면하고 오봉산 낙산사에서 동해를 굽어 보고 있다. 해수관음상을 모시는 것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불교 신앙으로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 하던 뱃사람들이 관세음보살의 영험을 통해 뱃길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모셔온 보살이다.
그 옆에 옛날에는 모르고 지나쳤던 보리암 3층탑이 고색창연하다. 탑은 얼풋보기에는 4층탑 같은데 자세히 보면 하단은 기단부(基壇部)였다.
그 기단석 위에다 나침반을 올려 놓으면 나침반이 제방향을 잃는다는 탑이다.
가야의 김수로왕비 허태후가 인도에서 싣고온 파사석으로 원효대사가 세웠다는 전설의 탑인데 보리암과는 직접 관계있는 탑은 아닌 모양이다.

여행은 3일 내외여야 적당한데 충북 제천에서, 경남 고성으로, 삼천포로, 남해로 이어지는 애초 계획없던 여행이라서 이제 집 생각이 나고 매사가 귀찮아 진다. 돌아갈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징조다.
셔틀버스를 타러 주차장을 향하여 연등의 행렬 따라 불자들 속에 섞여 내려오고 있는데 한 여자가 절을 향해 올라가면서 상냥한 인사를 하며 가는데 그의 말이 걸작(?)이다.
"예수 믿어 천당복 받으세요."









상주해수욕장에 가는 진주에서 오신 여선생의 호의로 그 차편을 이용하여 멀리서만 보던 상주해수욕장을 함께 갔다.
뒤로는 병풍처럼 둘러싼 금산을 두고, 앞으로는 나무섬과 돌섬이 풍랑을 막아주고 있는데, 반달 같은 포물선을 그리며 2km의 은모래의 완만한 해수욕장에 백사장 뒤로 울창한 송림을 갖춘 남해 3경이라는 상주해수욕장이었다.
깊이가 0.5m~4m라는 이 물은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맑고, 넓이가 120m가 되는 산과 바다를 겸하는 곳이어서 여름에는 100만 인파가 들끓는 남해 중부를 대표하는 해수욕장이었다.
내가 가본 호주의 시드니의 본다이비취나 하와이의 해수욕장도 이 상주해수욕장보다 아름답지가 않았다.
이렇게 이 여행은 나의 마음 속에 가득한 아름다움에다가 남해 금산과 상주해수욕장의 아름다움을 더하게 되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