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다.
잠이 깼다.
계곡을 쓸고 가는 바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1300고지에서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바람이 세차게 불어 엄청나게 춥다.

인간의 적응능력은 참 묘하다.
바람으로 인하여 느끼는 체감 추위는 더욱 을씨년스럽기에
은박지매트를 둥글게 감아 양 옆으로 부는 바람을 막는다.
하지만 내의를 갈아 입고 파일자켓 위에 윈드자켓까지 입었지만
체온을 보온해 주지는 못한다.

밤은 깊었지만 시간은 알 수 없고
마지막으로 기대되는 mp-3로 라디오 채널을 맞추어 보지만 전파가 잡히지 않는다.
달은 훤하게 밝아 낙엽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이리뒤척 저리뒤척 불편한 잠자리에서
잠을 청해 보지만 한번 깬 잠은 추위 때문에 다시 오지 않는다.

추워서 주머니 속에 손을 넣자 동그란 시계가 잡힌다.
(몇 g의 무게라도 줄이려고 시계줄을 잘라 버림)
침낭 커버 속 좁은 공간에서 손전등으로 보는 시간은 유리판에 빛이 반사되어
2시 반인지 3시 반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직도 날이 밝으려면 멀었구나.
기다림의 절망감이 먼저 의식을 점령해 더 춥게 느껴진다.

가까이서 알지 못하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두려움에 손전등을 바깥으로 비치며 금속 소리를 크게 내지만
울음소리는 간헐적으로 계속 들린다.

두려움을 잊기 위하여 mp-3로 노래를 듣는다.
짐승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고 노래는 끝나고, 아마 1시간 30분쯤 지났을 것이다.
그럼 지금 시간은 4시. 아직도 날이 밝으려면 멀었다.

점점 더 추워진다.
200g 밖에 안 되는 오리털 잠바 내피를 배낭에 넣었다가
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최종 순간에 뺀 것이 몹시 후회가 된다.
1000고지 이상에서의 새벽은 벌써 겨울이 오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준비를 소홀히 한 대가를 톡톡히 치려고 있다.

침낭 커버 속에서 무릎을 꿇어 엎드려 절하는 자세로 몸을 웅크리고
날이 새기를 기다리다 깜박 잠이 들었다 깨어난다.
벌써 밖이 훤하다.(06:00)
서둘러 배낭을 꾸려 마등령으로 올라간다.

마등령에는 무박 안내 산악회 회원들이 일출을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다.
00산악회 깃발을 보고 함께 산행을 했던 님들을 찾아 보지만
백 여명이 넘는 인파가 모여 있어서 보고픈 얼굴을 찾을 수 없기에
그리운 마음만 안고 홀로 길을 떠난다.

동 트는 새 아침.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결의를 다지는 맹세는 세월 속에 묻어 기억도 가물거리고
빈 손으로 왔다가 빈 몸으로 돌아가는 인생에서
사나이 가슴에 뜨거움을 불려 넣은 것은 무엇이었나?

인연은 스치는 것이다.
집착을 버려라.
모든 괴로움은 집착에서 시작된다.

무착(無着)의 경지를 상상하며
산행을 하면서 마음을 비우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메마른 가슴에 사랑의 감정을 불러 넣어 준 인연의 소중함은 간직한다.



화채봉 위로 태양은 솟아 오르고
세존봉은 아침 햇살에 붉은 바위봉우리를 드러내고
공룡능선의 단풍은 졌지만 가야동계곡은 울긋불긋 찬란한 햇살을 기다리고 있다.




  



고릴라 상을 한 나한봉(?)은 후천개벽의 세상을 꿈꾸는지 말없이 천년을 기다리고,
하늘을 막아선 장벽을 넘어 피안의 세계로 향하는 마음은 무애(無碍)


 

.

 
인간은 오만과 탐욕으로 바벨탑을 세워 하늘에 닿으려고 하지만
자연은 하늘에 대한 향념으로 1275봉을 빚었고
하늘과 바다. 봉우리와 계곡. 바위와 나무…….
외설악의 풍경은 아름다움이다.


 


 
도열한 날카로운 암봉은 이곳이 공룡의 등뼈임을 알려주고,
수 많은 봉우리의 우러름을 받는 대청봉은 부드러움으로
산 아래를 포용하는 넓은 품을 지녔다.





  
천상의 바위꽃 천화대는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하늘의 세상이지만
언제부터인가 속세의 때가 쌓이고 있다.
20년 전쯤 저 칼날 능선 위에 부질없는 발자국을 남겼지만
아마도 흔적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범봉으로 갈라지는 능선 위에는 텐트 2동이 설치 되어 있고
마사토가 계곡으로 흘러내리고 있다.(08:25)
양지바른 곳에서 아침으로 김밥을 먹는데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어
햇살의 열기는 날리어 가버리고 추위가 엄습하므로,
할 수 없이 장소를 이동하여 먹다 만 김밥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출발 한다.(08:55)



  
뒤틀어진 삶.
돌연변이일까?
환경에 적응 하려는 생명의 경이일까?

욕심이 많은 배부른 자. 통과하지 못하고 심판 받으리.


 


다음 카페 40-50의 대부대가 산행하고 있다.
지체되기 시작한다.
기다리지 못하고 이리 저리 바위를 넘고 나무를 잡고 그들을 앞질러 간다.

지나가다 슬쩍 보니 여인 천하이다.
여자, 여자, 여자이다.
노총각은 이 카페에서 활동을 하면 여자를 만날 수 있는 확률은 99%?

초등학교 초임교사의 대다수가 여선생님이라는 사실은 보도를 통하여 알고 있지만
등산에서까지 여자가 무혈점령 하다니 세상사의 변화를 실감한다.
심지어 매 맞는 남자에 대한 보도가 나오는 현실이니,
이제 여성은 더 이상 보호 받아야 하는 사회적 약자가 아니다.

오르락 내르락 타고 넘는 능선 길에서
친구 분들과 함께 오신 웅산님을 만난다.
반갑게 인사하고 갈 길이 서로 달라 아쉽지만 헤어진다.



 
서쪽에는 귀떼기청봉과 용아장성. 그리고 가야동계곡이
동쪽에는 잦은바위골과 화채능선이 대칭을 이루고,
공룡능선은 설악의 심장을 가르고 있다.


 



뒤돌아 본 범봉과 1275봉



용소골과  울산바위

신선봉에 올라(10:00) 내▪외 설악을 굽어 보며
수 많은 봉우리와 골짜기, 바위의 이름을 지형과 일치 시켜 본다.


 




신선봉을 내려 와서 가야동 지계곡으로 내려 간다.
초입에는 푸르름과 붉음을 자랑하며 천년을 살아 온 주목이 하늘을 향하고
땅에는 떨어진 낙엽도 형형색색이다.







가야동계곡 상류의 때 묻지 아니한 원시의 건강. 그것은 자연스러움이다.




마가목의 붉은 열매가 파란 하늘에 걸려있다.
파아란 하늘. 티 없이 맑은 그 마음을 닮고 싶다!





계곡의 단풍은 현란하다.
햇살도 뚫지 못하고 은은한 천연색 반조명으로 비치니
그 속으로 걸어감은 신선의 세계로 초대 받음이다.

색채의 마술,
아니 색깔의 조화.
아 ∼. 감탄할 뿐이다.












물 위에 떨어진 단풍도 형형색색.

크고 작은 폭포와 검푸른 소와 담,
골을 울리는 폭포소리와 바람소리
매끈한 암반과 맑은 물
햇살과 단풍의 고운 색깔
자연이 빚어낸 조화의 아름다움이 계곡을 수 놓고 있다.
















속세를 벗어나 물감을 풀어서 무릉도원을 물 속에 만들었으니
물 속의 별유천지(別有天地)를 넋 놓아 바라본다.

계곡의 가을은 깊어만 간다.
































승천의 때를 기다리며 누워있는 용이 숨쉬는 “와룡연”의 검푸름은 신령함이 스며있고
간절함을 기원하는 조그마한 돌탑에는 인간의 소박한 꿈이 서려있다.









불국정토를 지키는 사천왕이 무서워서 돌아서 가는데
“천왕문”을 물 속으로 걸어서 지나는 사나이는 두렵지 않는가 보다.








한 그루의 단풍나무에 빨강, 노랑, 초록이 함께 어울렸다.











외나무를 건너면서 떨어질까 조마조마한 것은 지은 죄가 많기 때문이기에
참회의 기도를 하여야 하나?
아니면 마음 속에 깃든 번뇌와 좌절을 없애기 위하여 한마음으로 정진하여야만 하나?







수렴동계곡 합수점에 예정보다 1시간 늦게 도착하니(13:45)
백운동계곡으로 올라가서 한계령으로 하산하려는 계획을 변경한다.
오후7시에 한계령을 통과하는 서울 행 막차를 탈 수 없기 때문이다.

계획을 수정하니 지금껏 억누르던 시간의 압박을 벗어나서
느긋하게 알탕을 하고 점심을 먹는다.
아까 천왕문을 물 속으로 통과 하신 강릉에 사시는 분께서 귤을 건네 주신다.
항상 부족한 나는 서로 나누는 마음을 산행을 통하여 배운다.



점심 메뉴는 주먹밥, 김밥, 라면, 쵸코파이이고
구상나무 열매주로 반주 한잔하고 후식은 귤로 푸짐하게 먹는다.

여유 있게 식사를 끝내고 수렴동대피소를 출발하여(15:00)
수렴동계곡을 따라 내려간다.
등산로 따라 많은 사람들이 하산하고 있고 이 계곡에도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영시암











귀떼기골 입구









백담사 입구에는 버스를 타기 위하여 늘어 선 긴 행렬을 보고 걸어서 내려 가기로 한다.
안내판을 열심히 읽는 키 큰 소녀,
무엇인가 궁금해 내 젊은 날에도
역사 유적 앞에 있는 안내판을 열심히 읽고 메모 하곤 했지.
그때가 그리워진다.

백담사에 오신 보살님이 해질 무렵 계곡 바위 뒤에서 목욕하는 하얀 속살을 바라 보면서
여인이 부끄러워할 까봐 가슴 조이며 숨어서 조심스럽게 계곡을 내려 가던 시절에는
모두 걸어서 백담계곡을 오르내렸다.






산줄기가 물을 만나 마지막 맥이 솟은 봉우리
휘감아 도는 물굽이는 육지 속의 섬을 만들고
이름도 고운 은선도의 아름다움을 단풍이 배가 시켰네.


















산에는 단풍이 있고
하늘에는 노을이 있네.
노을은 구름을 타고 붉게 물들고
단풍은 나뭇가지 끝에서 붉게 물들었네.

정열의 붉은 마음은 님을 향한 일편단심의 표상이며
노을은 자신을 태워서 다가올 어둠을 예고하고
단풍은 떨어져서 흙으로 돌아가 만물을 소생케 하는 밑거름이 된다.

단풍은 바람을 타고 흐르고.
노을은 구름을 타고 흐른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노을도 단풍도 태양의 빛을 받아 새악시 볼처럼 빠알갛게 피어난다.
내 마음도 함께 피어 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