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도봉(三道峰) 산행기

(2003년 9월 2일/한뫼산악회 따라/충북영동>황룡사>물한계곡>삼도봉 원점회귀 산행)
*1. 난계 박연 선생의 고향 영동
*2. 물한계곡(勿閑溪谷)인가 물한(水寒)계곡인가
*3. 정상석(頂上石) 삼도봉 화합기념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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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난계 박연 선생의 고향 영동
삼도(三道)봉에 가자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지리산 반야봉 아래 삼도봉인 줄 알았더니, 충북 가장 아래에 있는 삼도봉이라서 망설이지 않고 따라 나섰다.
오늘은 모처럼만에 아내와 함께 산행을 한다.
우리 부부는 지리산과 설악산을 종주한 즐거운 추억을 가지고 있다. 젊어서 우리는 한라산, 덕유산 등 명산을 두루 편력하였다.
나는 출세를 못하여서 아내에게 남보다 호강은 못시켜 주었지만 누구보다 많은 산을 함께 다니긴 했다.
그러나 여자들이 나이 들면 누구나 그렇듯이 아내도 잔병이 있어서 그동안은 산에 오기를 망설여 오다가 건강에 좋다는 나의 꼬임에 빠져 따라 나선 것이다.
그러니까 섣불리 힘든 등산을 하거나, 나 혼자 정상을 다녀오는 식의 등산을 하면 다시는 따라나서지 않을 것이니 오늘은 특별히 조심할 것이다.
오늘만이라도 힘든 정상까지는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혹처럼 메고 다니던 카메라도 두고 왔다.
자동차 두 바퀴 중에 하나만 튼튼하면 쓰겠는가.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처럼 새 바퀴는 새 바퀴끼리, 헌 바퀴는 헌 바퀴끼리 어울려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서 다음으로 읽는다는 탈무드에서 늙은 마누라는 노후의 재산이라 하지 않았던가.

차가 국도를 벗어나 영동에 들어서니 난계박물관이란 입간판이 보인다. 이 이외에도 영동에는 난계사당, 난계예술제가 있다는데 난계란 누구신가?
난계(蘭溪)란 우리나라 국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박연(朴堧) 선생의 호다.
고구려의 왕산악(거문고), 신라의 우륵(가야금)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한 분이 바로 난계선생이시다.
옛날 고려 우왕 3년에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에서 태어나셨는데, 그분의 정원에 유달리 난초가 많았기 때문에 난초 '난'(蘭). 영동에서도 유명한 물한리 계곡에서'계'(溪)를 따서 난계(蘭溪)라 호(號) 하신 것 같다.
난계 선생은 세종의 명을 받아 악서(樂書)를 편찬하셨는가 하면 석경, 편경 같은 악기를 만드신 분이기도 하다.
중국 사람들이 숭상하는 악성 기(夔)에 버금가는 우리의 선조로서 예로부터 사랑 받아온 음악인이시다.
그렇게 생각하니 벼슬길에 물러나 낙향하시어서 81세까지 고향에 사시며, 이 물한계곡에서 대금 부시던 그 소리가 물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듯하구나.
고명하신 분의 고향을 찾는다는 것은 낯선 고장이라도 얼마나 우리들의 마음을 끌게 되는지-. 논개의 고향 장수(長水)가 그렇고, 계량의 고향 부안(扶安) 등이 그러하였다.

*2. 물한계곡(勿閑溪谷)인가, 물한계곡(水寒溪谷)인가
등산이 막 시작되는 11시경 반갑지 않은 비가 또 오고 있다. 우리들에게 부여된 시간은 4시까지의 넉넉한 시간이어서 가는 데까지 가자 하고 아내와 함께 등산길에 올랐다.
비 소식을 알고 떠났기 때문에 아내는 비옷을 입고, 나는 미 군용 판초를 입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우리들 앞에 우산도 비옷도 없이 비를 맞으며 오르고 있는 70세 초반의 노인 이 있어 선뜻 준비해간 아끼던 고어택스를 빌려주었다. 그리곤 나는 몹시 후회하게 되었다.
정상에서 내려올 때도,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5~6시간 동안에도 온몸이 젖었는데 갈아입을 옷이 없어 추위에 떨어야 했다. 게다가 안팎이 모두 젖은 옷을 되돌려주는 노인의 태도가 섭섭하게도 너무 말에 소홀하여 더욱 후회하게 되었다.
남을 도와주기를 좋아하던 나의 착한 마음을 도둑맞게 할 정도로 친절을 받을 자격이 없는 무덤덤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르는 등산길은 완만해서 어려움이 별로 없었다. 계속 비가 오고 있었지만 적당히 박석(薄石)들이 박혀 있어 질퍽거리지도 않았다. 그런 길을 나를 앞서 아내는 잘도 걸었다.
주차장에서 조금 올라오니 좌측 다리 건너가 황룡사 입구인데 그 주위 건물 모습이 산사의 모습과는 달리 최근에(1972. 10.1 창건) 지은 것이 분명하여 오르내릴 때 그냥 지나쳤다. 돌아와서 보니 후회가 난다. 언제 다시 온다고 그냥 왔던가.
대웅전 앞도 생각보다도 멋있었지만 그 앞뒤 뜰에 둘레 5, 높이 2m의 비슷한 큰 바위가 3개 있어 '장군바위'라 한다. 옛날에 한 장군이 있어 이 바위를 뛰어넘으며 무술을 연마하였다 하여 이 주위의 물한계곡을 '뛰엄박골'이라고도 한다는데 그걸 못보고 온 것이다.
그래 그런가 이 계곡이 다른 계곡과 다른 것은 커다란 바위 같은 징검다리를 몇 번이고 뛰어넘으며 삼도봉을 향하게 하는 것이다.

왜 이 계곡의 이름을 생소한 물한계곡이라고 불렀을까?
아니 勿(물), 한가 할 閑(한), 그러니까 한가하지 않은 계곡이란 말인데, 가파른 계곡이나 깊은 계곡을 흐르는 물이어서 사람이 이곳에 이르면 자연에 빠져 한가롭지 않다는 말일 께다. 아무리 한여름이라도 발을 담글 수 없도록 물(水)이 차서(寒), 물한계곡(水寒溪谷)으로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물 색깔이 원래 흰가 할 정도로 하얀 물줄기가 장엄한 소리를 내며 우렁차게 흐르고 있다.
이 물은 상류 미니미골에서는 미니미폭포를 이루다가 내려오면서 음주암폭포, 의용암폭포, 옥소폭포로 물한계곡의 절경을 이루며 길고 하얗게 흐르고 있다.

옥소폭포를 기우제폭포라고도 하는데 거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통일신라시대 가뭄이 심할 때에 황간 현감이 기우제를 지내어 가뭄을 이겨냈다. 그 후에 이 상촌지방에 가뭄이 들어 이 옥소폭포에서 면장이 농민들과 함께 기우제를 지내려고 했더니 지내기도 전에 후드득 후드득 내리기 시작한 비가 장대비로 변하더란다.
그 후로는 마을에서 큰 고목이나 큰 바위에서 지내던 기우제를 이 옥소바위에서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 옥소폭포 따라 오르다 보니 계곡을 보호하기 위함인가. 형무소처럼 높게 철조망이 드리워 있는 것이 이 멋진 옥소폭포마저 흉칙한 철조망에 가두어 놓았다. 사유지의 주인이 자기 생각대로만 담을 높이 쳐놓은 것과 다름이 없다. 담을 좀 낮추어 미적인 면을 고려할 수는 없는 것인가. 게다가 이곳 모든 폭포에는 이름 하나 써 붙여 놓지 않아서 내려와서 입구에 잊는 안내판으로 건성지나친 곳을 아까와 하게 되었다.
갈림길 3거리에 이르렀다. 좌측으로 삼도봉까지는 3.3km, 우측 석기봉까지는 1.7km이다.
우리는 삼도봉 가는 길로 들어섰다. 석기봉보다는 더 길지만 길이 편하고 경사가 완만하기 때문이다.
삼도봉 1.7km 남은 곳에 옹달샘이 있다. 이렇게 비 오는 날에도 물줄기가 늙은이 오줌 누듯이 시원하게 나오지 않으니 보통 날에는 물이 없게 생겼지만, 돌로 쌓은 옹달샘 모양만은 멋지게 잘도 꾸며놓았다.

하늘을 가리던 숲이 확 열리는 곳이 시야가 탁 트이는 안부인데 운무가 조망을 가리고 있다. 여기부터는 키가 작은 관목들의 나라다.
본격적인 오르막은 가파른 층계 길인데 168개서부터 33개 정도의 길로 최근에 만든 것 같은 통나무 길이 정상까지 7~8 개나 더 있다.
우중이라 등산객은 드물었지만 오가다 만나는 사람들은 대개가 충청북도 청주나, 전라도 정읍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3. 정상석(頂上石) 삼도봉 화합기념 탑

드디어 우리들의 목적지 1,174m의 정상. 여기가 충북, 경북, 전북의 경계선이라는 삼도봉(三道峰)이다. 드디어 아내도 옛날의 등산 실력을 되살려 정상에 선 것이다.
그런데 저건 뭔가. 정상석(頂上石)이 상식을 넘는 호화로운 모습으로 서있지 않은가. 중국의 어느 산에 올라온 것 같이 이국적 모습이었다.
우리 민족이 남북으로 분단국의 아픔을 살면서도, 또 다시 경상도로 전라도로 동서를 갈라놓고 서로 으르렁거리며 살고 있는 그 동안 우리 민족의 현실적인 아픔을 고쳐 보자고 영동, 무주, 금릉(김천)의 군수가 지역 주민들과 뜻을 모아 지역감정 없는 나라를 만들자고 세워 놓은 삼도화합기념탑이다.
세 도(道)를 향한 세 마리 거북조각 기단부 위에 역시 대리석으로 용 세 마리가 까만 오석(烏石)으로 만든 해 같기도 하고 달 같기도 한 여의주 원구(圓球)를 떠받치고 있다.
영원과 길상을 상징하는 거북이 위에 용으로 표현된 삼도(三道)가 희망의 해와 달을 떠받치며 지역간의 화합을 다짐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탑은 안병찬 화백이 도안하여 제작한 것을 육군 제 5019부대가 헬기를 지원하여 1989년 완공한 것이다.
매년 10월 10일이 되면 충북의 영동, 경북의 금천시, 전북의 무주 군수들과 그 주민들이 이 탑 앞에서 우리의 하나임을 위한 만남의 장을 이렇게 갖는다니 이 얼마나 장쾌한 일인가.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우리들의 불행했던 과거를 인정하는 탑이고 보니, 난생처음 찾아와서도 운무밖에 볼 수 없는 우리들의 마음처럼 서글프기 그지없었다.
여기서 1.2km/40분 가면 석기산, 거기서 2.2km/90분 더 가면 산 민(岷), 두루 주(周) . 산을 두루 조망할 수 있다는 민주지산(岷周之山)이지만 우중에 무리를 하여 올라온 아내와, 우중이라서 여기까지 함께 하지 못한 사람들이나, 오다가 되돌아간 사람들을 위하여 욕심을 버리고 돌아가야 한다. 산꾼이 꺼리는 원점회귀(原點回歸) 산행이라도 안전하게 되돌아오면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는 콧노래가 있다. 조영남의 노래 ‘화게장터’다.
                                          전라도 쪽 사람들은 나룻배 타고 ♬♪♩~
                                          경상도 쪽 사람들은 버스를 타고
                                          경상도 사투리에 전라도 사투리가
                                         오순도순 왁자지껄 장을 펼치네.

                                                                      구경 한 번 와 보세요. ♬♪♩~
                                                                      오시면 모두 모두 이웃사촌
                                                                      고운 정 미운 정 미운 정 주고받는
                                                                      경상도 전라도의 화개장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