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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산행을 석골사를 기점으로 할 경우에는 언양에서 밀양 방면으로 24번 국도를 이용하여 얼음골로 유명한 경남 밀양군 산내면 남명리의 남명초등학교를 지나서 조금 가다 보면 좌측사진에서 보기와 같이 도로 한 켠에 '석골'이라는 글씨가 새겨 진 바위가 있는 곳으로 난 도로를 따라서 들어 가면 된다.


 

석골사 바로 앞에 있는 이정표에는 운문산 4.5Km라고 알리고 있다. 이의 거리는 상운암계곡의 산행로나 딱밭재를 경유하거나 간에 비슷한 거리라고 보면 된다.
우측사진의 억산갈림길에서 억산 방향으로 가면 대비골로 해서 억산을 가거나 억산에서 딱밭재를 잇는 주능선에 다다르게 된다. 상운암계곡이나 딱밭재를 갈려면 곧장 가야 한다.

 

좌측의 사진을 촬영할 즈음에 선두에 선 산행대장에게서 무전기로 "갈림길에서 능선으로 치고 오릅니다"고 전갈이 온다.
원래의 계획은 상운암계곡으로 해서 석탑군을 지나 상운암에 들렀다가 운문산에 오를려고 했었는 데, 후미의 몇 명 중 산행 초심자가 서서히 몸을 푸는 단계라 이미 선두와는 격차가 벌어졌고 구태어 상운암계곡으로 가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동의를 했다.
우측사진의 갈림길에서 후미의 여성대원을 챙길려고 잠시 동안 기다려도 오지 않고 남자 등산객 두 분이 오길래 여자 등산인을 못 봤냐고 물으니 저 아래의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에서 지도를 꺼내 보더니 좌측의 능선으로 향하는 길로 올라 가더라고 대답해 준다.
부랴부랴 갈림길까지 내려 가서 재차 확인해 보니 능선 방향으론 이정표에 아무런 표시조차 없는 데도 버젓한 산행로를 두고서 능선으로 올랐음에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흘러 나온다. 호각을 수 차례 불어 봐도 응답이 없고 핸드폰으로 연락을 해도 연결이 되지 않는다. 갈림길에서 방향 표시도 되어 있지 않은 능선으로 오른다 해도 팔풍재에서 딱밭재를 잇는 능선 상의 이정표를 보고 운문산 방향으로 찾아 오겠거니 하는 기대를 하며 갈림길까지 돌아 와서 할 수 없이 벗어 뒀던 배낭을 메고 딱밭재를 향하여 올랐다.
우측사진의 갈림길에서 곧장 가면 상운암계곡 산행로이다. 좌측으로 올라가면 딱밭재에 다다르게 되는 데 2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딱밭재에서 기다리고 있던 선두그룹과 합류한 뒤, 모두가 기다릴 수 없으니 상운암까지 먼저 가서 휴식을 취하고 있으라고 한 다음에 잠시 휴식하며 범봉을 향한 능선을 향하여 호각을 수 차례 불어 보다가 아무래도 마중을 가야 할 것 같아서 잔류한 여성대원 1명에게 대기 시킨 뒤 범봉을 향하여 가며 연신 호각을 불어도 응답이 없다.
도중에 두 명의 남자를 만나서 여성 등산인 한 명을 본 적이 없냐고 물으니 아무도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 또 다시 범봉을 향하여 한 참을 가다 보니 대비골로 해서 오는 중이라는 한 무리의 등산팀들을 만나게 되었는 데 능선 상에서 여성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없냐고 물으니 역시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
산은 그렇게 좋아하고 줄기차게 산을 오르는 데 열정적이지만 평소에도 방향감각이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나로서는 원형으로 겉돌아서 회귀했을 거라는 감이 잡힌다.
그 중 조금이라도 안도할 수 있었던 것은 핸드폰 통화가 되진 않았어도 문자메시지로 상운암으로 향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는 선두그룹의 무전기를 통한 전갈이 왔음이다.
다시 딱밭재로 돌아 와서 대기하고 있던 여성대원과 운문산을 향했다. 어이 없이 낙오한 대원 때문에 43분의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모든 대원들의 가슴을 태우고(정작 본인은 더욱 가슴 조렸었겠지만) 낙오했던 여성대원(그래도 가장 천진한 웃음을 띈)을 천신만고 끝에 만나서 중식 겸 휴식을 취한 뒤 운문산 표지석에서 전원이 기념촬영을 할 수 있었다.
역시나 방향감각을 완전 상실(산행 시 좌·우의 개념이 거의 없음)하고 산행기점이었던 석골사까지 되돌아 내려 가게 되어서 재출발하여 상운암계곡으로 하여 올라 왔던 모양이다. 일행과 합류하기 위해서 목적지까지 고군분투하며 올라 온 그 가상한 집념이 참으로 경탄스럽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하고 반가운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유난히도 떠 벌리며 화려강산 좋아 하더니 자아를 상실한 피동적인 산행만 몇 년 동안 배워온 모양이고 수 차례 일러도 고쳐지지 않는 선천성 고집적인 기질만 고쳐지면 손색이 없이 참 좋을 여성대원이다.

 

운문산의 북릉을 바로 타고 내릴려고 표지석 바로 뒤의 숲으로 들어 가 보니 산행로가 만만치 않아서 잠시 머뭇거리니 대원 중의 한 명이 "이 아래의 갈림길에서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며 제의를 한다.
어차피 험한 북릉의 절벽을 바로 타고 내리지 못할 바엔 약간은 안전한 곳으로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상운암 갈림길인 쉼터까지 되돌아 갔다.
좌측사진의 지점에서 북방향으로 덜 발달된 산행로로 내려 서니 리본이 몇 개 보이지만 산행로가 아주 험하고 가파르며 태고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듯 음산한 기운마저 감돈다.

 

우측사진의 지점 끝에 서 보니 까마득한 절벽에 소폭포를 이루고 있는 데, 절벽의 좌측으로 탈출로가 있는 지 살펴 보니 확보용 자일이 없으면 내려 갈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위험하다.
워낙 모험을 좋아하는 성격 탓이라 절벽에 붙은 김에 위험에 도전해 보기로 하고 스틱으로 돌이끼들을 아래로 밀어서 털어 내리며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데 산행대장이 "아무래도 위험한 것 같으니 우리는 돌아 올라가 딱밭재에서 천문지골로 내려 가겠습니다"라며 무전기로 의사를 타진한다.
절벽에 가까스로 붙어서 간담이 서늘하도록 긴장하고 있는 판에 대원들의 안전을 생각하니 도저히 무리일 것 같아서 모든 대원들이 딱밭재로 가라고 응답한 뒤에 손가락 끝과 발끝으로만 바위의 의지할 곳을 조심히 옮기며 아래를 내려다 보니 잘 못하다 죽을 수도 있겠다라는 공포가 엄습해 오기도 한다.
긴장된 숨소리를 스스로 느껴 가며 천신만고 끝에 절벽 아래로 간신히 내려 설 수 있었다.

 

간신히 절벽 아래로 안착하여 소폭포를 올려다 보니 내려 오는 것보다는 차라리 폭포 옆으로 올라 가는 데는 담만 크면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위에서 내려다 볼 적에는 의지할 만한 홀드가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지 않는가? 좌측 사진의 우측 부분의 보이지 않는 곳의 의지할 홀드가 거의 없는 곳으로 해서 내려 왔었다.

소폭포 아래쪽에는 산행로가 아예 없고 폭포 위에서는 보이던 시그널이 한 개도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모든 선행자들이 폭포까지 왔다가 포기하고 되돌아 간 것이 분명해 보인다.
산행로가 전무한 험한 계곡을 약 35분 정도 숲을 헤치고 어지럽게 늘려 있는 너덜을 통과하며 내려 가다보니 '국제신문근교산취재팀'의 시그널이 고향에서 온 편지 마냥 반갑에 나무에 매달린 채 반긴다.
산행로가 없는 적막강산에서의 시그널이야 말로 외로움을 녹여 주고 방향타가 되는 고마운 역할을 한다. 운문산에서 바로 북릉을 타다가 곧바로 트래버스해서 이 계곡으로 올 수 밖에 없었던 듯하다.
비록 국제신문근교산취재팀의 시그널을 간간이 발견할 수 있다 하여도 족적이 없기는 매 한가지이고 깊은 숲속의 적막만이 감돈다. 오직 동물적 본성으로만 주위의 풍경이 보이지 않는 깊은 산 속에 묻혀서 잡목과 너덜을 헤치며 아래로 아래로 내려 갈 뿐이다.

 

적막한 산중에서 혈혈단신으로 고군분투하며 4부 쯤 내려 오다보니 산행대장에게서 무전연락으로 안부를 묻는 데 대원들은 딱밭재에서 1/3 가량 지점이라하니 7부 정도 되는 모양이다.
산행로가 없는 곳으로 내려 가는 내가 훨씬 더 늦을 줄 알았더니 오히려 더 앞서 가고 있는 상황이다. 운문산의 산행로 중에서 천문지골이라면 험하기로 이름이 나 있지 않은가.

이윽고 말라 붙은 소류지에 도착하여 대원들과 만날 동안의 시간도 벌 겸해서 운문천과 합류하는 지점까지 나갔다가 되돌아 오기로 했다.

 

천문지골과 운문천의 합수점까지 도착한 뒤에 대원들과 합류도 하고 땀도 씻어 내릴 겸해서 한 참을 되돌아 올라가 맑은 계곡물에서 목욕을 하고 기다리니 이윽고 선두가 도착하여 반가운 해후를 하고 나서 후미그룹이 도착할 때까지 탁족을 하는 등 한참 동안 휴식을 취하였다.

모두가 도착하고 보니 대원 중에서 한두 명은 다리에 부상도 조금씩 입은 듯하다.
낙오했던 대원과의 재회, 딱밭재에서 천문지골로 하산하면서의 대원들의 고생으로 점철된 운문산 북릉 산행이었다. 내 고생은 자초한 고생이었었고....

그래도 모두가 힘든 산행 뒤 탁족 후의 운문사로 향하는 뒷 모습들은 뿌듯해 보였었다.

 


 



운문사

운문사는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에 있는 사찰로 대한 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560년(신라 진흥왕 21)
에 한 신승이 창건하였다.
608년 (진평왕 30)에 원광 국사가 제1차 중창하였다. 원광국사는 만년에 가슬갑사에 머물며 일생 좌우명을 묻는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주었다고 한다.
제2차 중창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후삼국의 통일을 위해 왕건을 도왔던 보양(寶壤)이 오갑사(五岬寺)를 중창하였다. 943년 고려 태조 왕건은 보양의 공에 대한 보답으로 운문선사(雲門禪寺)라 사액하고 전지(田地) 500결을 하사하였다.
제3차 중창은 1105년(고려 숙종 10) 원응국사가 송나라에서 천태교관을 배운뒤 귀국하여 운문사에 들어와 중창하고 전국 제2의 선찰로 삼았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당우 일부가 소실되었다.
1690년 (숙종 16) 설송(雪松)대사가 제4차 중창을 한 뒤 약간의 수보(修補)가 있어 왔다.
1907년 운악(雲岳)대사가 제5차 중창을 , 1912년 긍파(肯坡)대사가 제6차 중창을 하엿다.
1913년 고전(古典)선사가 제7차 수보하였고, 비구니 금광(金光)선사가 제8차 수보를 하였다.
1977에서 98년까지 명성스님이 주지로 있으면서 대웅보전과 범종루와 각 전각을 신축, 중수하는 등 경내의 면모를 한층 일신하였다. 현재는 30여 동의 전각이 있는 큰 사찰로서 규모를 갖추었다.

운문사는 1958년 불교정화운동 이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되었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개칭되어 승려 교육과 경전 연구기관으로 수많은 수도승을 배출하고 있다.




  

승합차(16만원) : 산마루,폴리안나,정인,곰티,역장,산사랑부부,해무,설화,능선,이슬,서락,이정애(13명).

운문산 북릉이나 딱밭재에서 천문지골로 향하는 등산로는 험하다. 유별나고 색다른 코스를 탐험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지 않은 섣부른 산행은 금기시 해야 한다. 그토록 험하기에 도전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