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로는 계곡을 버리고 능선으로 이어져 있다.
우리는 능선으로 나 있는 등산로를 따라 된비알을 오른다.
서늘한 기운이 감돌지만 햇살은 마지막 여름의 열기를 뿜어내고,
거친 숨소리와 함께 맺히는 땀방울.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을 연신 훔친다.

 

망대암산으로 뻗어가는 지능선 분기점에 도착하자 능선은 유순해진다.
걷기가 한결 편하다.
오후의 햇살은 나뭇잎이 다 막아 내지 못하고 살짝 살짝 비치는데,

 

여인의 낭랑한 웃음 소리는 햇살에 부서져 날리고
작은 발꿈치가 밟는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는 심금을 울린다.
못 본 척, 못 들은 척, 모르는 척, 무심한 척 …….
아무리 태연을 가장 하여도 미세한 떨림은 숨길 수가 없다.

 

고개를 숙여 땅을 보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생각하는 갈대인양 사색에 잠긴다.
인연은 무엇인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 풀리지 않는 화두를 안고 걷는다.

 

 

또 다시 하늘을 보고 땅을 본다.
이번에는 참나무에 노루궁둥이 버섯이 보인다.
인연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도 눈 앞에서 횡재를 한 기분이다.
님과 함께하는 우리들의 좋은 저녁 반찬이 될 것이다.

 

 

망대암산을 지나 점봉산으로 올라가다가 나타나는 샘터 입구에서
박너물님과 기수님 진가락님을 만난다.
반갑게 인사하며 두 손을 잡는다.
점봉산에 숨겨둔 우리의 배낭을 발견하고 오후 내내 기다렸다고 한다.

 

그들은 내일 일출을 보기 위하여 점봉산에서 비박을 할 것이라고 한다.
힘들어 갖고 온 맥주를 한 잔씩 나누어 준다.
땀 흘린 후에 마시는 시원함이란 감로수가 따로 없다.

 

뿐만 아니라 닭백숙에 넣기 위하여 기수님으로부터
소금과 만삼 서너 뿌리와 엄나무 가지 한 조각을 얻고,
헤어지기 아쉽지만 우리는 단목령으로 하산한다.

 

경사가 심한 내림길을 내려 가는 데 무릎에 통증이 온다.
지난 8월달 지리산 태극종주를 무박으로 무리하게 강행한 탓인지
무거운 배낭을 메고 하산하는 충격에 오른쪽 무릎이 아파온다.
천천히 걷는다.

 

마음과 육체의 아픔.
인내와 기다림.
생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이 가을 왜 자꾸만 해답 없는 상념만이 떠오르는지 알지 못한다.

 

등산로는 몰라보게 뚜렷해졌지만 홍포수 막사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계속 내려가면 나타나는 오색으로 하산하는 갈림길에서 웅산님이 기다리고 계신다.
태양은 서산으로 기울며, 산 그림자는 짙어지고 어둠이 시작되므로
“단목령은 포기하고 너른이골 상류에서 야영을 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으신다.

 

찬성이므로 은희씨는 후미를 안내하기 위하여 기다리기로 하고
웅산님과 함께 너른이골로 먼저 내려간다.
물이 흐르는 적당한 장소를 찾아 짐을 풀고 야영 준비에 들어간다.

 

잠자리 준비가 끝나자 후미가 도착하고 저녁을 준비하고 모닥불을 피운다.
이곳은 물이 가까이 있으니 마음대로 씻을 수 있기 때문에 편리하고,
바람도 없는 안온하고 포근한 곳이다.

 

부재료가 좋은 때문인지 어제 저녁과는 비교할 수 없는 닭백숙이 익어가는 구수한 냄새는
지난 밤보다 훨씬 여유를 갖게 한다.
한 숟갈 떠 먹은 국물 맛이 일품이다.

 

맛있다! 뽀얀 보약을 먹는 기분이다.
금방이라도 살이 포동포동 찔 것 같은 느낌이다.
귀한 부재료를 제공해 주신 기수님 고마워요.
정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날씨는 맑아 밤 하늘에는 하나 둘 별이 뜨고,
숲 속 나뭇가지 사이에서 반짝반짝 빛난다.
소리없이 흐르는 별빛에 내 마음도 흘러 보낸다.

 

한 잔의 술 잔에 별이 스미고
한 잔의 술 잔에 풀벌레 소리가 장단을 맞추니
끓는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자신의 뜻을 알리기 위하여 멱라수에 투신한 굴원도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한 이태백도 그리워진다.
아! 사랑의 강물에 빠지고 싶다.

 

아침이슬의 영롱함을 바라보며 풀잎에 맺힌 이슬의 향기는 못 맡지만
운우(雲雨)의 애절함은 느낄 만도 하다.
풍류 속에서 사랑을 꽃 피운 선인들의 삶을 그리워하며
자연 속에서 인간의 순수을 생각한다.

 

오늘은 이번 산행의 마지막 날이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이슬 맞으며 산행을 시작한다.
갈대 숲을 지나고 개울을 건너고 오솔길을 따라 호젓하게 걷는다.

 

녹색 잎은 아직도 싱그러움을 자랑 하지만
이제 빨갛게 물들기 시작하는 단풍은 수줍은 듯이 다소곳하다.

 

 

 

 

붉은 마음.
그것이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당신의 손길을 느낍니다.

 

 

여울져 흐르는 계곡물은 하얗게 속내를 드러내고 있지만
인간은 왜 속내를 드러내기가 그렇게도 힘드는가?
타인의 이목, 사회적 체면, 경제적 실리, 도덕적 갈등 …….
그 무엇이 어렵게 하는가?

 

 

사람이 계곡에서 살면 俗人이고
산에서 살면 仙人인가.
자신을 옭매는 굴레를 숙명이라고 체념하면서 살아야 하나?

 

떠나는 자 풍경소리에 아련함을 새기고
남는 자 풍경소리에 기나 긴 기다림을 새긴다.
헤어지고 만남이 인연이라 하지만 인생은 의지의 반영이다.

 

 

삼거리 직전 계곡에서 알탕을 하고 옷을 갈아 입은 탓에 기분이 한결 가뿐하다
설피민국에 도착하여 하산주로 캔맥주를 마시면서
끝이 없는 설피민국 추장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의 나머지는 다음으로 남겨두고
우리는 떠난다.

 

맑은 물.
푸른 하늘.
상쾌한 공기
소중한 것을 가슴에 새기며.

 

내촌면 시냇가에 있는 정자에서 차를 세우고 점심을 먹고 가기로 한다.
나그네를 위한 현대판 정자는 쉼을 위한 실용적 기능은 동일할지라도
자연과 조화되는 운치는 모방되지 않는구나.

 

맥주 한 잔, 소주 한 병.
한 잔의 술로 언짢음을 잊고 즐겁게 살자꾸나.

 

 

서울로 돌아오는 길도 이리 구불 저리 구불.
계곡의 흙탕물은 이틀 사이에 맑은 물로 변하여 흐르니
무심한 것 같아도 깨끗하게 간직 하려는 자연의 자정능력에 감탄한다.

 

길섶에서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의 연약함 따라 흔들리는 여린 마음을 싣고
이제 피어나는 아름다움도
절정의 원숙한 아름다움도
시들어 가는 아름다움도 시간과 함께 하며 스쳐간다.

 

유행가는
♬∼♪인생은 나그네 길 ♪ 정일랑 두지 말고 미련도 두지 말자♬∼♪
라고 노래하고 있지만 인간이 어찌 정과 미련을 끊고 살 수 있으라.

 

무엇이 일상이고 무엇이 특별함인지는 알 수 없어도
농담 속에서도 하고 싶은 말이 숨겨져 있을 수 있고
일상적인 행동 속에서도 숨겨진 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단초는 드러나기 마련이다.

 

구름이 가는 방향을 알 수 없듯이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은
흐르는 시간 속에 차곡차곡 쌓일 것이다.

 

 

한 밤중 알지 못하는 여인으로부터 받은 문자 메시지 “미련”
잘못 걸려온 것이라 할지라도 “화해” 라는 답장을 보낸다.
산행을 하면서 사랑을 배우고 글을 쓰면서 사랑을 음미한다.

(원문 게제: www.sanga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