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음산 산행기 (051029)

 

   오늘의 목적지는 경북 상주시 외서면, 내서면에 위치한 노음산(일명 노악산), 남편의 말로는 늦가을의 정취를 듬뿍 담고 있는 산이라 한다. 이번 가을에는 단풍구경이라도 한 번쯤 가야하지 않겠느냐고 하더니 단풍보다는 가을의 정취 쪽을 택하였다는 것이다.

  

   아침 9시쯤 집에서 승용차로 출발하여 대전 톨게이트를 지나 경부고속도로 하행선으로 영동까지 가서 국도를 타고 상주로 넘어간다. 예전에 경천대를 갈 때는 계속 고속도로만 이용하였는데 이번에는 국도를 이용한다. 국도로 길을 잡은 것은 너무나 탁월한 선택이다. 출발할 때 고속도로를 타면 읽을 생각으로 김훈의 ‘개’를 챙겼지만 차가 영동을 지나 국도를 달릴 무렵 이내 도로변에 펼쳐지는 단풍의 향연에 사로잡혀 책은 뒷자리로 던져버린다.

  

   아, 가을이다. 만산이 붉게 혹은 노랗게 화장을 하였다. 진한 단풍이 젊은 화류계 여자의 화장이라면 우리의 온 산하를 물들인 단풍은 엷으면서도 기품 있는 여염집 안방마님의 화장에 비유할 수 있을까? 아무튼 길 떠난 나그네의 마음을 사로잡아 놓아줄 줄을 모른다. 게다가 그 가로수들. 어디서부터인가 빨갛게 불타는 단풍나무 가로수(단풍나무 가로수는 처음 보는 것 같다)더니 또 어디서부터인지는 노란 처녀 저고리 같은 은행나무 가로수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산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냥 취해버렸다.  몽롱한 가운데 어느덧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좌회전하여 남장사 입구에 도착한다. 집에서 출발한지 약 1시간 30여분 만이다.

   

   늦가을의 정취를 담뿍 느낄 수 있는 산이라더니 들어가는 입구부터 심상치가 않다. 노음산은 남장마을로부터 약 200여m 정도 떨어져 있는데 남장마을 사이로 난 길을 통하여 그 입구에 다다를 수 있다. 그런데 위 마을에는 온통 빨갛게 익은 감을 주렁주렁 매단 감나무들로 가득 차 있고, 집집마다 감을 깎는 아주머니들로 분주하며, 이미 깎은 감은 실로 나란히 꿰어 빼곡히 줄에 매어 놓았다. 그야말로 마을 전체에 가을이 가득 내려와 앉아 있다.

  

   노음산 등산은 남장사 아래 저수지 부근에서 시작되므로 남장사 조금 못 미치는 곳에 차를 대고 다시 마을 쪽으로 약간 내려오니 들머리에 석장승이 하나 서 있다. 왕방울 같은 눈과 주먹코(영락없이 우리 남편의 코다), 꾹 다문 입술 사이로 익살스럽게 삐져나온 송곳니, 그리고 전체적으로 삐뚜름한 얼굴 구도가 우스꽝스러운 인상을 준다. 만화책에 나옴직한 유머러스한 모습이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면 부리부리한 두 눈이 살아있는 듯 사람의 심중을 꿰뚫어보는 것 같고, 조금 떨어져서 보면 고개를 비스듬히 꼬고 혼자 서 있는 모습이 볼수록 매력적이다. 장승 왼쪽의 기록에 의하면 1832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현존하는 석장승으로는 형태가 특이한 우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단다. 장승의 코를 갈아서 물에 타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설 때문인지 큰 코가 뭉툭하도록 닳아 있다. 나도 옛날 제주도 신혼여행을 추억하면서 장승의 코를 잡고 사진 한 장을 찍는다.

  

 

(매력적인 석장승의 모습)

 

   곧바로 산 위를 향해 나 있는 호젓한 등산로를 따라 산으로 들어간다. 오늘의 코스는 <석장승→옥녀봉 삼거리→전망바위→정상→남장사>로 총 7km 정도이고 산행시간은 대략 3시간 정도로 잡는다.

  

   30분쯤 숲을 따라서 난 완만한 경사길을 오르니 주능선이다. 산 아래서 산 위를 보면 단풍이 단아하게 물들었는데 막상 숲 속으로 들어오니 단풍이 사라졌다. 그리고 뭔가 쓸쓸하고 애잔한 분위기를 띠고 있을 뿐이다. 주능선에 이르는 오르막길은 그저 쉽게 오를 수 있는 평범한 산길이다. 그런데 주능선에 접어들면서 온통 바닥이 나뭇잎으로 덮여 있다. 발에 밟히는 감각과 소리를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이성계가 남해 금산에 비단을 둘러주라고 했다지만 노음산은 마치 온 산을 낙엽으로 덮어버린 것 같다. 이 산에는 유독 참나무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들도 대부분 참나무 잎이다.


   남편이 앞에 가면서 구루몽의 시 “낙엽”을 읊는다.


   “나뭇잎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은 아주 부드러운 빛깔, 너무나도 나지막한 목소리, 낙엽은 너무나도 연약한 대지 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황혼이 질 무렵 낙엽의 모습은 너무나도 슬프다. 바람이 불면 낙엽은 속삭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소리, 여자의 옷자락 소리.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 되리라. 가까이 오라, 벌써 밤이 되고 바람은 우리를 휩쓴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은 소리가?” 


   낙엽으로 살포시 이불을 깔아놓은 것 같은 참나무 능선을 따라 걸으면서 읊조리는 구루몽의 싯귀들이 이 분위기에 딱 어울린다. 발밑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낙엽이 밟혀 바스락거린다. 그렇게 낙엽을 밟으며 20분쯤 걸었을까? 어느새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서 있다. 울창한 숲 사이로 왼쪽 편에 깎아지른 암벽 지대가 보이고 그 위로 우뚝 솟은 주봉 일대가 모습을 나타낸다. 뒤를 돌아보니 상주 시내가 한 눈에 보인다. 나뭇잎 하나가 나비처럼 바람에 하늘거리며 날아간다. 어디까지 올라가나 계속 보고 있으려니 하늘 끝까지 날아가 보이지 않게 된다. 나뭇잎이었는지 한 마리 나비였는지 아니면 새였는지 순간 분간할 수 없다. 다시 앞 봉우리에 올라서면 나무에 둘러 싸여 전망은 막혀 있고 앞뒤로 갈림길이 있다. 바로 옥녀봉 삼거리다. 석장승부터 이곳까지 1.8km라는 표시판이 있다.

   

   그곳에서 약 30분쯤 올라가면 암봉으로 이루어진 전망바위다. 오랜만에 전망이 탁 트인다. 전망바위 위에 서니 왼쪽으로 북장사가 저 아래로 내려다보이고 우측으로 남장사 지붕들이 보인다. 온 산이 울긋불긋 단풍으로 아름답다. 다시 기운을 내서 쇠사다리를 올라 약간 더 가니 정상이다.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남장사를 둘러싼 풍경)

 

   정상에는 직사각형의 커다란 표지석이 있다. 노음산(露陰山, 725.4m), 상산 삼악의 하나로 일명 노악(露嶽)이라고도 하며 상주의 서쪽을 진호하는 산이란다. 여기에서 비로소 노음산의 한자를 알았다. 그 표지석을 보고. 露陰 - 이슬의 그늘,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투명한 이슬에 무슨 그늘이 있을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이 산을 노악산이 아닌 노음산으로 기억하고 싶다.

  

   표지석을 앞에 두고 옆으로 쓰러진 나무 위에 앉아 점심을 먹는다. 오늘은 보온병에 커피도 타 왔다. 정상에 앉아 나누어 먹는 커피 맛은 쓰지 않고 달기만 하다. 우리 삶도 이런 맛이었으면. 노음산 정상에 앉아 남편과 한 모금씩 나누어먹는 달콤한 커피 맛이었으면. 우리 사랑도 늙어 죽을 때까지 이런 기분이었으면. 노음산 정상에 앉아, 시리도록 푸른 가을 하늘 아래 앉아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온 몸을 맡긴 채 나누어 마시는 커피 맛이었으면. 

  

   환상에서 깨어나 정신을 가다듬은 다음 하산한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올 때의 길과는 다른 분위기다. 낙엽은 사라지고 자갈만 남아있다. 미끄러질 듯한 길을 지그재그로 힘주어 내려오다 보니 중궁암이라는 조그만 암자가 나온다. 암자 마루 위에 스님이 한 분 앉아 감을 깎고 있다. 지나는 길손에게 눈길조차 한 번 주지 않는다. 떠들면 혼날까봐 살살 마당을 건너 나오고 만다. 그 후로는 길이 넓고 좋다.

  

   이윽고 관음선원을 지나 남장사 뒷문에 도착한다. 문 앞에 있는 키 큰 은행나무는 이미 물들대로 물들어 노란 빛이 찬란하다. 남장사는 신라 흥덕왕 7년(832) 진감국사가 창건하면서 장백사라 했는데 고려 명종 때(1186) 원각화상이 현 위치로 옮기면서 남장사라 개칭하였다. 남장사 보광전에는 철조 비로자나불(보물990호)과 철불 좌상의 후불탱인 목각탱(보물922호)이 있는데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목각탱이다. 안내판에는 전국에 6개 밖에 없다고 한다.


  

(남장사 보광전)

 

   보광전에서 목각탱을 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후두둑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바라보니 보광전 옆 은행나무 위로 아저씨 한 분이 올라가서 나무 아래 넓은 막을 받쳐 놓고 은행을 털고 있다. 발을 한 번 구르니 은행과 은행잎이 후두두둑 떨어진다. 은행나무 밑이 온통 은행과 은행잎으로 노랗다. 은행나무 위로 올라가 은행을 터는 풍경은 처음 본다. 결실과 평화가 어우러진 넉넉한 모습이다.


   남장사 일대는 늦가을 정취가 인상 깊은 명승지로서 `경북 8경'의 하나로 손꼽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남장사와 남장사를 둘러싼 풍광이 더없이 아름답다. 노음산은 의외로 아름다운 산인데도 그다지 알려지지 않아 등산객이 많지 않다고 한다. 실제로 우리도 오늘 산에 올라 만난 사람이 대여섯 명쯤 밖에 되지 않는다. 사람이 많지 않은 산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가보길 권유하고 싶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혼자서 몰래 간직하고 싶은 마음마저 들기도 하는 산이다.


   남장사 방문객들은 그 동안 대부분 자동차를 이용해 왔으나 폐교된 남장초등학교 부지에 자전거 박물관이 들어선 이후 자전거를 타고 절까지 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한다. 박물관에서 무료로 자전거를 빌려주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박물관 앞 주차장에 세워놓고 2㎞정도 떨어진 남장사까지 자전거 하이킹을 하는 것이다. 우리도 돌아오는 길에 잠깐 박물관에 들렀는데 자전거 형상을 한 특이한 건물 안에 이색적인 자전거가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상주의 명산과 명찰을 총칭하는 말로 삼악(三嶽), 사장사(四長寺)라는 말이 있는데, 상주의 명산 삼악은 상주 서편의 노악(노음산), 남쪽의 연악(갑장산), 북쪽의 석악(천봉산)을, 사장사는 노음산의 남장사와 북장사, 갑장산의 갑장사와 승장사를 말한다고 한다. 충청북도 괴산군에 산이 많다지만 상주도 산이 많은 고장인 모양이다. 남편은 언젠가는 갑장산도 천봉산도 다 오를 거라고 하는데 오늘 그 중 한 산과 한 절을 다녀온 것이다.

  

   낙엽 깔린 오솔길을 따라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 산이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아 좋았다. 세파에 몸을 맡겨 괴로움이 있거든 언제나 찾아와 나에게 의지하라는, 그래서 모든 것을 두고 가뿐한 마음만 가지고 가라는 상냥한 말을 걸어오는 산. 나는 산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는데, 늘 산은 내게 많은 것을 준다. 나도 남에게 그런 산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