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05.12.2(금)-3(토)

코스: 두문동(싸리재)-함백-화방재(일박)-태백-당골

 

 

12월로 접어들면 곧장 가고자 한 산은 정작 따로 있었다. 스무살이 갓 넘은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날 친구와 함께 아무런 준비없이 운동화에 청바지 차림으로 덜컥 올랐다 고생한 만큼이나 많은 추억을 남기고 온 계룡산. 산행라면 고개를 내젓게 만든 바로 그 문제의 산이기도 한데... 어쨌거나 이번엔 제대로 준비해서 제대로 맛을 보겠노라 다짐을 했건만 일박을 예정했던 은선대피소가 철거됐다는 소식을 전날 밤 열두시가 다 돼서야 듣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동행과 의논해 급히 목적지를 변경했다. 시간을 넉넉히 잡고 코스도 다시 짜고 준비물도 챙기고 했어야 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미 길을 나선 마음을 다시 붙잡아 들여앉히기란 절대 내키지 않는 일이었기에... 그냥 그렇게 우리는 다음날 새벽 훌러덩 떠나고야 말았다.


 

1. 신발끈 함부로 풀고 있지 마라

버스 안에서의 잠은 언제나 달콤하다. 얼마 안잔 것 같은데 벌써 태백터미널이 다 와간다. 동행은 벌써부터 등산화에 끈을 매고 복장을 가다듬고 준비가 분주한데, 난 조금의 여유를 더 느끼고 싶었다. 이제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고생 시작일텐데...뭐 그런 마음? 마뜩치않게 흘겨보던 동행이 마침내 한마디 한다. 신발끈 안매냐고. 어차피 내려서 식당에서 밥부터 먹을텐데, 그때 매겠노라 했다. 혹시 식당이 신발벗고 들어가는 데면 어쩌라구. 내가 생각해도 꽤 괜찮은 핑계거리다...

버스가 서고 사람들이 내리고 마지막으로 어슬렁거리며 내리는 순간, 잉? 발이 이상하게 앞으로 나가지질 않는다. 양쪽 발이 밧줄로 묶인 것 같다. 신발끈을 밟았나 싶어 한쪽발을 휙 쳐드는 순간 난 앞으로 쿠당탕 넘어지고 말았다. 왼쪽 신발끈이 신발 속에서 삐죽히 둥글게 나와 오른쪽 신발 안쪽 고리에 제대로 걸린게다. 어찌나 심하게 힘을 받았는지 겨울산행용으로 새로 산 등산화에 고리까지 떨어져버렸다. 가뜩이나 시원찮은 왼쪽 무릎이 콘크리트 바닥에 박살이 나고 오른쪽 무릎도 멍이 들고 양 손바닥 다 까지고 턱까지 갈릴 뻔했다. 한마디로 대형사고!!

이후로 나는 등산화 끈을 풀어놓을 때의 끈의 위치에 대해, 푼 상태에서 걸어다닐 때의 걸음거리, 바짓단의 위치, 기타 등등에 대해 귀가 따갑게 듣고 또 들어야 했다. 한마디로 초짜가 건방지다 이거였다. 뭐가 그렇게 주의해야 할 게 많은지...쪽팔리고 비참하고 피곤했다!!


 

2. 먹을 때는 절대 놓치지 마라

그 어느 때보다도 파란만장했던 준비 행로를 끝내고, 두문동재에서 출발을 하니 시간은 벌써 오후로 접어든다. 택시타고 입구까지 가는 데서도 길이 꽁꽁 얼어 있더니만 “고고한 고한에서 고고하게 쉬어가라”는 촌스럽고 멋진 현수막이 걸린 함백산은 입구부터 벌써 눈으로 온통 뒤덮였다. 드디어 겨울산이구나.

눈이 허벅지까지 푹푹 쌓이진 않았지만 이제 겨울이 시작되고 많은 눈이 올 것이며 그러면 또 얼마나 근사한 모습일지를 프리뷰로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하얀 눈 위에 찍힌 발자국 하나 외에는 산을 다 내려올 때까지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첫 눈길 산행이라 그리 쉽진 않았다. 아이젠도 할 필요가 없다 하여 찍 소리 못하고 스틱에만 의지해 걷다 보니 정상에 다와가서는 팔 다리가 모두 힘이 든다. 몸 속에서 건데기가 필요하다는 신호를 보냈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는 (전문 산악인) 동행의 판단에 따라 커피 한잔에 소주 한컵으로 단촐하니 정상 파티를 하고 서둘러 하산길에 올랐다(이 자리에서 라면이라도 끓여먹지 않은 것을 우리는 이후 최소한 8시간은 뼈아프게 후회를 해야만 했다.)


 

3. 모르는 산이냐? 지도부터 챙겨라

생각하면 여기서 길을 잘못 든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 마음만 서둘렀지 처음 가는 산인데도 뽑아놓은 지도조차 챙겨오질 않았다. 점점 더 쑤셔오는 무릎으로 인한 육체적인 고통이 불안한 마음과 뒤섞여 주저앉아 딱 울었으면 좋겠다 싶다. 여차저차하여 제대로 길을 찾고나니, 만항재까지는 또 저무는 해와 함께 운치까지 운운하며 잘 올 수가 있었다. 해도 지고 산에서 또 길을 잃을까 걱정도 되고 하니 여기서부터 화방재까지는 편하게 도로로 가자고 합의를 봤다. 편하게라니...  여기까지 오면서 인적하나 못본 주제에 정 안되면 차를 얻어타고 갈 수 있으리라는 상상을 했다니.... 그 길은 가도가도 끝이 없었다 (나중에 지도를 보니 미리 알았으면 절대 안갔을 길이다.) 우리는 춥고, 배고프고, 정말정말 피곤했으며,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건 이 길이 언제 끝날 길인지 도대체가 알 수가 없었다는 거다. 그리고 인적 하나 없던 길에서 마침내 주유소 건물이 나타났을 때, 난 또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이번에는 너무 반가워서... 이 때 시간은 밤 9시가 넘었다.


 

화방재에서 민박집을 잡았다. 샤워도 하고 밥도 하고 소고기 무우국에 돼지떡볶이(하다보니 찌게가 됐다)에 소주까지 한병을 비우니 이제야 살 것 같다. 기운이 난 김에 남은 한 병은 밖에서 마시기로 했다. 마땅히 분위기를 낼 만한 자리가 없어 차도 옆에 드러누운 통나무 뒤에 방석을 깔고 장갑을 세 개를 끼고 모자를 두 개를 쓰고 쪼그리고 앉았다. 온도계를 보니 영하 10도쯤 되나보다. 암만 생각해도 적어도 반쯤은 미친 짓이다... 그래도 뭐 어때. 이제 곧 뜨끈뜨끈한 방바닥에 퍼져 잘 수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구... 일단 먹고 보능겨!!


 

서울은 첫눈

보기보다 예민한 구석이 있어 잠은 제대로 못잤지만 제대로 먹고 제대로 지진 탓에 몸은 가뿐하다. 오늘은 태백이다. 부러 돈 내는 유일사 매표소를 피해 간다고 가니 사길령 매표소가 있네? 산에 갈 때 돈 내는 게 제일 아까운 소비 중 하나라고 늘 얘기하는 동행의 입이 댓발은 나왔다...ㅋ... 이 곳은 함백과 딴 판으로 사람이 많다. 산이 영험해서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도 많단다. 천제단에 가서는 나도 뭘 하나 빌어야지 했는데 추운데서 라면을 끓여먹느라 정신이 없어 잊어버리고 말았다. 물이 모자라 짜다고 했더니 동행, 아낌없이 남은 소주를 들이 붓는다. 말릴 틈도 없었다. 그 맛은....정말이지 오묘(???)했다.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드셔보길.


 

아무래도 무릎이 시원치 않아 처음 계획을 변경해 망경사에서 당골로 접어 들었다. 많이 쌓이지 않은 눈에 사람들이 워낙 많이 지나가 길이 여간 미끄럽지가 않다. 생초보에다 근육이라고는 새끼근육 하나 거의 없는 다리로 두 달여 동안 과도하게 욕심을 내며 다닌 걸 엄청나게 후회했던 하산길이었다. 내려가자마자 병원을 가든, 침을 맞든, 둘 다 하든, 반드시 치료를 하고, 치료와 병행해서 필요한 근육 운동도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했다. 자신감만 가지고는 욕심만 가지고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을 절감해야 했던, 아픈 산행이었다. 이래서야 어디 지리산 종주 아니라 뒷산 종주나 하겠는가 말이다.


 

어두운 강변 터미널에 내리니 서울 하늘에 첫눈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눈 구경을 하러 강원도 높은 산까지 갔다 왔더니만 정작 내리는 눈은 서울에서야 본다. 내일 쯤 가는 사람들은 진짜 신나겠구만... 아쉬움을 달래며 남은 산행을 기약해 본다. 아직 겨울은 길고 내게는 무릎을 고치고 체력을 키우는 게 우선이다. 2월의 지리산 종주를 위해. 이제 겨우 첫 걸음을 시작한 뿐인걸. 기억하자. 성급한 욕심은 자멸의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