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깬다.
벌써 05:17분 이다.
서둘러 짐을 꾸려 출발한다.(05:45)


동남쪽 지리산 주능선 위에 그믐달이 떠 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모습이 미인의 눈썹보다 더 아름답다.
간 밤에 반짝이던 수많은 별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고 구름이 짙게 깔려 있다.

“사각 사각”
낙엽을 밟으며 걷는다.
가을이다.
저 조각달처럼 예쁜 눈썹을 가진 여인은 누구일까?

바람이 쓸고 가는 자리에는 허전함이 남는다.
애련함이 가슴 한쪽에 자리 잡는다.
당신은 누구시길래 새벽 길을 걷는 사나이 가슴을 아리게 하는가?

동 트는 새 아침.
새벽을 여는 발걸음은 창암능선을 걷는다.
백무동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와 만나고 곧 이어 소지봉에 도착한다.(06:25)

한 밤중에 출발한 부지런한 등산객은 벌써 이 곳까지 왔다.
힘겨워 하는 친구를 독려하는 아가씨의 힘 찬 발걸음을 따라 걷는다.
자꾸 뒤쳐지는 친구를 기다리며 망바위에서 주변 경치를 감상하며
함께 휴식을 취한다.(07:11)

서울에서 온 그녀에게 우리 홈페이지를 소개하고 인터넷 주소를 알려준다.
그녀의 친구가 도착하자 다시 출발한다.
함께 걷다가 그녀에게 장터목산장 가는 방향을 알려주고 헤어진다.

창암능선을 타고 제석봉으로 오른다.
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자욱하고,
세찬 바람 속에 상고대가 활짝 피었다.












제석봉을 가로지르는 천왕봉 가는 등산로가 나타난다.(08:15)
사람들이 오고 간다.
모두 겨울 복장이지만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걷고 있는 나는 춥지 않고 오히려 땀이 맺힌다.

얼어붙은 바윗길에서는 많은 등산객으로 인하여 상당히 지체된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드디어 천왕봉이다.(09:05)




발 디딜 틈도 없는 인파로 인하여 배낭을 내려 보지도 못하고 중봉으로 이동한다.
중봉으로 가는 길은 한적하다.
곱게 핀 상고대를 감상하면서 천천히 걸어 중봉에 도착한다.(09:50)

전문적으로 사진을 찍는 사진작가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구름에 가려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천왕봉의 웅장한 모습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본다.
건너편 천왕봉 동벽의 암녹색의 깎아지른 모습은
한라산 북벽과 견줄 수 있는 위용을 자랑하면서 우뚝 솟았다.

우리 민족의 정기가 발원되는 곳,
백두대간을 따라 전국 방방곡곡으로 민족 정기가 퍼지는 진원지.
백두산을 생각하며 지리산을 바라본다.









 


멀리 반야봉이 희미하게 보이고 발 아래는 칠선계곡이 펼쳐져 있다.


























상고대 터널 속으로 걷는다.
거역 할 수 없는 자연의 변화에 경외감을 느끼며 하봉 헬기장에 도착한다.(10:30)
아침을 먹기 위하여 샘터로 물을 뜨러 동쪽으로 내려간다.
샘터 파이프에는 물이 나오지 않고 샘터에 고여 있는 물을 받아서 되돌아간다.
헬기장까지는 약 100m 정도의 거리이다.

헬기장에는 조금 전에 중봉에서 만났던 건장한 청년이 후미를 기다리고 있다.
남자2명, 여자2명 모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들에게
구상나무주 한 잔을 권하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사진 작가을 비롯한 그들도
중봉에서 비박을 같이한 인연으로 함께 산행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일반인은 사진을 사실의 기록으로 생각 하지만
전문가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창조하는 예술로 인식한다.

그들은 먼저 떠나고 혼자 남아 쓸쓸하게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출발한다.(11:47)
하봉을 지나 깍아지른 바위봉인 소년대에 올라 사방을 굽어 보면서
500여년 전 점필재 선생께서 위민을 생각하며 선비의 자세를 가다듬은 심정을 느끼고자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한참이나 지리산에서 지리산을 바라본다.


중봉


하봉








초암능선 갈림길을 지나 국골갈림길에 도착한다.(12:37)
이제는 방향을 동쪽으로 바꾸어 동부능선을 타고 걷는다.
완만한 능선길을 걸으면서 뒤돌아보면 서북쪽으로 향운대가 뚜렷이 보인다.

몇 년전 지리산 10臺를 찾아서 하룻밤씩 묵는 산행을 할 때
향운대에서 떨어진 술을 아쉬워하면서 마지막 남은 손아귀에 쏙 들어오는 조그마한 술병의 양주로
한 방울 한 방울씩 나누어 마시면서 긴 밤을 지세우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 기록의 일부를 옮겨본다.

~ 전략
모닥불을 피운다.
연기가 난다.
눈물이 핑 돈다.

소망이 불꽃처럼 활짝 피어나라고 기원하면서 잔 가지를 토막 내어 한 개씩 태운다.
양주 한 방울을 혀에 떨어뜨리고 혀 끝을 오므리어 굴린다.
혀 바닥을 흐르는 감미로운 촉감,
코 끝을 자극하는 은은한 향기에 콕 쏘는 독함,
작은 양의 고마움을 만끽하면서 酒仙의 경지를 상상한다,

모닥불의 밝음과 가스등 심지의 새빨간 불빛이 감싸는 바깥은 캄캄함 뿐이다.
허공에 날리는 불티 하나는 이내 어둠 속으로 사그라지지만
또 하나가 허공 속으로 빛을 발하며 사라진다.
온 몸을 태우며 빛을 발하는 불씨의 뜨거운 마음은 누구를 향한 向念인가?

소년의 설레는 마음을 소녀는 알기나 하는지 안타까움에 까만 재만 쌓여간다.
순수함과 순결함은 아름다움이다.
한 방울의 술을 나누어 마셔도 취기는 점점 높아만 가고
사랑이 맴도는 우리들의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간다. ~ 후략


지리산 十臺를 찾아 –첫걸음


지리산 十臺 !

그 절반을 찾아 가을로 떠나 갑니다.
바람이 스치듯
구름이 흘러가듯

허허로운 발길은
보이지 않는 향기를 찾아
지리의 품 속을 헤매일 것입니다.


지리산 十臺를 찾아 - 둘째 걸음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용솟음치고
음양의 조화는 태극을 이루어 생명을 잉태하는 곳
지리산 十臺 !

그곳을 찾는 속인의 집념이 부질없음을
성인은 집착을 버려라(無着)고 일깨워주지만
해탈의 경지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중생은 자신의 존재 확인을 위하여

덧없는 발길로
보이지 않는 지혜의 빛을 찾아
또다시 지리의 품 속을 헤매일 것입니다.


지리산 十臺를 찾아–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지리산 !

텅빈 계곡
노오란 은행나무 잎
바람에 날리는 낙엽은 울긋불긋 온 세상을 뒤덮고

가을로 빨려던 남자는
시공을 초월하는 3차원의 세계로 유체이탈 하는 진경을 체험한다.
지리의 신령스러움인가?
기(氣)의 세계로의 입문인가?
조그만 변화에도 마음이 열리면 참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데 ……

허무한 발길은
보이지 않는 영원을 찾아서
지리의 세계를 기웃거릴 것입니다.
~

아련한 추억이 가물거리는 향운대를 뒤돌아 보면서 산죽을 헤치며 걷는다.
“사르르 사르르”
열리는 산죽 속으로 몸이 빨려 들어간다.
나의 존재는 사라지고 길에는 산죽뿐이다.

배낭을 내려 놓고 빈 몸으로 독바위로 올라간다.(13:40)
바람이 세차게 분다.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까 무서워 한 발을 내딛기가 두렵다.







멀리 천왕봉은 구름에 가려지고 북쪽 허공다리골은 단풍의 붉음이 처연하다.
비장한 아름다움이 한 줄기 햇살에 빛난다.
몸이 바람에 날리어 갈 것 같아 서둘러 독바위에서 내려온다.

배낭을 메고 걷는데
아뿔싸! 독바위를 올라갈 때 거추장스러워 지도를 바위틈에 끼워둔 것을 그냥 왔다.
다시 배낭을 내려 놓고 독바위로 가서 지도를 찾아 온다.

급할수록 서두르지 말고 침착하게 행동 하여야 하는데
보잘것없는 육신이 바람에 날리어 가는 것 같은 두려움에
허겁지겁하는 하는 모습이 나의 실상인 것을 어찌하라.

쑥밭재를 지나 새봉에 올라 이곳으로부터는 동부능선을 작별하고
북쪽으로 사립재를 향하여 내려간다.
오봉리로 하산하는 표시리본이 달려있는 사립재를 지나 계속 북쪽 능선으로 진행한다.
상내봉과 함양 독바위로 갈라지는 봉우리에 올라 가서 쉰다.(14:50)

오늘 날씨는 참 변덕스럽다.
흐렸다 개였다 지금은 얼음알갱이까지 떨어진다.

서둘러 배낭을 메고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상내봉으로 간다.
크다란 배낭을 메고 힘들게 상내봉 정상에 올라 사방을 조망한다.
흐린 날씨에 단풍의 색깔은 빛을 잃었지만 그래도 알롱달롱 온 산을 수 놓고 있다.




오른쪽 능선 위에 솟은 바위는 함양 독바위(노장대)



유장한 벽송능선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여기는 빨치산 루트로 등산로가 산책로처럼 잘 정비되어 있다.
바위 틈과 산죽 속에는 군데군데 바위비트와 산죽비트를 재현시켜 놓았다.












꽃 잎이 떨어지고
단풍이 날리는 이 땅 위에 쓰러져 간 죽음.
가슴 속에 간직 된 간절한 소망.
그것은 무엇이었나?
핏발 선 붉은 눈망울로 찾으려고 한 것은 정녕 무엇이었단 말인가?

이 산야에 뿌려진 붉은 향연.
그것은 흥겨운 잔치가 아니다.
못 이룬 꿈을 안고 쓰러져 간 젊은 죽음을 생각하며
옷 깃을 여미고 경건한 마음으로 명복을 빈다.

아! 대한민국!
자유! 평등! 함께 잘 사는 사회.

하나된 민족.
서로 돕고 정을 나누는 이웃.

자유의 하늘아래
평등의 들판이 펼쳐지고
푸른 보리의 물결 따라 평화가 넘실거리며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

새 세상에 대한 염원과 결의로 치열한 삶을 불꽃처럼 살다 간
그 정신만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파르티잔 그들은 누구인가?
물론 소수의 선각자와 새로운 이념에 대한 교육을 받은 엘리트가 조직을 이끌어 가지만
대다수는 피를 함께 나눈 혈연적 기반 위에 공동체 삶을 함께 살아 온
지연적 연고에 의하여 이념보다는 인간의 정리(情理)에 이끌러 입산 한 것이다.

시대상황은 비관적이었지만 그들은 지리산이라는 지리적 특성을 활용하여
생존을 위하여 몸부림 쳤던 것이다.
그 흔적을 어루만지며 상념에 잠긴다.

휘몰아치는 광풍의 소용돌이 속에 매복을 하고 기다리는 국군도
쫓기는 절박한 상황에서 능선을 넘는 처절한 생존의 본능에 떠는 파르티잔도
살을 에는 추위가 두터운 옷 속의 육체도, 헐벗은 몸둥아리도 핥이기는 마찬가지이리.

캄캄한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친다.
공포와 불안이 교차되는 순간
죽음과 죽임의 찰라.

두 눈 속에 하늘이 있다.
인간에 대한 사랑.
민족의 동질성. 이념을 초월하는 따뜻한 형제애.

입가에 퍼지는 보일 듯 말듯한 미소.
믿음!
서서히 총부리를 거두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한 방의 총성도 울리지 않고 새 날은 밝아온다.

아! 지리산!
지리산은 알고 있다. 묻혀진 사연과 사랑을.

피의 흔적은 붉은 단풍에 비장함이 스며있음을 느낀다.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우리들 이웃이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생명을 담보로 처절한 삶을 살아간
그들의 생활도 다양한 삶의 한 형태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파르티잔”이라는 단어에 묘한 연민 뿐만 아니라 매력을 느끼곤 한다.
산을 타면서 시간에 쫓길 때나 어려운 상황에 빠질 때
“파르티잔 그들은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할 것인가?”
그들의 행동 양식을 상상 하면서 현실의 위험을 슬기롭게 헤쳐나가고자 한다.




그대와 함께 두 손을 꼬옥 잡고 걷고 싶은 오솔길을 따라
내 작은 가슴 속에 지리산을 조금이라도 담고 싶어
천천히 천천히 걸어서 백송사에 도착한다.














종루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가을인데 어찌 가슴이 이리도 답답할까?
이 길로 스님의 길로 찾아 갈까?
저녁 예불을 알리는 목탁소리에 두 손을 모으고 합장한다.
내 죄를 어찌 하여야 하나?



한 인간의 정성과 집념의 결실인 서암을 둘러본다.
속인은 자신이 작고 보잘것없음을 절실히 느끼며 묵묵히 추성리 삼거리로 내려간다.
지금 시간은 17:30분.

기다린다.
어둠이 짙어 가는데 함양 행 버스가 도착한다(17:50)
버스에는 승객이 아무도 없다.

공허!
어둠은 공허를 더욱 뚜렷하게 하고
이번 지리산 산행은 알 수 없는 공허함만 안고 돌아간다.



벽송사 장미 한 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