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고운 이천오년 오월 스므아흐렛날
아침 6시 7분에 하늘재를 떠나 오후 4시 10분에 차갓재에 다다름.
기온은 높았으나 산할아버지가 선풍기를 켜 주셨음.
주요지점 통과시각 :
하늘재(06:07) - 하늘샘(06:15) - 포암산(07:05) - 만수봉갈림길(08:07)
부리기재(11:50) - 대미산(12:32) - 차갓재(16:10)
아내생각
요즈음 별 것도 아닌 이 대간구간종주를 한답시고
일요일마다 신새벽에 배낭을 챙겨 집을 나서는 내 마음을
한 없이 무겁게 하는 것이 아내에 대한 마안함이다.
"조심해서 잘 갔다오이소~"라는 인사와 함께
한 동안을 그렇게 서서 나를 배웅하는 사람......
누구나 다 처음 부부의 연을 맺을적에는
서로에게 잘 해주고 행복하게 해 주겠노라고
굳은 맹서를 주고 받는다.
나 역시 그러한 시절이 분명 있었으나
아직까지는 공염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늘 아침도 내 아내는 새벽 3시에 일어나 엊저녁 밥은 그냥 퍼 놓고
새로 지은 밥으로 도시락을 싸 주었다.
순간 흐릿해지는 차창너머로 비치는 파란 신호등 불빛을 따라
뒷차의 경적소리가 크게 울렸다.
뭔가 급한 일이 있어 이 새벽에 나온 차라 그런지
내가 하위차선으로 길을 비켜주자
그 운전수, 나에게 무언가 손짓을 하고는 금새 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오늘도 나는 이 각박한 문명속에서
배고팠던 지나간 날의 그 여유를 찾아 또 하루를 서성이게 될 것이다.
하늘재에는 우리보다 먼저 온 사람들인지 아니면 거기서 잤는지는 모르지만
일단의 산객들이 모여서 이화령쪽 절개지에다
뭔가 복잡한 문구들이 적힌 현수막을 걸어놓고
군사훈련 하듯이 구령을 붙여가면서 뭄풀기도 하고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조용한 산골의 아침을 다 망가뜨리고 있었다.
자기들은 뭔가 잘 한다고 생각하니 그럴테지만
남보기에 좋은 모양새는 아닐뿐더러
그 산장주인은 한참 곤히 자고있을 시간이다.
하늘재에서 포암산까지는 무척 가파른 오름길이다.
우리가 포암산에 다 다다를때까지도
예의 그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큰소리로 귀를 거슬렀다.
포암산에는 [문경시청산악회]에서 설치한 정상석이 세워져 있는데
속칭 지릅산 또는 마골산(麻骨山)이라 한다는 부연설명도 써져 있었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서 잠시 상념에 잠겨본다.
내가 버리미기재를 떠나 이화령에 이르는 동안
봉암사측의 희양산구간 대간길 통행저지와 관련하여
몇 건의 글을 올린 바 있는데 의외의 반응이었다.
대개의 백두대간산행기를 읽어보면
하나 같이 그 구간에 대한 불만사항이 빠지지 않는다.
내가 그걸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불만이 있어서 게재한 글이었고
그 글로 인해 나 스스로 깨우친 것도 있다.
어떤이가 봉암사를 두둔하면서 붙인 댓글을 보면
아무리 백두대간이라하지만
지도에 그어졌다하여 억지로 가고자 하는 것은
지나친 개인적 욕심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대개의 대간산행기를 보면
일면 영웅심의 발로라고 보아 무방한 글이 많다.
나 역시
그런 연유로
이 쉽지 않은 구간종주를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은 벌재까지 가기로 작정하고 길을 나섰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파온다
다리가 풀려 걸음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명치 끝이 무척 아픈걸로 보아 일찍먹은 아침이 체한 것 같았다.
죄없는 아내를 일찍 깨운 죄 값인가 생각하고
참고 참으며 걸음을 옮겨보지만 도무지 길이 줄어들지 않는다.
혼자길이면 어디 반석에서 한 숨 자고 가면 좋으련만
연로하신분과 함께가는 길이라 내색조차 못하고
앞장을 서기는 섰다.
기진하면 오히려 더 큰일이라 매우 짧은 휴식간격을 유지하면서
5분 누웠다가 10분 걷고......
지루한 시간을 그렇게 한 참 보내고 만수봉 갈림길을 지나고 나니
그처럼 총총 세워져 있던 이정표도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지난번에는
산할아버지가 선풍기코드를 빼 놓으셔서 하루 종일 고생했는데
오늘은 할아버지가 내가 이렇게 아픈 것을 아셨는지
구간 내내 커다란 떡갈나무그늘에다 선풍기까지 켜 놓으셨다.
가슴은 더 답답해지고 머리가 심하게 아파오는데
이제는 되돌아기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으나 사나 앞으로 가야한다.
부리기재에 이르니 등산복차림의 남녀 몇 분이 산나물을 뜯으며
마침 점심때가 다 되어 길에다 전을 펼쳤는데
촉촉히 젖은 그 방울토마토가 얼마나 먹고 싶은지.....
몇 개만 먹으면 속이 좀 시월 할 것 같은데
아직 봉지도 뜯지 않은채 그냥 둔 것을 좀 달라지도 못하고
그냥 물만 한 모금 마시고 길을 재촉했다.
그 분들의 말씀이 우리보다 앞선 산객들이
하늘재에서 부리기재까지 4시간 반 걸렸다고 한다.
그 사람들은 무척 빠르지만 우리는 보통 걸음이니
무리하지 말고 차갓재에서 끊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잔뜩 기대하시고
길 나서신 삼토성님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오늘 벌재까지 가면 다음은 죽령까지 갈 수 있는데
하는 수 없이
다음엔 저수재까지 가고 다시 죽령까지 길을 이어야 한다.
금새 닿을 것 같은 대미산은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이를 악물고
좁은 보폭이나마 더하고 또 더하니 마침내 대미산이다.
대미산에 오르는 길은 완만한 오름길이지만
오늘따라 내게는 왜 그렇게도 힘든지......
기념사진을 찍기는 찍었는데 완전히 비몽사몽이다.
정상을 조금 비껴내려서 도시락을 풀었지만
밥생각은 서울로 갔는지 오직 한숨 자고 싶은 생각뿐이다.
얼마 남지는 않았지만 아직 갈길이 남은지라
약삼아 억지로 좀 먹고 염치불구하고 꼬꾸라져 잠이 들었다.
문득 눈을 떠 보니
삼토성님께서 하릴없이 앉아계시는데 무척 지루하셨을 것이다.
토요일 늦게까지 일이 있어서
새벽 1시에 잠이 들어 3시반에 일어나 4시에 집을 나섰으니
잠도 좀 모자랐고 며칠간 있었던 여러 가지 복잡한 일로
몸상태가 무척 나빠져 있었다.
지난 일요일 산에서 받은 그 메시지가 뇌리에 남아 있어서
내가 왜 이런 산행을 해야하나 하는 자괴감마져 들었다.
조금 내려오니 "백두대간 중간지점" 표지판이 보인다.
전 같으면
"와~ 벌써 절반이네?"라고 할 탄성이
"휴~ 이제 겨우 절반이네."하는 탄식으로 바뀌었다.
아마 이번 산행이 너무 힘든 까닭일 것이다.
여기서부터 차갓재에 이르는 길은
평탄한 길을 한참 지나 조금 내리다가 계단식 오름길로 접어든다.
한참 오른 후 좀 평평하게 가다가 또 한참 오름길이고......
그러길 세 번 하고 나서 봉우리를 하나 더 넘으면 내림길이 시작되는데
둥굴레가 유난히 많은 묘가 하나 나오고 이내 그 송전탑이 보인다.
그 묘는 완전히 둥굴레로 덮혀있었다.
다 캐면 여러 가마니 될거라고 삼토성님께서 말씀하신다.
송전탑에서 한 20분 더 가면 작은차갓재지만
다음 코스가 비교적 여유로운지라 송전탑 우측 내림길로 접어들었다.
안생달에 도착하니 한백주양조장앞 마당에
[전주알파인]이라고 쓴 팻말이 붙은 관광버스가 서 있고
산행을 마친 산객들의 맥주파티가 벌어져 있다.
가게가 있으면 시원한 음료수라도 사 먹으면 좋으련만
가게는 없고 머리 안아프고 값도 싸고 몸에 좋다며
주인아저씨 그 술을 사가라고 권하지만 지금은 거져줘도 싫다.
이 안생달에서 동로로 나가는 막차가 오후 5시에 있다.
하늘재로 갈 생각에 처음은
안생달 -> 동로 -> 점촌 -> 문경 -> 하늘재 이렇게 갈까 했는데
마침 버스시간이 맞지 않아서 버스기사에게 물어보니
이미 버스는 다 끊어져서 어렵다면서 여기 저기 전화를 해 보더니
일단 동로까지 가서 해결하자고 한다.
참 친절한 기사양반이며 이것이 바로 시골 인심이다.
어???
차라리 안생달에서 문경택시를 부를걸 그랬나하는
좀 후회스러운 생각을 하면서 버스에 앉아 있는데
좀처럼 동로면소재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동로에 접어드니 버스기사가 길 가 집을 들여다보며 고함을 지른다.
버스기사 - "이 손님들 포암까지 가신다는데 아저씨는 어데 갔능교?"
택시부인 - "포암이 어뎅교?"
보스기사 - "여~ 넘에 갈평서 쪼매 더 가머 거~가 포암아잉교."
택시부인 - "야 ~ 내 전화해서 울아저씨 오라카께요."
마침 일요일이라 일찍 집에 온 그 문경택시를 타고 하늘재게 도착했다.
택시미터는 20,800원 나왔는데 20,000원만 받아가지고 그 택시는 돌아갔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시골 풍경이다.
그렇게 그들은 어울려서 살고 있었다.
하늘재산장에서 잠시 쉬면서 이제 산꾼들의 뻥이 얼마나 업그레이드 됐는지
그 아주머니 모습으로 알 수 있었다.
아직 세파에 덜 찌든 그 순진한 젊은 색시에게
오가는 산꾼들이 남긴 여러 가지 말들은 가히 가관이라 할 수 있었다.
이제 낚시꾼들도 산꾼들에게 미리 물어보고 뻥쳐야 할 시기에 이르렀다.
거 무슨 자랑이라고 여기 저기, 심지어 이정표에까지
자기 닉네임으로 낙서질을 하면서
자기들끼리 형님이 최고요 아우가 제일이라하는 식의
자화자찬식 글이나 올리는 사람들......
이게 오늘날 백두대간의 한 단면이다.
혼자서 대미산까지 갔다가 저는 여우목으로 내려왔습니다 다음이 큰일났죠^^
희양산에 대하여 쓰신 글을 잘 보았습니다 중생을 제도한다는 종교가 중생위에 군림하려는 것이
요즈음의 새태인 듯 합니다 좋은글 자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