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즐거운 산행 많이 하시길 기원합니다.

 

 

 

12월 31일

오색-대청봉-천불동계곡

 

올해 마지막 산행이다.

03시 20분 남설악매표소를 출발하여 대청봉으로 향한다.

 

산에 눈이 별로 없다. 희미한 눈발이 날릴 뿐.

오기 전에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눈이 얼마나 왔느냐고 물어보았더니

“눈이 없고 정상부근에는 조금 쌓여있다”는 말에 실망감을 감추고 못하고

“왜 눈이 없느냐?”고 따지는 듯한 나의 말에 공단직원은 웃기만 하였다.

 

대청까지 가장 빨리 오르는 이 길은

사람의 가슴을 수도 없이 뛰게 만드는 우직한(?) 길이다.

우리가 안마시면 올해가 섭섭해서 가겠냐고

송년회니 망년회니 하면서 신나게 마셨더니 체력이 부실한 듯

마지막 깔딱고개가 너무 힘들다.

 

대청봉이다.

오늘은 사람들이 별로 없다.

아마 내일의 신년 일출산행에 여기는 인산인해가 되겠지.

 

바람이 세차다.

아무리 날이 따뜻하다 해도 그래도 겨울의 대청봉 정상인데 어디 만만하랴.

눈바람을 맞으며 정상비를 찍는다.

장갑 벗고 셔터를 누르는 손이 시리다.

 

지리산 천왕봉과는 달리 멋 부리지 않은 투박한 한글 정상비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정상비가 항상 그 자리에 지키는 것처럼

언제나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소중하겠지.

 

중청대피소 앞에서 촬영중인 MBC 취재팀을 만났다.

“설악산의 겨울”이란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는데 올 4월에 방영 예정이란다.

촬영 협조를 부탁하길래 10명 정도의 산행객들과 함께 “길가는 사람”이 되었다.

‘추위에 떠는 산행객으로 안 나오는지 몰라’

 

중청대피소에서 희운각까지 내려가는 길에 눈이 그나마 쌓여있다.

급경사길, 조심해서 내려갔다. 흐리던 날씨가 맑아지면서 파란 하늘이 보인다.

눈이 충분히 쌓여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자기의 팬들이 눈 많은 다른 곳으로 잠시 외도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을

설악은 속으로 이 한마디만 할는지 모르겠다.

‘내 이름 설악의 설은 눈 雪이야, 잠시만 기다려봐’

 

희운각에서 양폭까지

가끔 밑에서 올라오는 사람 몇 명만 보았다.

눈은 희미하게 날리고 조용한 산길을 걷는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배운 한시 강설(江雪)이 생각난다.

 

이 시가 당시 유행하던 영화

소림사십팔동인(小林寺十八銅人)의 맨 처음에 나왔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어린 마음에 그 장면이 얼마나 멋있던지.

 

千山鳥飛絶 산에는 새 한마리 날지 않고

萬徑人蹤滅 길마다 사람 자취 끊어졌는데

孤舟蓑笠翁 도롱이 삿갓 쓴 늙은이 혼자서 낚시질

獨釣寒江雪 강에는 눈만 내리고

 

지금의 산길에는 사람 자취도 보이고

한 겨울에 이름 모를 산새가 지저귀고 있으나

방한모쓴 청춘(?) 하나, 이 시의 기분을 내면서 걸어본다.

 

눈 뒤집어쓴 천불동계곡의 기암절벽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하루하루가 흘러 마지막 날이 되어버린 올 한해를 돌아보았다.

이 시점이 되면 항상 아쉽고 서운한 것이 많지만 어차피 가는 세월.

내년은 조금 더 노력하는 한해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