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 2005. 12. 30. (금)
누구랑 : 두 아들(22세. 17세)과 함께
산행코스 : 제일관광농원 주차장  - 백운산 - 가지산 - 용수골 - 제일관광농원 주차장
산행시간 : 휴식.알바포함 7시간 30분

이미 두 아이가 다 자랐는데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보곤 한다.
좀더 일찍 산을 알았더라면 어려서부터 산행을 통하여
자연 속에서 인내와 끈기, 겸손을 가르쳤을 터인데라고!
아이들이 어렸을 적, 네 가족이 폭염 속에서 멋모르고
설악산 울산바위를 올랐고, 어설피 겨울 월출산엘 올랐다가
추위와 눈보라 속에서 혹독히 고생한 것이 우리 가족 산행기록의 전부였었다.

不惑을 훌쩍 넘겨 뒤늦게 산을 조금씩 배워가면서
기회가 주어지는대로 가족 산행을 도모하곤 하는데
큰 넘은 입대 전 금정, 김해 무척산을 탄 정도이고
작은 넘은 올해에 영축, 신불산을 다녀왔다.
휴가를 앞두고 들뜬 목소리로 장남의 전화가 걸려온 날
母子간의 산행을 위해서 하루만 시간을 비워달라고 했더니
산을 무지 싫어하는 아들이 흔쾌히 동의를 했다.
마침 겨울 방학에 들어간 작은 넘을 붙들고 작업에 들어갔지만
이 넘은 올 여름의 두 번 산행이 버거웠는지,
일언지하에 칼로 무우 자르듯, No를 선언하는데 역부족이라!
순간 묘안이 떠올랐으니 큰 넘에게 동생을 포섭(?)하라고 지시했다.
꼼짝없이 둘째가 동행케 되어 의외로 쉬이 세 母子가 뭉쳤고!

어쩐 일인지 매표소에 사람이 없어서 무임으로 주차장엘 이르고
스키 장갑에 방풍 마스크까지 두 녀석을 완전 무장시키고서는
적당히 분배한 짐을 배낭에 채워 각각 등짐 지우고 보니
집 출발 시, 스틱을 현관에 두고 온 것이었다.
머리 위 백운산 봉우리 새하얀 암봉을 바라 보면서
단식원 옆 주렁주렁 매달린 시그널을 따라 등로로 들어선다.(10:00)
초입부터 경사가 이어지지만 두 아이가 경쟁하듯 휑하니 앞서서 나아갔다.
언제나 쉬엄쉬엄형, 달팽이과인 내가 슬슬 뒤쳐지길래
--에미를 버리고 내빼는 아들은 ~~♪
   오~ 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   라고,  타령을 했다.

굴바위(처마바위)를 좌로 돌아 우둘툴한 돌길을 나뭇가지를 잡고 오르자니
이내 몸이 후덥지근 달아 올라선 모자를, 장갑을, 겉옷을 죄다 벗어버리니
날씨 또한 겨울답지 않게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 탓이리라.
아이들이 널부러진 나뭇가지를 주워선 멋진 자연산 스틱을 만들어
하나씩 짚고선 나의 것도 튼실한 걸로 넘겨 준다.

50분만에 한 봉우리엘 다다르나 표지석이 없어 의아했는데
뒤에 알고 보니 그 곳은 정상아닌 전망바위였고
한 무리의 단체 등산객들이 몰려오니 마치 시장바닥마냥 왁자지끌하였다.
보아하니 母子지간이라며 저들이 제각기 한 마디씩 아이들을 칭찬하며
카메라맨을 자처하고, 밀감을 나눠 준다.
조금 더 능선을 따라 진행하니 아담한 백운산(892m) 정상석이 있었다.(11:00)
맑았던 하늘이 어느 새 흐려 과히 전망이 좋질 못하여 아쉽다.

능선을 따라 목적지 가지산을 향하다가 어느 지점에서
길이 좌.우 두 갈래로 갈리길래 다시 이어지겠거니 하고선
시그널을 따라 우측으로 진행하니 산죽과 제법 많은 양의 흰 눈이
색다른 광경으로 나타나고, 우리는 오솔길같은 그 길이 마냥 좋아
너무도 편한 걸음으로 즐기듯 사뿐히 걷다 보니
아차! 용수골 계곡으로 완전히 내려서 버린 것이 아닌가!(12:10)
그것도 낙엽이 켜켜이 쌓인 탓에 작은 넘의 한 발이 얼음물에 첨벙하고 말았다.
필수품인 지도 없이 느낌만으로 곧잘 좌충우돌하는 나의 최대의 실수이요,
무지와 자만이 빚은 돌이킬 수 없는 과오였다.
두 녀석은 그냥 하산해서는 집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눈치이다.
배도 고프다며 점심부터 먹자 했다.
산행 2시간으로 만족하고 돌아갈 나는 결코 아니었다.
배낭을 풀어 카스타드, 쵸코렛, 율무차, 밀감으로 허기를 달래게 하고선
대열을 정비하여 다시 계곡을 따라 오름길로 능선을 향하였다.

힘겹게 30분을 진행하여 드디어 남명초교, 백운산, 호박소, 가지산이 표기된
이정표에 다다르고, 본격적인 능선길을 따라 힘차게 나아갔다.
올 여름 으니공주와 하산길로 걸었던 눈에 익은 길이었지만
아리랑 고개같은 오름길이 연이어 나오니, 작은 넘이 슬슬 지친 기색을 보인다.
덩치에 비해 하체가 약하고, 군에서 화생방 훈련보다 언제나 행군이 더 힘들다는 큰 넘은
나라 지키는 1년차 군인답게 씩씩히 앞서서 내빼곤 해서는 동생과 보조를 맞추라고
내가 제동을 건다. --산에서 우리 이산가족 되지말자~~--
축구광인 작은 넘은 수비 명수라는데 어쩌다 경기 중 심하게 무릎을 다친 이후로
운동이 뜸하다했더니, 오늘은 걷는 폼이 영 신통치 않다.
아랫재, 제일관광농원, 가지산 2.58km라는 이정표에 다다르자(13:30)
--아직도 3키로 가까이 남았네--라며 작은 넘이 탄식을 쏟았다.
반대편의 눈덮인 산자락이 광경을 연출하고, 발아래엔 눈이 녹아 질펀한데다
더러는 빙판을 이루어 조심 걸음이 이어진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작은 넘이 --다시는 오나봐라--라며 다짐하듯 툴툴댄다.
--지금의 고생이 너의 앞날에 엄청난 에너지로 작용할거다.
   앞으로도 방학 중 단, 한 번씩이라도 엄마랑 산에 오자.
   넌 군대가면 행군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용사가 될거야.--

곧 나타날 듯, 나타날 듯 애태우던 가지산이 모습을 드러내자
뒤쳐져걷던 작은 넘의 발걸음이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녀석은 헬기장엘 먼저 다다르고선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하늘은 잔뜩 흐려 수상하기 짝이 없는데 세찬 바람이 골골마다 불어왔다.
대피소로 바로 들어가 늦은 점심부터 해결하기로 했다.(14:30)
뜨끈뜨끈한 오뎅부터 먹이고 컵라면에 보온병의 물을 부었는데
그새 물이 식었는지, 작은 넘이 라면이 덜 퍼져서는 과자같다고 했다.
--괜찮아, 그것도 추억이야.--
도시락의 밥 한 톨 남김없이, 마지막 과일 한 조각까지 모든 음식을 깨끗이 비우고
대피소 안, 온 천장과 벽면이 방명록으로 도배된 한 곳에 우리도 한 줄의 기록을 남겼다.
--형제는 용감했다! ㅇㅇㅇ母.  ㅇㅇㅇ. ㅇㅇㅇ--  
백운산 전망바위에서 만났던 단체 등산객들도 이 곳에서 다시 만났다.
난로의 불씨는 시들하고 밖에서는 쌩쌩 칼바람이 몰아치니
하산할 일이 은근히 걱정이 되지만, 셋 인데 어떠랴 싶었다.
다시 완전무장을 하고선 대피소 문을 나서서
가지산(1,241m) 정상석을 배경으로, 소중하고도 귀중한 오늘의 기록을 남기었다.(15:20)
엄마의 영남알프스에 대한 열띤 설명도 뒷전인 듯
둘은 춥다, 춥다를 연발하며 얼른 하산하길 재촉한다.
--그래, 오름길에 너무 고생시켰으니

   하산길은 최단코스로 좋은 길로 가자!--

그 말이 본의아니게 새빨간 거짓말이 되어버린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인적 하나없이 하산길 10분만에 다다른 이정표에는
가지산, 제일관광농원3.2km, 석남터널2.65km를 나타내고 있었고,
순간 석남터널로 가느니, 주차해 둔 제일관광농원 쪽으로 가야겠단 판단을 했다.
초입부터 심한 너덜길이 펼쳐졌고,
산죽의 정취가 간간이 지친 발걸음을 달래줄 뿐,
너덜길은 끝없이, 지치도록 이어졌다.
큰 넘은 저만치 앞서가는 통에 수시로 불러 제동을 거는데
작은 넘이 눈에 띄게 발걸음이 느려졌고, 마치 문어마냥 흐느적거리는 것이었다.
발목을 여러 번 접질렀고,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노라 했다.
아이의 팔을 잡고서 부축하듯 천천히 조심조심 내려가며
그나마 랜턴을 챙겨 온 것이 천만다행이란 위안이 되었다.
--담엔 형이 뭐라고 해도 난 산에 안 올거야.--
점점 지쳐가는 작은 넘의 배낭을 큰 넘이 받아 앞 뒤로 겹으로 매고
--이젠 안 무겁지?--했더니
--배낭이 무거운 게 아니라, 몸이 무거운 걸--한다.

서산 너머로 해가 완전히 넘어갔다,(16:40)
제일관광농원1.55km, 가지산 2km, 이정표를 지나
계곡을 따라 걷는데 계곡 곳곳에 얼음이 얼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내려 갈수록 길이 좋아지고 작은 넘도 다시 힘을 내어 씩씩히 걷는다.
드디어 산 속 화장실 건물이 나오고 얼음 언 작은 개울을 거너니
너른 주차장엔 우리의 사랑스런 애마만이 외로이 서 있다.
--장하다, 수고했다, 아그들아!
  장남! 넌 괜찮니?--
--사실은 한 쪽 발에 물집이 잡혔지만 참고 걸었어요.--
--엄마는 멀~쩡하다!

   잽싸게 내달리는 다람쥐과는 아니지만

   쉬엄쉬엄 끊임없이 걷는 무쇠 스타일이여.

   우리 뒤돌아서 랜턴켜고 다시 올라갈까?--

--아~~뇨--  (둘이 합창하듯)


이내 어둠이 짙어지며, 등 뒤로 으스스한 한 줄기 바람이 쏴아 불어왔다. (1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