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그 길을 따라서...(Ⅱ)

(Ⅱ),  (6월5일) 세석(細石), 그 이상향( 理想鄕)에서! ...

1. (05:00)  뱀사골, 지리산의 신선한 아침
    잠에서 깨자 대피소 안은 벌써 부산하고 창 밖은 훤히 밝아온다.
   마당으로 나가자,
   어두움 속에서 뱀사골부터 올라 온 산객들이 벌써 대피소에 도착,
   샘물로 목을 축이고 또 다시 길을 떠난다.
   나도 차가운 샘물 한 잔을 마시자 심신이 맑아진다.

     지리산 깊은 계곡 뱀사골에서 맞은 이른 아침,
   어제 약간 내린 비로 깊은 숲 속의 대기는 더없이 맑고
   구름이 계곡 위를 떠돈다.
   깊게 숨을 들이쉬며 지리산 맑은 공기를 마음껏 느낀다.

     오늘은 여유 있는 길이다.
   일정 상 장터목까지 가야 하나 어차피 비박할 작정인데다
   오늘 종주를 시작한 후배들이 세석에서 머문다 하니
   세석까지만 가기로 한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화개재로 향하는 계단을 오른다.(07:00)

2.(07:40)  토끼봉, 토끼로써 행복함이라!
   화개재(1,360M)에는 연휴를 맞아 지리산을 찾은 산객들이 가득하고
    주능선 길에도 많은 산객들이 걷고 있다.
    나도 한사람의 객(客)이 되어 토끼봉 오름을 걷는다.
   초하(初夏)의 아침 숲 속은 새소리와 자연의 향과 신선함이 가득하고
   나뭇잎 사이로 아침 햇살이 비추인다.
   지리산이 나에게 가르쳐 주는 지혜의 빛인가?
   긴 오름의 숲을 벗어나 토끼봉(1,533M) 바위 위에 선다.(07:40)

     대개의 지리산 봉우리들이 선계(仙界)의 이름이건만,
    토끼봉(반야봉의 卯 - 토끼 方位)이라는 평범한 이름이 오히려 다정스럽다.

     토끼가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두 귀를 쫑긋 올려 세운 채 풀을 먹다가
     조그만 소리가 나도 두려움에 경계하며 깡충 깡충 뛰어 달아나고 하지만
     토끼는 토끼일 때가 가장 강하고 행복하지 않을까?
     토끼가 그러한 자기 신세가 처량하여
     여우나 호랑이가 되고자 한다면 그 토끼는 이미 약하고 불행해 진 것은 아닌지!

    토끼봉 바위 위에서 저 멀리 구름 뒤편에 하늘에 닿아있는 천왕봉을 올려다보고
    고개를 돌려 노고단, 반야봉에서 이어진 걸어온 능선을 뒤돌아본다.
       토끼는 토끼일 때가 가장 강하고 행복하며,
       나는 나이기에 행복하다.

3.  지리산! 그 길을 따라서...
   명선봉(1,586M)으로의 숲길을 오르내린다.
   연휴를 맞아 많은 사람들이 지리산을 찾은 탓인지
   많은 산객들 사이에 끼여 주능선 길을 걷는다.

     다급한 발소리에 뒤돌아보면 마라톤 하는 이들이 부딪히며 앞질러 가고
   많은 산악회 모임에서 온 무리들이 웃고 떠들며 가고 있다.
   부산의 모 인터넷 산악회는 배낭 뒤편에 커다란 노란 깃발까지 달고는
   스스럼없이 웃고 소리친다.
   일부는 깃대가 튀어나와 뒷사람의 눈을 위협한다.
   지리산에 대한 외경심은 커녕 자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않은 채
   단지 지리산 종주라는 성과만을 바라고 온 무리들로 인해
   잠시 마음의 평화는 깨어진다.

     태초부터 많은 전쟁과 평화, 사랑과 이별, 기쁨과 슬픔 이 모든 것을
   겪고 또 받아들이며, 지금도 그 넉넉한 품으로 모두를 맞이하는
   지리산에 감사하며 명선봉을 지나 연하천대피소에 이른다.(09:25)
   연하천대피소도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대피소 앞 맑게 흐르는 샘물에 담긴
   캔맥주의 유혹을 이겨내고 차가운 샘물로 목을 축인다.
    

4.(11:47)  벽소령, 엽서를 붙이지 못하다.
   푸르게 자라고 있는 주목들이 늘어 선 보호철망 사이를 지나,
   벽소령으로의 숲길로 나선다.
   주목을 보호하기 위해 철망을 친다지만, 실은 우리 인간 스스로를
   철망 속에 가두어 자연과 멀어지는 것은 아닌지...
     숲길을 지나 형제봉(1,115M)을 지난다.(10:56)
   발 아래는 지리산의 깊은 골짜기가 펼쳐지고 골짜기가 끝나는 곳에는
   평사리의 푸른 들이 보인다.

     이윽고 도착한 벽소령대피소에서 점심을 먹고 벽에 기대어
   달콤한 잠에 빠진다.
   대피소 앞 빨간 우체통을 바라본다.

     지난번 자만에 젖은 나는 소식을 기다리는 이에게 엽서를 붙이지 않았건만,
   이제는 마음을 담은 엽서를 전하고자 하여도 받아 줄 이가 없다.
   나는 아내와 두 딸, 가족, 친구 그리고 내가 아는 모든 이를 떠올리지만...
         결국은 마음을 담은 엽서를 붙이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긴다.(13:45)

  

5.(15:49)   칠선봉, 선계(仙界)에 들다.
   덕평봉(1,615M)을 지나 아직 공사중인 듯한 잘 정돈된 선비샘에 도착(14:40)
   차가운 샘물에 미숫가루를 타 마시며 잠시 쉰 후,
   오르고 내리는 능선 길을 반복하여 바위 봉우리가 7명의 선녀와 같다는
   칠선봉(七仙峰: 1,576M)에 이른다.(15:49)
   이제 천왕봉(天王峰:1,915M)까지 仙界가 펼쳐진다.
   이르는 봉우리마다 고사목과 우거진 숲 바위 등이 어우러진 선계의 경치를 보여준다.

     영신봉(靈神峰:1,652M)을 향하는 가파른 철 계단을 오르며 이제 더욱 가까이 다가온 천왕봉을 바라본다.
   영신봉 바로 전 전망 좋은 봉우리에서 천왕봉부터 노고단까지의
   주능선의 조망을 즐긴다.
   발 아래에는 깊고 푸른 골짜기가 한없이 펼쳐져 있다.(16:36)
  

6.(17:15) ~ )  세석(細石), 그 이상향( 理想鄕)에서 ...
   고사목과 살아있는 주목, 나무들 그리고 연분홍 철쭉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영신봉(靈神峰:1,652M)에 다다르자(16:56)
   남부능선과 대성골이 길게 이어져 있고,
   이제 눈앞에 세석의 넓은 초원이 펼쳐지고 오늘 머물 세석대피소가 보인다.

     옛사람들이 또 다른 청학동(靑鶴洞)으로 여겼던 세석평원은
   연분홍 철쭉과 관목, 풀들이 우거져 이상향에 드는 것 같은 생각을 들게 한다.
   많은 산객들로 북적대는 세석대피소 앞마당에 편안히 자리를 잡는다.
   대피소 아래 공터와 헬기장에도 비박을 하려는 사람들이
   일찍부터 자리를 잡는 모습이 보인다.

     저녁을 먹고 어렵게 후배와 통화를 하자, 사고가 생겨 많이 늦을 거라 하기에
   먼저 하루 산행을 마무리하는 한 잔의 술을 마신다.
     이제 세석평원은 어둠에 덮이고 6월이지만 지리산의 밤바람이 예상보다
   너무 세고 차갑다.
   겨울옷까지 입고 중무장 하지만, 비박은 자신이 없어
   대피소 안으로 들어가 줄을 서서 대피소 출입구 옆 복도 자리를 배정 받는다.
   이제 차가운 밤바람 마저 즐긴다.
   오후 9시가 넘어 후배들이 가까스로 도착, 함께 정을 나눈다.
         세석평원의 캄캄한 밤하늘에는 하늘 가득 빈틈없이 별들이 반짝이며
         이상향에 든 나를 비추인다.(22:00)

   산행시간 : 10시간 15분   (07:00 ~ 17:15 )
   산행거리 : 14.1 Km + @   (뱀사골 ~ 세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