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길산-예봉산-예빈산 종주기


 

                            *산행일자:2005. 10. 23일

                            *소재지  :경기 남양주

                            *산높이  :운길산610미터/적갑산561미터/예봉산681미터/예빈산550미터

                            *산행코스:조안보건지소 -운길산-예봉산-예빈산-천주교묘지입구

                            *산행시간:9시-17시(8시간)


 

  어제는 운길산을 올라 가을을 맴돌고 있는 산 식구들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봄부터 산 나들이에 동행한 나비는 율리봉 정상의 표지석에 앉아 저를 맞았고 가을 소식을 맨 먼저 전해준 잠자리는 승원봉에 내려놓은 배낭에 사뿐히 내려앉아 이별이 아쉬운 듯 한참이나 애절한 눈빛을 제게 주었습니다. 나뭇잎에 가려 여름 내내 몸 동아리를 내보이지 않던 박새가 수종사 앞뜰의 나뭇가지를 날며 제 모습을 내보여주었고 터줏대감 까마귀도 저공으로 비행하며 제 주위를 맴돌았습니다. 어제 인사를 나눈 것은 이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운길산에서 고개사거리에 이르는 길 양 옆에서 남양주시와 LG상록재단에서 달아준 명찰을 달고 다소곳이 자기를 소개해온 나무들도 꽤 여럿 있었습니다. 당단풍, 떡갈나무, 물푸레나무, 벚나무, 쪽동백, 신갈나무, 생강나무, 굴참나무, 국수나무, 소나무, 진달래와 철쭉 등이 그들이었습니다. 이들과 함께한 동안 겨울로 내닫던 가을도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고 바람도 숨을 고르며 끼어들기를 삼가 해  실로 오붓하고 흐뭇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침9시 조안보건소를 조금 지나 당도한 운길산 입구에서 하루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새벽 5시20분에 일어나 늑장을 부리다가 동서울터미널에 늦게 도착, 그새 가평 행 버스표가 매진돼 서둘러 청량리 역으로 옮겼지만 기차 역시 떠나버려  택시비만 잡아먹었습니다. 7시15분발 기차를 타야 9시에 가평을 출발하는 익근리행 버스를 탈 수 있어 해 안에 명지산을 종주할 수 있는데 이미 이 기차가 출발한 터라 급하게 산행지를  운길산으로  바꾸고, 양수리까지는 버스로, 운길산 입구까지는 택시로 옮겨 9시부터 산을 오를 수 있었습니다.


 

  9시52분 수종사에 올랐습니다.

이조 성조 때의 대학자 서거정이 “동방 절간 가운데 이만한 전망을 가진 절이 없다”라고 칭송한 수종사의 대웅보전 앞에서  내려다본 두물머리는 참으로 포근하고 아늑해 보였습니다. 잠시 전 수종사입구의 찻집 “처음처럼”에 들러 커피를 마시며 백화도량송인 “나무관세음보살”노래를 들었습니다. 강물 위를 가볍게 거닐던 희 뽀얀 물안개를 물리치고 햇살을 쏟아 붓기 시작한 아침 태양이 이 노래로 포근해진 제 가슴을 더욱 따뜻하게 했습니다.


 

  세종21년인 1,439년에 제작된 수종사의 부도는 세종대왕의 2녀인 정의옹주부도입니다.

기단 및 탑신, 그리고 지붕이 모두 8각형으로 되어있는 팔각원단형의 부도를 보고  원주율 파이가 생각났습니다. 원안에 꽉 차게 들어서면 3각형보다 8각형의 변의 길이가 원둘레에 가깝고 n각형의 n을 무한대로 하면 변의 길이는 원둘레와 같아지기에 3.14159.......의 파이 값을 얻게 된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부도를 8각형으로 할 것이 아니라 32각형정도 했으면 후세의 수학발전에 이바지 할 수 있었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10시52분 해발610미터의 운길산에 올라섰습니다.

수종사 뒷 봉에서 왼쪽으로 난 바위 길을 오르내리며 20분가량 걸으면 운길산에 닿게 됩니다. 운길산에서  “V” 자를 크게 그려가며 정남쪽의 예빈산까지 이어지는 능선에는 벌써 단풍세레머니가 시작되었고, 반대방향의 갑산을 거쳐 백봉으로 이어지는 한북천마지맥을 보자 이 지맥을 종주하는 제게 서럽도록 많은 비를 퍼 분 지난 4월의 폭우가 생각났습니다. 그렇게 퍼 부은 비로 키워낸 여름의 푸르름을 털어내는 붉디붉은 단풍의 제전을 지켜보고자 많은 분들이 운길산에 올라 정상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10시59분 정상을 출발해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들어섰습니다.

정상에서 503봉까지 곳곳에 암릉 길이 있어 아기자기 했고, 503봉에서 고개사거리까지는 경사가 완만한 흙길이어서 걷기에 편안했습니다. “미래를 여는 꿈, 산은 희망입니다.”를 복창하며 인사를 건네 온 떡갈나무와 당단풍나무 등이 “저의 용도는 관상용이고 기구용이고 약재용입니다.”라고 신고를 해오자 마치 “저 비엠떠블유의 용도는 돈을 벌어오는 것입니다.” 라고 소개하는 것 같아 이 명찰을 걸어준 남양주시와 LG상록원의 과다한 친절이 조금 눈에 거슬렸습니다.


 

  12시27분 사거리고개를 지났습니다.

작년 12월 이 곳에 다다를 때까지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해 호젓했었는데  어제는 꽤 여러분이 이 길을 밟아 그 때처럼 이 산 길에서 고즈넉한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바람이 실어온 가을의 냉기가 가슴팍을 파고들어 차분하게 단풍의 처절한 아름다움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사거리고개에서 약수터를 들르지 않고 바로 예봉산으로 올랐습니다.


 

  12시42분 갑산으로 갈리는 삼거리 463봉에서 짐을 풀고 점심을 들었습니다.

어린 아들 딸과 함께 가을 나들이를 나선 40대 초반의 부부가 그토록 부럽게 보였던 것은 산과는 담을 쌓은 다 큰 아들들과 함께 산에 오르는 기회를  만들 수 없어서였습니다. 지난 12월에는 갑산을 다녀오느라 운길산 출발 2시간 반 만에 이곳에 닿았는데 이번에는 바로 와 약 50분을 단축, 예봉산에서 하산하겠다는 당초의 계획을 바꾸어 예빈산을 거쳐 천주교묘지로 내려서기로 생각을 고쳐먹자 다시 갈 길이 바빠졌습니다.


 

  13시42분 패러글라이딩 활강장을 지났습니다.

남양주시장배 패러글라이딩 대회의 출발점인 이곳 활강장까지 자기만한 큰 짐을 지고 올라가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 패러글라이더들에 산객들의 격려 인사가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고, 난기류가 발생하지 않아 한강 상공을 빨갛게, 노랗게 또 파랗게 물들인 패러글라이더드의 상공체재시간이 얼마고 지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이든 한분이 있었지만 대체로 2-30대의 청년들이 주축을 이룬 패러글라이더들이 부러운 것은 제 대학시절과는 달리 이제는 40대를 넘어서야 건강을 지키기 위해 산을 오르기 시작하기에 산행을 하는 젊은이들을 찾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14시12분 해발 683미터의 예봉산 정상에 올라섰습니다.

예봉산 오르기 직전의 안부에 자리 잡은 억새밭을 카메라에 담고 나자 지난 8월 2시간 반을 넘게 풀숲을 헤쳐 오른 영취산-깃대봉의 대간 길 억새밭이 지금쯤 장관을 이루고 있겠다고 생각하자 다시 한번 그 길이 뛰고 싶어졌습니다. 정상에 오르자 운길산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 양수리와 운길산을 일별한 후 바로 20분을 더 걸어 율리봉에 다다랐습니다.


 

  14시33분 해발 587미터의 율리봉에서 15분가량 쉬었습니다.

천호동에 산다는 나이든 부부가 건네준 밤을 고맙게 들며 잠시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등대지기로 정년을 꽉 채운 한 친구 분이 먹고 살 돈이 충분한데도 서울 집에 머무르지 못하고 남해안으로 혼자 내려가 또 다른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며 혼자 사는 것도 지나치면 병이된다는 남편분의 지론에 충분히 공감이 갔습니다. 율리목 표지석에 앉아 잠시 날개 짓을 멈춘 나비가 이른 봄 “나비야 청산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고 꼬드겼던 제게 작별인사를 해왔습니다.


 

  15시38분 해발590미터의 예빈산을 지났습니다.

직녀봉으로도 불리는 예빈산에서 240미터를 더 가면 견우봉에 닿게 됩니다. 계모 배씨의 방해로 외갓집 잔치에 가지 못하고 겉피 석 섬을 마당에 널어놓고 베를 짜고 있는 콩쥐를 베틀에서 내려오게 한 후 순식간에 베 한필을 다 짜고 새로 지은 옷과 댕기및 신발 한 벌을 내준 직녀의  선행에 답하고자 칠석날 오작교에서 만날 때까지 건강히 잘 계시라는 직녀의 애틋한 사랑을 견우에 가감 없이 전해주었습니다. 직녀봉과 견우봉 모두 한강조망의 최적지이기에 부지런히 셔터를 눌러대 한 낮에 서울로 내닫는 한강을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16시10분 해발 450미터의 승원봉에서 마지막 휴식을 취했습니다.

내려놓은 배낭에 앉은 잠자리 한 마리가  떡을 들고 있는 제게 한참이나 애틋한 눈길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잠자리의 작별인사가 가을은 만남의 계절이 아니고 헤어짐의 계절임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하산 길에 천주교묘지를 지나면서 이 지방에서 태어나고 묻힌 다산 정약용을 떠올렸습니다.

불후의 명작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를 남긴 실학의 대가 다산은 1795년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어 일하는 중 천주교를 독실히 믿어온 이곳 주민들을 회유, 개종시켜 배교자로 낙인 찍혔지만 제가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지금의 천주교에서 다산의 배교를 단죄하고자 그의 과거를 조사하고 규명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학문적 업적과 실사구시의 정신을 구현한 노력이 후세로부터 평가받은 그라고 해도 배교사실을 끄집어내 부관참시를 한다면 그의 후손이 입을 상처가 적지 않을 터인데 그리하지 않는 천주교 교단이 세속의 권력집단보다 얼마나 너그러운가를 보여주었습니다. 친일반역자의 명단이 쉰들러 리스트가 아닌 부관참시대상자 리스트라면 그 선정과 발표의 모든 과정을 보다 신중해 하고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으며  부관참시의 역사가 이 땅에서 종언을 고할 때 우리는 역사를 통해 진정으로 과거와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7시정각 천주교 묘지 앞 버스정류장에서 8시간 동안의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예봉산과 검단산을 내려 앉힌 한강 물은 끊임없이 서울로 흘러갔고 대덕산과 금강산에서 발원한 한강 물이 숨 가쁘게 달려와 빈자리를 채워가고 있음을 보고 저것이 자연의 질서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