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한담 57

초겨울 문턱에 들어선 서석대엔 만추의 그림자만 어른거리더라! 


 


 

 무등산 토끼등은 녹녹치 않다. 하루바삐 정상적인 산행컨디션을 되찾으려고 지난주엔 엉겁결에 수락산과 불암산을 다녀왔음에도 발걸음이 가뿐하지 않아 오르막이 수월치 않다. 거친 숨소리와 온몸이 땀범벅으로 곤혹스럽다. 이 고비만 넘기면 괜찮은데, 에라 모르겠다. 쉬엄쉬엄 오르는 것이 나을 성 싶다.
 

 가까스로 토끼등 쉼터에 올라서니 산행객들로 시끌벅적하다. 잠시 숨을 고르면서 편안한 코스인 봉황대를 거쳐 중머리재까지 다녀올까 생각하니 너무 북적거릴 것 같다. 모처럼 누려본 무등산 나들이인데, 욕기를 부려 가파르기로 이름난 동화사터로 발길을 돌리니 호젓해서 좋다.
 

 올라오면서 힘을 많이 쓴 탓인지 되돌아서고 싶은 맘이 굴뚝같다. 그러나 한번 오르기로 맘먹었는데, 포기하고 싶지 않는 오기가 치민다. 신비스런 너덜겅이 광활하게 펼쳐지는 언저리에 앉아 가쁜 숨을 고른다. 아무리 힘들어도 기어코 오르겠다는 각오를 다지면서 모질음을 다하니 동화사터에 다다른다.
 

 기품이 서린 노송(老松)군락 쉼터에서 무등산 주봉을 바라보니 그 품에 안기고 싶은 맘이 충동질한다. 고단하더라도 용기를 내서 한번 도전해보자. 한두 번 가본 곳도 아닌데, 뜨끈한 차 한 잔으로 목마름을 달래고 나니 불현듯 얼마 전에 읽었던 유영만 교수의 「용기」가 기억난다.
 

 절망과 두려움으로 삶의 벼랑 끝에 몰린 주인공이 마지막 희망의 끈을 붙잡는 심정으로 은사를 찾아간다. 선생님께서는 생(生)이라는 한자에 얽힌 얘기를 들려준다. “생(生)은 소(牛)가 외나무다리(一)를 건너는 것과 같다. 용기 있게 다리 위에 올라서서 참된 삶(生)을 향해 도전할 것인가 머뭇거리다가 그냥 주저앉고 말 것인가”라고 충고하고 인생의 외나무다리를 건널 수 있는 7가지 용기(勇氣)를 가르쳐줘 의기의 날개를 달고 험한 세상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다는 내용이다.

 

 1.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대사대성(大思大成)하라.

  (오도 가도 못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크게 생각하고 크게 이루려는 용기)

2.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즉행집완(卽行集完)하라.

  (높디높은 두려운 상황에서도 즉시 행동해서 완성하려는 용기)

 3. 누란지세(累卵之勢)에 백절불굴(百折不屈)하라.

  (계란을 쌓아올린 듯 긴장된 상황에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용기)

 4. 여리박빙(如履薄氷)에 불포가인(不抛加忍)하라.

  (살얼음판 같은 아슬아슬한 상황에서도 포기 대신 인내를 더하는 용기)

 5. 설상가상(雪上加霜)에 초지일관(初志一貫)하라.

  (어려움이 가중되는 고통스런 상황에서도 처음의 열정을 되새기는 용기)

 6. 기호지세(騎虎之勢)에 배수지진(背水之陣)하라.

  (호랑이 등에 올라탄 듯 긴박한 상황에서도 배수의 진을 치는 용기)

 7. 일촉즉발(一觸卽發)에 현존임명(現存任命)하라.

  (언제 터질지 모르는 긴장된 상황에서도 현재의 모든 것을 거는 용기)
 

 중봉으로 가는 능선길은 편해 마음도 느긋해진다. 가을의 풍취를 한껏 자아냈던 억새풀이 쇠락한 자태로 바람결에 살랑거려 애잔함이 묻어난다. 단풍으로 곱게 물었던 나뭇잎도 나뒹굴다가 발길에 짓밟혀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져간다. 늦가을의 아쉬움을 훌훌 털어내며 터벅터벅 걸어가니 중봉에 이른다.
 

 이곳에서 서석대는 지척지지(咫尺之地)로 눈앞에 다가서지만 또다시 된비알을 거쳐야 오를 수 있다. 다시 한번 용력을 발휘해서 자신과의 싸움을 걸어본다. 어느 누구도 거들어줄 상황이 아니다. 오로지 내 자신이 해결해야할 일이라 맘먹고 차분하게 올라가니 드디어 서석대에 도달한다.
 

 볕받이가 좋은 바윗돌에 걸터앉아 사방을 둘러보니 힘들여 이곳에 올라왔다는 자부심에 가슴이 뿌듯해진다. 만약 중간에 포기하고 되돌아섰더라면, 만추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 이 풍광을 즐길 수 있겠는가. 용기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원동력임을 새롭게 일깨우며 입석대를 거쳐 중머리재로 내려선다.
 

 쉽지는 않겠지만 늘그막에 용기 있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나이 듦을 핑계로 미리 겁먹고 망설이다가 쉽게 자포자기해버리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려 애쓰련다. 오늘은 평소보다 1시간가량을 더 허비할 정도로 힘든 산행이었다. 그러나 용기는 뭔가 변화를 시도하는 그 순간 큰 에너지로 작용됨을 채득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