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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각과 환청
사십에 도전했던 백두대간 무지원 단독 연속종주 후기
    
▲ 함백산에서
ⓒ 정성필
온기가 있는 온돌방에서의 잠에서는 일어나기가 싫다. 이미 잠은 깨었는데도 이불 속에서 뒤척인다. 이미 날은 밝았는데 나는 애써 밝은 날을 외면하고 다시 잠을 청한다. 시들거리며 다시 잠이 든다. 몸이 무거운 건 아닌데, 더 자야겠다. 아침잠이 꿀맛 같다. 오늘로 한달이 되었다. 한 달 동안 나는 얼마나 변했을까? 내 몸은 더 단단하게 변한 건 분명하다. 그러면 내 속은 얼마나 변했을까? 정신력은, 마음의 변화는 얼마나 변한 걸까?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운명도 바뀐다. 나는 나를 바꾸고 싶다. 나의 운명을 바꾸고 싶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뭉그적거리는 일은 끝이 없다. 결단을 해야 한다.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다음으로 넘어갈 수 없다. 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하면 여기에 머물러야 한다. 나는 다음으로 가야한다. 머물 수는 없다. 머물면, 고인다. 고이면 썩는다. 썩으면 고약하다. 버림당하는 수밖에 없다. 여기서, 저기 가는 것도 움직여야 간다. 걷지 않으면 갈 수없다. 움직이는 것은 결단이다. 결단을 해야 움직이는 것이다. 나는 자리를 박찼다. 그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변화는 시작된 것이다.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많이 내리다가 부슬부슬 내리기도 하고 도무지 종잡을 수 없게 비가 내린다. 이런 날은 산행하기가 싫다. 하지만 일어섰으면 간다. 길은 가기 위해 있는 것. 걸어야 길이다. 길은 감상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 싸리재 가는 길
ⓒ 정성필
오늘은 배낭 없이 가벼이 간다. 배낭을 민박에 놓고 가면 태백에 먼저 도착한 태환형이 배낭을 다음 코스인 피재까지 픽업을 해주기로 했다. 아침을 먹고, 민박집 일층에 있는 매점에서 초코파이와 빵을 사가지고 보조 가방에 넣는다. 보조 가방에 지도와 점심으로 먹을 빵과 우유 초코파이를 넣고 비가 흐느끼듯 내리는 함백산을 향해 출발한다.

비 내리는 날 산행은 늘 조심스럽다. 게다가 바람이 불면 함백산 같이 1,500이 넘는 고지대에서는 매우 위험하다. 저체온증이 올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기본적인 상식을 무시한다. 내 몸에 붙어 다니던 무거운 배낭을 놓고 피크닉하듯 가볍게 출발한다. 나는 복장도 반팔 티셔츠 한 장 입고 위에 판초우의 입고 날아갈 듯 가벼운 몸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간다.

처음 출발에는 다행으로 비가 내리다 말다를 반복한다. 비가 그치면 판초우의를 벗었다가 비가 내리면 다시 입는다. 벗었다 입었다를 반복하면서 함백산 정상에 도착한다. 함백산 정상에서 싸리재 도착 전까지는 비가 내리다 말다를 반복해서 그렇게 추운지 몰랐다. 싸리재에 도착하자 비가 폭우로 바뀌었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엄청난 비에 몸도 춥고 빗물이 고인 길에 신발도 젖어 비 피할 곳을 찾다 싸리재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간다.

▲ 화장실에서
ⓒ 정성필
화장실은 생각보다 훈훈하였다. 화장실에서 몸을 녹이며 사진도 찍으면서 빗줄기가 약해지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비는 그치지 않는다. 마땅히 비 피할 곳도 없이 계속 화장실에 서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어서 빗줄기가 약간 가늘어 질 때를 기다려 출발한다. 널찍한 길을 따라 가다보니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데 몸이 점점 추워진다. 안개처럼 가스가 산에 가득 차더니 몇 미터 앞이 보이질 않는다.

길이 가스에 묻히면서 잘 보이지 않는다. 몸은 다 젖었다. 판초우의 사이로 드러난 팔목이 한겨울처럼 시리다. 손목은 창백한 흰색이었다가, 추위로 빨갛게 변했다. 따스한 아랫목이 생각이 난다. 산에는 바람과 가스가 가득해서 길이 제대로 구분이 되지 않는다. 길을 찾기 위해 지도를 꺼내는데 손과 팔목이 파르스름하다. 이상하다. 지도를 보고 가방에 지도를 넣으려는데 손가락이 곱아 말을 듣지 않는다. 손은 이미 초록색으로 변했다.

순간 몇 년 전 담석통으로 응급실에 누워있을 때 심장 마비 때문에 응급실로 급하게 들어온 환자의 초록색 발이 생각났다. 그 환자는 오 분도 안되어 주검으로 바뀐 채 흰 천이 씌워져 밖으로 나갔다. 그 환자의 초록색 발이 생각났다. 순간적으로 저체온증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체하다간 위험한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나는 지도를 미처 가방에 넣지도 못하고 곧바로 뛰었다. 체온이 조금만 더 내려가면 죽음이라는 생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 비 구름에 싸인 산
ⓒ 정성필
내 의지로는 달린다 생각했는데, 몸은 달리는 건지 어떤 건지 모르겠다. 마치 꿈속에서 누군가 쫒아 오는데,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고, 마음은 조급하고, 누군가는 계속 따라오는 것 같은 상황이다. 몸에서 땀이 날 때까지 계속 달려야하는데, 환청이 들린다.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사람 살려", "살려 주세요"라는 음성이 들린다. 도와주러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잠시 길을 비켜 음성이 들리는 쪽으로 간다. 가다 문득 정신을 차린다.

가면 죽는다는 섬뜩한 생각이 든다. 길을 되돌아 다시 달린다. 삼 십 여분을 달려도 몸에서는 땀이 나질 않는다. 봉우리가 눈앞에 나타난다. 순간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르막을 가다보면 체온이 되돌아 올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오르막을 다 올라도 몸은 여전히 춥다. 실망에 더 추운 것처럼 느껴진다. 내리막에선 체온이 식는다. 내리막을 어떻게 내려갔는지 모른다. 내리막에서도 체온이 식지 않도록 달려갔다. 비 내리는 산 미끄러운 길인데다 내리막인데 신기하게 넘어지지도 않고 달린다. 달리다 보니 꿈처럼 내가 나를 보고 있다.

판초우의를 뒤집어쓰고 보조 가방 어깨에 걸치고 지팡이를 스키선수처럼 지치면서 빠른 걸음을 걷고 있는 내가 보인다. 나는 죽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걷는다. 걸어야 산다. 한눈파는 일 없이 땀나게 걸어야 산다. 나는 내가 필사적으로 걷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다시 봉우리 하나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죽을힘을 다해 오른다. 오를 때 등이 따스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땀이 이마에 맺힌다. 정상에 올랐을 때 나는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나는 살아있었다. 눈물이 쏟아진다. 눈물이 얼굴로 흐르는 빗물과 섞인다.

▲ 매봉산의 고랭지 채소밭
ⓒ 정성필
빗줄기가 가늘어진다. 바람도 잠잠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잠시 앉아 숨을 돌린다. 조금만 가면 매봉산이 나온다. 피재까지 가야하는 데, 얼마나 남았는지 잘 모르겠다. 열심히 걷다보면 나올 것이다. 몹시 피곤하다. 발자국은 능선으로 이어졌지만 나는 중간 탈출로로 빠진다. 능선만 따라가다 보면 피재에서 멀어질 것 같은 직감이 든다. 밭이 나타난다. 거대한 고랭지 채소밭이다. 산전체가 밭이다. 드문드문 집이 있고, 길이 밭 사이로 나 있다. 나무도 없는 황량한 사막 같기도 하고 선을 잘 그어놓은 밭이랑이 모여 파도처럼 물결치는 것처럼 보인다.

밭에는 아직 아무것도 심지 않은 모양이다. 흙이 맨살을 드러낸 채 비를 맞고 있다. 바람을 피할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다. 피곤하고 배고프다. 시간을 보니 다섯 시가 넘었는데 나는 아직도 점심도 먹지 않았다. 저체온증을 피하려고 죽을힘을 다해 걷다보니 배고픈 것도 잊었다. 밭 가운데 난 길, 옆에 비닐하우스가 있다. 비닐하우스에서 비와 바람을 피하면서 초코파이를 먹는다. 졸립다. 자고 싶지만 으스스한 가운데서 자면 안된다.

일어나서 피재를 향해 간다. 채소밭 사이로 난 길은 시멘트로 잘 포장 되어있지만 나는 피재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해 헤맨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를 여러 번 하다 결국 피재에 도착한다. 피재에 있던 휴게소에 들어가서 뜨거운 오뎅국물에 막걸리 한 잔 마신다. 살았다는 안도감과 피로가 몰려온다. 자고 싶다. 자기 전에 태환형에게 전화한다. 배낭 가져다 달라고.

▲ 고랭지 채소밭
ⓒ 정성필
태환형이 도착한다. 내 몰골을 보고 나를 차에 태우고 태백으로 간다. 태백산 밑에 민박집을 잡았단다. 나는 민박집에 도착하자마자 털퍼덕 주저앉는다. 긴장이 풀린다. 한참을 앉아있다 옷을 갈아입고 신을 말린다. 태환형을 만난 게 네 번째이지만 모두 스치듯 지나가는 인연이었지만 백두대간 상에서 만난 인연이라 특별하다. 태환형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다. 형은 형수와 신풍령에서 본적이 있던 종호씨와 함께 있었다. 저녁을 먹고, 잠을 잔다. 밤새 앓았나 보다. 아침에 태환형이 끙끙 앓는 소리와 비명까지 질러 걱정을 많이 했단다. 고마운 일이다.

- 32일 째, 도상 거리 20킬로미터 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