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숭산, 주산 종주 산행기 (051112)

                 

   어제 회사에서 개최한 북한산 등반대회에 선수로 출전했다 하산하는 길에 넘어지는 바람에 얼굴을 다쳤다. 북한산은 내가 참 좋아하는 산인데 시합이라 나무 한 그루, 바위 하나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속보로만 걸었던 탓이다. 게다가 지난주에는 감기가 너무 심해 산행도 한 주 쉬고, 운동도 며칠 쉬었더니 몸이 무거워 잠시 망설였으나 집에 있으면 침대에서 하루 종일 낮잠이나 잘 것 같아 남편을 따라 나선 시간이 아침 9시다.

  

   남편은 목적지를 출발하는 순간까지 알려 주지 않는 독특한 버릇이 있는데 아마 본인도 운전석에 앉아 출발하기까지 목적지를 결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오늘의 목적지는 경북 고령에 있는 미숭산이라고 한다.

  

   미숭산(美崇山)은 경북 고령군 쌍림면과 경남 합천군 야로면에 걸쳐 있는 높이 757m의 산으로 고령읍의 주산(主山, 310m)과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어 두 산을 함께 종주할 수 있다. 미숭산은 고려 말 이성계에게 끝까지 저항하여 지조를 지킨 정몽주의 문인(門人)인 안동장군 이미숭(李美崇)이 근거지로 삼은 곳이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뒤 불러 청하였으나, 이에 불복하면서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켜 대항하였다. 그러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장군은 순절하였다. 원래 이름은 상원산(上元山)이었으나 장군의 절개를 기리는 뜻으로 그 이름을 따서 미숭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미숭산 자락에는 고찰 반룡사(盤龍寺)가 자리잡고 있다.

  

   남편은 원래 대가야 유물전시관에서 출발하여 주산에 오른 뒤 약수터 및 청금정을 거쳐 미숭산 정상에 도착하고, 다시 되돌아 내려와 반룡사로 하산하는 것으로 산행계획을 잡고 있었는데 오늘은 나의 컨디션을 고려하여 반룡사에서 미숭산에 올랐다 다시 반룡사로 돌아오는 정도로 산행을 할 것이라고 한다.


   대전에서 김천을 거쳐 고령까지(중간에 김천 시내에서 잠시 우왕좌왕하여 10분쯤 시간을 까먹었다), 그리고 넓지는 않지만 제법 잘 닦아놓은 반룡사 입구 주차장까지 꼭 2시간 30분이 걸렸다. 차에서 내리는데 허벅지마저 뻐근한 것이 예감이 별로다. 절은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데 그저 바라만 보아도 불심이 절로 나는 아담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이다.


   차 속에서 남편이 건네준 자료에 따르면 미숭산 등산로는 고속도로와 같다는 표현이 있다. 고속도로라는 표현이 그대로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등산로 초입부터 어쩐지 순한 산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길이 좋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군데군데 나무에 송이채취를 금지하는 경고장을 붙여 놓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산에 소나무가 진짜 많이 있어 아는 사람이라면 송이라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온 산은 낙엽으로 덮여 있고, 발바닥에 느껴지는 촉감도 흙의 부드러움뿐이다. 또한 등산로는 숲이 좋아 등산길 내내 그늘이 이어져 여름철이면 여성들의 고운 피부가 그을릴 염려가 없어 인기가 있는 곳이라고 한다. 컨디션만 좋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은데 내딛는 발걸음이 무겁기는 하다. 그렇게 계곡을 지나 30분 정도 오르막길을 올라가니 주산과 미숭산의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잠시 쉰 다음, 길을 왼쪽으로 잡아 올라간다. 이제 11월 중순. 날씨는 바람 한 점 없고, 남쪽이라 그런지 햇볕도 따스하다. 하늘은 그저 파랗기만 하고, 나무들 사이로 난 길은 외줄기로 돌 하나 없이 부드러운 흙과 낙엽으로 덮여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길에서 내려오는 한 남자를 만난 외에는 아무도 없다.

  

   이쯤 되니 어쩐지 몸 상태도 좋아지는 것 같다. 어쩌면 노래라도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다. 길은 결국은 오르막이라 할 수 있지만 경사를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완만하다. 이런 길이라면 뛰어가는 것도 가능하겠다. 그렇게 한참을 가니 나무가 없는 빈 공터가 나타나고 그 곳에 양쪽으로 나누어진 커다란 바위가 있다. 그 틈새를 지나 또 한참을 올라가니 정상을 800m 가량 앞 둔 지점의 나무에 철쭉단지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그 때부터는 길 양쪽이 온통 나보다 훨씬 큰(약 2m 정도씩은 되나보다) 철쭉 일색이다. 그 철쭉 사이로 난 좁은 길은 언제 끝이 날지도 모를 만큼 길다. 넓이도 무려 50㏊나 된다고 한다(철쭉은 고령군화라고 한다). 뭐랄까! 눈을 감고 온통 철쭉꽃으로 가득한 봄을 상상해본다. 생각만으로도 그 화려함이 온 몸에 전해져 오는 것 같다.


   남편도 연방 감탄을 하면서 봄에 다시 오자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무수한 ‘꽃이 피면 이곳에 다시 와보자’라는 약속을 하였던가! 그 약속을 한 번이라도 지킨 적이 있었던가! 그러므로 나는 안다. 철쭉꽃이 피면 이곳에 다시 오자는 남편의 다짐이 거의 지켜질 수 없는 약속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이다. 꽃으로 가득한 철쭉 단지를. 철쭉 단지는 거의 정상까지 이어져 있다.


   드디어 정상이다. 예쁜 정상 표지판이 서 있다. 삼각점 부근에는 무덤 하나가 있다. 그 무덤 옆에 앉아 점심으로 빵을 나누어 먹고 사방을 둘러본다. 이곳 고령은 우리가 생전 처음 오는 곳이지만 산 위에서 쳐다보니 온통 산 첩첩이다. 산이 너무 많아 몇 겹인지도 모르겠다. 그야말로 첩첩산중 아닌가!

  

   정상 주변 합천 쪽에는 삼국시대에 축조되어 조선시대까지 이용되었다는 미숭산성의 성문과 성터가 남아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곳까지는 가보지 않고 바로 하산하기로 한다. 하산하면서 보니 왼쪽으로 가야산이 가야의 건국신화를 말없이 간직한 채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그전에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가야산이라는 이름에서 역사가 느껴진다.


   등산길도 완만하였지만 하산길 역시 완만하다. 나는 듯 달려 내려오니 어느새 주산과 반룡사로 갈라지는 갈림길이다. 이제 몸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어 어쩐지 더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남편에게 우리가 언제 다시 올 수 있겠느냐면서 이왕 온 것 주산까지 내쳐 가보자고 하였더니 남편은 내 얼굴과 주산으로 가는 길을 번갈아 보면서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주산 쪽 등산로로 길을 잡는다. 미숭산에서 주산까지의 전체 거리는 약 8km인데 이미 3km 이상을 내려왔고, 아마도 주산이 미숭산보다 낮으니 계속 내리막길일 것이라는 기대감이 결정하는데 한 몫 하지 않았을까?


   길은 경사가 거의 없는 완만한 내리막길이고 미숭산처럼 부드러운 흙길이다. 속도를 한층 내서 달리다시피 걷는다. 길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중간에 반룡사로 내려가는 아주머니 4사람을 만난 외에는 역시 지나는 등산객이 거의 없다.

   

   한참을 구불구불 걸어가다 약간의 계단길을 오르니 청금정(廳琴亭)이라는 이름을 가진 팔각정이다. 청금정은 악성 우륵 선생이 대가야 가실왕의 명을 받들어 가야금을 만들어 연주하던 속칭 ‘정정골’ 마을(고령읍 쾌빈3리)이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가야금 소리가 울린다는 뜻에서 위와같은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청금정에 올라 우리가 걸어온 능선을 바라본다. 남편이 팔을 들어 우리가 어느 곳에서 어떤 경로로 걸어왔는지 설명해 준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길고도 긴 여로라는 생각이 든다. 문득 바람결에 우륵 선생이 탔다는 가야금 소리가 들린 듯하기도 하다.


(청금정에서 돌아본 미숭산 정상)

  

   그런 착각을 뒤로 하고 아담한 소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길을 따라 내려가니 약수터가 있는 넓은 주차장이다. 그곳을 지나 철쭉 단지를 거쳐 한참을 가니 어느덧 나에게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줄을 잡고 올라가야 하는 오르막길이다. 이틀 연속으로 산행을 하니 이곳에서 드디어 한계에 달한 듯하다. 주산이라는 기대감에 날듯이 사라진 남편을 원망하면서 한발 한발 오르다보니 그래도 주산 정상이다.

  

  (주산 정상 표지판)

  

   주산(主山)은 고령 읍내에서 바로 등산로가 연결되는 낮은 봉우리지만 주인 주(主)가 붙여질 만큼 이곳 주민의 오랜 역사와 삶을 이어준 산이다. 정상에는 미숭산 정상에 있던 표지판과 똑같이 생긴 표지판이 서 있다. 돌아보니 북서쪽으로 가야산과 우리가 지나온 미숭산이 멀찍이 절묘한 자태를 드러낸다. 산 아래로는 고령읍이 한눈에 들어오고 산능선을 넘나드는 한줄기 바람에 땀이 말라간다. 그곳 의자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 다음 고분군 쪽으로 하산한다.

  

   주산 정상에서 고분군으로 내려오는 길은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잘생긴 나무들이 빽빽한 삼림욕장으로 조성되어 있고, 길 옆에는 명상의 숲을 꾸며 놓았다. 시간이 많다면 나무벤치 앞마다 기록해 놓은 주옥같은 명시들을 읽으면서 잠시 쉬어갈만도 하지만 시간이 늦어 마음이 급하여 그냥 지나가 버린다.

  

(주산 산림욕장의 곧게 뻗은 나무들)

  

   그리고 지산동 고분군. 국사교과서에서 한 번쯤 들어본 이름이다. 지산동 고분군은 주산의 남동쪽 구릉의 동남쪽 사면에 위치한 대가야시대의 무덤들로 대가야의 전성기인 5-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수십여 미터가 넘는 대형고분 300~400여기가 연결되어 있어 가야 지역에서 최대 규모를 형성하고 있다. 이 고분군은 현재와 고대를 연결하는 시간의 문을 연상케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대가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고분들은 산 능선에 자리잡고 있다. 신라처럼 평지도 아니고, 조선시대처럼 명당을 찾아간 것도 아니다. 살았던 동네의 전망 좋은 산 능선에, 신라 왕릉보다는 작지만 동산처럼 자리 잡고 있다. 그 묘들은 살았던 동네를 굽어보고 있는 것 같고, 때로 산봉우리가 된 것도 같다. 가야의 지배자 또는 상류 계급의 사람들은 죽어서 산이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산을 따라 내려가면서 마치 낙타등처럼 이어지는 무덤 사이사이로 소나무가 띄엄띄엄 한 그루씩 자리잡고 있다. 마치 그 앞의 무덤을 지키는 묘지기처럼. 무덤과 소나무와 그리고 가을 하늘이 빚어내는 그 절묘한 조화와 아름다움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한데 언뜻 보면 거대한 봉분들만 눈에 띄지만 능선 아래로 크고 작은 무덤들이 마치 잊혀진 역사처럼 약간씩 허물어진 상태로 수도 없이 묻혀 있다. 많은 능이 있는데, 이 능 중에서 가장 주목받는 게 지산동 44호분이다. 묘 주인을 위해서 적어도 36명이 함께 순장된 게 밝혀졌다고 한다. 죽은 자를 위해 산 자를 함께 묻다니 끔직한 일이다.

  

 (석양에 묻혀가는 대가야 고분군)

 

   남편은 마치 이집트의 왕가의 계곡과 맞먹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 아니냐면서 왜 이집트에는 그렇게 많은 관광객이 오고 가는데 이곳은 이리도 쓸쓸하냐고 서글퍼한다. 그러고 보니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이곳의 무덤들도 큰무덤군, 중간무덤군, 작은무덤군으로 구분되어 있다. 나는 서양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이집트 문화와 변방의 약소국인 우리나라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어 우울해졌다.

  

   죽은 사람들과 말없이 대화하면서 내려오니 대가야 왕릉전시관이다. 대가야의 면모를 살피기 위해서는 8년 공사 끝에 만든 대가야 왕릉전시관을 찾아가 관람해야 한다지만 우리는 시간관계상 생략하기로 하고 택시를 불렀다. 택시를 타고 다시 반룡사 주차장으로 갔는데 시골이라 제법 많은 택시비를 요구할 줄 알았으나 뜻밖에도 미터 요금만 요구한다. 오히려 잔돈을 깎아 주시기까지 한다. 얼마나 고마운지.

  

   천천히 반룡사를 돌아본다. 이 절은 미숭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고, 신라 애장왕 3년 (802년), 해인사와 같은 시기에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고려 중기 보조국사가, 고려말 나옹선사가 다시 중건한 고찰로 다층석탑과 동종이 유명하다고 한다. 절 앞에 감나무가 휘어질 것처럼 수많은 빨간 감을 달고 있고, 감나무 뒤로는 대나무 숲이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또 몇 년이 되었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고목이 가지를 휘늘어뜨리고 있다. 그 세 가지 나무가 연출하는 평화로움에 잠시 망연하여 멈추어 섰는데 객으로 보이는 남자 둘이 장대를 들고 감을 따려고 시도하고 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탑이 없길래 탑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고령군에서 동종과 탑의 도난을 우려해 군청으로 옮겨 놓았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탑과 동종은 군청이 아닌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고 도난 경보시설을 설치한 후 이곳으로 다시 옮길 계획이라고 한다.

  

   산행을 마치고 나면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산 위에서 있었던 일들이 꿈결처럼 여겨진다. 특히 오늘처럼 평소에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살아왔지만 이 세상 어느 곳에선가 이루어진 잃어버린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자각하는 날은 특히 그렇다.

  

   신라에게 철저히 패배한 가야. 500여 년 동안 존속했지만 단지 패자라는 이유만으로 국사책에서조차 단 몇 줄로만 기록되고 또 시험에서 소외되어 잊혀진 역사가 되어 버렸다. 저 주산 능선의 수많은 무덤들이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음에도, 그 무덤 앞마다 간간이 서 있는 소나무처럼 그저 외롭고 쓸쓸한 역사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어느 날 무심히 지나가는 나그네로 하여금 시간의 무상함과 허망함을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