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10월 20일-21일, 그리고 뽀너스 하루 더.

코스: 설악산, 한계령-대청봉-중청(1박)-봉정암-백담사



 

왜 산을,

바다는 수평의 공간이고 산은 수직의 공간이다. 바닷가 도시에서 태어나 바다냄새가 내 어머니 냄새겠거니, 알고 자라온 나에게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바램 또한 넓고 깊은 바다가 언제나 원형이자 모델이었다.

헌데 언젠가부터 산이 알고 싶어졌다. 수평의 공간에서 한계에 부딪쳤나보다. 끝도 없는 수평의 막막함을 털어내고 목적지가 분명한 정상에 오르고 싶은 욕망이 생긴게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한 달 쯤 뒷산(관악산)을 들락거리다 연주대까지 딱 한번 다녀오고는 올겨울 목표를 지리산 겨울산행으로 잡았다. 그리고 그 준비산행겸, 내 인생의 거대한 첫 수직 발자욱을 받아줄 품으로 설악산을 택했다.


 

그리고 두려움

무식하고 용감하긴 하지만 완전 바보도 아니고 주변의 걱정과 비웃음도 만만치 않았던 까닭에 가기 전날은 잠도 거의 이루지 못했다. 든든한 안내자가 있어 짐도 줄여주고 준비물도 꼼꼼히 챙기긴 했으나 가장 큰 걱정은 무엇보다도 나의 몸. 짧은 시간 단련을 한다고 했지만 워낙에 물러터진 몸이라 도대체가 믿음이 가질 않는다. 끝까지 해내리라는 다짐은 흔들림이 없었지만 그 과정에서 겪어야 할 고통에 대해서는 감도 오지 않을 정도로 나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거의 뜬 눈으로 밤을 보내고 동서울 터미널에서 한계령행 버스에 오른다. 새벽 6시 30분. 딱 세시간 걸려 도착한 한계령 휴게소는 단풍철 대목을 맞아 잔뜩 흥에 차 있었다. 그다지 내 마음에 마뜩치가 못하다. 왜 하필 단풍철을 잡아가지고... 엉뎅이만 보고 올라가야 한다더니만 진짜 그런가? 잠잘 데는 있을랑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만. 단풍구경하러 온 것도 아닌데 투덜투덜...


 

가는거야...그냥!!

밥 먹고 화장실 다녀와서 자외선 크림 바르고 촌스런 사진 한방 박고 장갑끼고 스틱이라는 걸 꺼내서 손에 끼고 보무도 당당히 오른 시각이 11시 반경. 눈앞에 쫙...펼쳐져 있는 계단에 숨부터 턱 막힌다. 그로부터 중청에 도달할 때까지는 사실 아무 생각도 별다른 기억도 없다. 그저 오르는 길이면 오르고 내리는 길이면 내리고. 가다 잠시 숨 한번 고르는 새 펼쳐지는 절경의 산새는 사진이나 티비에서 본 그림들과 별반 다를게 없는 듯하다. 아직도 실물보다는 사진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초짜가 아닌가.

맑고 청명하고 따스한 날씨였다. 바람도 한 점 없는...손에 익지 않은 스틱을 두개씩이나 들고(다음날 코스가 더 험하다고 하여 필히 오늘 숙지를 해야 한다는 기특한 마음이다) 낑낑대며 바위틈을 기어다니느라 힘도 들었겠건만, 솔직히 힘이 드는 줄도, 길이 먼 줄도 모르고 무조건 걷기만 했다. 가다보면 언젠가는 나오겠지...그 한 가지 생각뿐이다.

  

  

" 끝청에서 폼잡고 찍은 사진에 손가락이 이상하다. 분명히 V 자를 만든다고 만든 것 같은데..."

  

갈색 줄무늬의 쪼그만 다람쥐들이 가끔씩 가는 길을 가로막고는 빤히 쳐다보고 섰다.

  - 뭐하러 그렇게 빨빨대고 가냐? 별것도 없구만...

아니, 저것이.... 남는 힘을 짜내 스틱을 휘둘러 길을 틔운다. 비켜라. 아무 생각없다....가던 길이니 일단 가고 보자.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다. 가던 길이니 가야만 한다는, 이런 무모하고 무식한 상황에 왜 발을 못담궈서 안달들일까. 잠깐 이런 생각이라는 게 들려고는 했지만 곧 털어버린다. 귀찮다....그것도.


 

대청봉과 달과 별(인공위성?)과 술

중청에 도착하니 6시쯤 됐나보다. 배낭을 벗어놓고 눈앞에 빤히 보이는 대청으로 나를 준비 완료. 어둡기 전에 후딱 다녀와야지, 란 마음으로 출발은 했는데...생각보다 만만치가 않다. 만만한 내 마음을 이놈에게 들켜버린 게 틀림이 없다. 이미 긴장이 풀려버린 다리를 질질 끌며 지저스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그림까지 떠올려가며 세상의 반은 두르고도 남을 듯한 노을을 작은 위안삼아 마침내 정상에 올랐다.  

  

 

"엄청 바람불고 엄청 추웠다!! 일단 쪼그리고 앉아서 손을 부비고 있노라니 코끝이 시큰해진다.

  엄청 불쌍해 보인단다... 찰칵!  됐다, 내려가자!!!"

  

내가 머리 속에서 수십번을 그려 본 가장 고대되는 순간은 바로 까만 밤하늘에서부터 쏟아지는 별빛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광경이었다. 한데 자리를 잡고 판을 펼쳐보니 눈앞에는 우뚝 솟은 봉우리 하나와, 밥짓는 새 발갛게 떠오른 똥그란 달 하나(해뜨는줄 알았다), 그리고 그 옆에 조그맣게 빛나는 별이 달랑 하나다(동행의 말로는 그것도 인공위성이란다). 달빛이 밝을 때라 별빛이 안보인단다. 때밋... 머 아쉬운따나 달 하나, 별 하나, 우리나라에서 거의 제일 높은 봉우리 하나에, 술벗 둘까지 곁들이니 자리가 제법 폼이 잡힌다. 분주하니 밥짓던 사람들도 하나 둘씩 들어가고 산장 처마 밑 불빛이 운치를 더한다 싶더니만, 기울이는 잔마다 어느새 세월과 한숨과 바람이 소록소록 쌓이고 또 비워져 간다...


 

 


길, 길, 길

이날 역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이튿날 더 힘든 코스라는 공룡능선을 타야 한다는 부담감과, 골아 떨어져서, 못일어나서, 혼자 남아서, 오도가도 못하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동앗줄만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되면 어떡하냐는 걱정 때문에 취기도 별 소용이 없었다. 아침 7시. 다시 길을 떠난다.

바람 한점 없이 청명하기만 하던 어제와는 날씨가 딴판이다. 진눈깨비와 바람이 몰아쳐 공룡능선 산행은 무리로 판정. 백담계곡으로 노선을 변경했다. 예쁘장한 소청산장을 거쳐 봉정암 찍고 계곡길로 접어드니 바람은 잦아들고 조촐한 빗소리와 함께 아직도 선연한 고운빛을 간직한 낙엽들이 길을 다 덮었다. 이 때부터 내 가슴은 예상치 못했던 기쁨에 마냥 벅차오르고 만다....

오후로 접어들자 가끔씩 사람들이 있구나 정도 일행을 만나기도 했지만 줄곧 너무도 호젓한 숲길이었다. 잔뜩 물이오른 형형색색의 단풍에 때론 조금 굵은, 때론 가는 빗줄기가 조용히 스며든다. 깊고 아름다운 비오는 가을숲의 정취에 가슴이 시린다. 내가 반쯤 살았다 치고 내려가는 길 위에 서 있다면, 이 길을 닮고 싶다. 지나온 길을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충분히 흡족하고, 끊어질 듯 이어지며 오래 거닐어도 지루하지 않은, 흙과 비와 나무와 계곡과 하늘과 사람과, 그리고 계절이 황금비율로 성숙하게 어우러진, 이 길을 닮고 싶다.  얼마 후면 끝날 길인걸 알아도 후회같은 건 남지 않겠지...

어느새 백담사까지 다 왔다.

  


 

  

"남은 음식과 술을 털어낸 수렴동 대피소. 언제 누가 앉았냐 싶게 금새 또 주인이 바뀌어 있다. "


 

해지는 마을

산을 다 내려와 마을로 나와보니, 이 마을이 아무래도 나그네의 발길을 놓아줄 폼새가 아니다. 군데군데 걸린 황태구이 간판하며, 고즈넉한 어둠으로 스며드는 얌전한 민박집 간판들이 꽤나 유혹적이기도 하거니와, 아직도 가까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자락밑으로 포근히 내리앉은 마을의 매무새가 사랑하는 님을 보내기 싫어하는 여인의 비장의 무기, 풀리기 일보직전의 옷고름같다. 용대리란다.

막차 시간이 30분쯤 여유가 있었지만 없는 셈 치기로 했다. 막차를 놓친 셈이니 어쩔 수 없지. 그냥 여인의 품에 하루를 더 맡긴다. 그날 밤 그 품에선 많은 양념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감칠맛 물씬한 황태구이와, 쭉쭉 찢어먹는 담백하고 시원한 배추김치가 나오더니만 결국엔 담근 지 5년이 넘은데다 투실한 넘이 네 뿌리나 들어간 더덕주까지 어울려 진한 향기를 내뿜었더랬다.


 


**** 사니좋아님, 만나서 반가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