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전선의 철원 안보관광 답사기 <제2땅굴~평화전망대~두루미전시관>

□ 답사일자/ 2013년 8월 3일 토요일 갬

참가인원/ 나 홀로 

□ 답사진행상황

   07시 50분 : 파주집 출발

   08시 05분 : 경의선 월롱역 버스정류장

   08시 30분 : 법원리 우체국 앞 버스정류장

   09시 15분 : 전철1호선 양주역

   09시 50분 : 전철1호선/경원선 동두천역

   10시 00분 : 경원선(백마고지역행) 출발

   10시 55분 : 경원선 백마고지역 도착

   11시 10분 : 철원 안보관광버스/ 안보관광 출발

   11시 14분 : 민통선 제2검문소 통과

   11시 30분 : 제2땅굴

   12시 34분 : 철원 평화전망대(x268m)

   13시 30분 : 월정리역/ 두루미 전시관

   13시 45분 : 제5검문소 통과

   13시 50분 : 경원선 백마고지역/ 안보관광 종료

   14시 02분 : 경원선 백마고지역 출발

   14시 30분 : 경원선 연천역

   15시 00분 : 전곡 버스터미널

   16시 35분 : 적성 버스터미널

   17시 15분 : 경의선 월롱역 버스정류장 

   17시 30분 : 파주집 도착

  

 

□ 철원관광지도

답사코스/ 백마고지역~제2땅굴~철원평화전망대~두루미전시관(월정리역)~백마고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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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보관광개요

북한이 땅속으로 파 내려온 남침용 땅굴

북한에서 남쪽으로 파 내려온 남침용 땅굴은 서부전선 지역에 2곳(제1땅굴, 제3땅굴)이 있고,

중부전선 지역에 1곳(제2땅굴), 동부전선 지역에 1곳(제4땅굴)이 있는데...

이 제4땅굴이 발견되면서 북한이 한반도 전 전선지역에서 남침용 땅굴을 파 내려온 것이 입증되었다.

1974년 11월 5일 고랑포에서 동북방 8km 지점의 비무장지대 안에서 발견된 제1 땅굴은

휴전선 남방한계선을 불과 800m 남겨 놓은 지점에서 발견 되었다.

특히 1975년에 발견된 제2땅굴은 서울에서 불과 44km 거리에 있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북한의 남침용 땅굴은 1971년 9월 25일 "하나의 갱도는 10개의 핵 폭탄보다 효과적이다" 라는

김일성의 교시로 1972년 5월부터 공사가 이루어졌고, 이로부터 2년후인

1974년 11월 5일 경기도 파주시 고랑포 비무장지대 내에서 최초의 남침용 땅굴이 발견된 것이다.

특히 이곳은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기습을 위해 남파된 무장간첩이 침투하였던 인근지역이기도 한 곳이다.

이 땅굴의 위치는 서울에서 불과 65km 떨어진 거리로서, 그  규모로 보아서

1시간에 1개 연대 이상의 무장병력이 통과할 수 있는 규모의 땅굴이다.

이 제1땅굴은 비무장지대(DMZ)내에 위치하고 있는 관계로 일반에게 개방을 안하고 있다.

1974년 11월 15일 제1땅굴 수색 중 북한의 방해 매설물로 인하여

한국군과 미군 장교 2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을 당하는 희생을 치루기도 하였다.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에서 발견된 제2땅굴은 한국군 초병이 경계근무중에 땅속에서 울리는 폭음을 듣고

시추작업으로 땅굴 소재를 확인한 후 수십일간의 끝질긴 굴착작업 끝에

1975년 3월 19일 한국군 지역에서는 두번째로 발견된 북한의 기습 남침용 지하 땅굴로서,

지하 50m~160m 지점의 견고한 화강암층에 뚫은 이 땅굴의 총 연장은 3.5km인데

그 중에 군사분계선 남쪽으로 1.1km까지 파 내려왔고 그 규모는 높이1.65m~2m의 아치형 터널로서

대규모 침투가 가능하도록 특수 설계된 북괴의 엄청난 도발 현장이기도 하다.

현재 이 땅굴은 국민의 경각심을 고취시키는 안보관광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

이 제2땅굴은 제1땅굴 보다 규모가 큰 것으로 철원 북방 13km지점의 비무장지대 안에서

발견된 이 제2땅굴은 땅굴내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 시길 수 있는 광장까지 갖추어 놓았고 출구는 세 갈래로

분산시켜 놓았고, 1시간에 3만명의 무장병력을 이동 시킬 수 있으며

이 제2땅굴 수색중에도 북한의 방해 대책 강구로 한국군 7명이 희생 되었다.

1978년 10월 17일에 발견된 제3땅굴은 제2땅굴과 거의 같은 규모로

판문점 남방 4km 지점의 비무장지대 안에서 발견된 이 제3땅굴도 아치형으로 1시간에

3만여명의 무장병력을 이동 시킬 수 있는 규모로 이 제3땅굴은 제1, 제2땅굴보다 훨씬 위협적이다.

위치가 임진각에서 서북쪽으로 4km, 통일촌 민가에서

3.5km밖에 안 되는 곳으로서 서울까지는 불과 44km 거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0년 3월 3일에 발견된 제4땅굴은 양구 동북방 26km 지점에 위치한

동부전선 비무장지대의 지하 145m 깊이에 폭2m, 전체 길이가 2,052m나 뻗어 있으며

군사분계선에서 무려 1,502m나 남쪽으로 내려온 지점에서 발견 되었다.

이 제4땅굴은 북한이 전 전선에 걸쳐 남침용 땅굴을 굴착하였슴을 입증해 주고 있다.

또한 이 제4땅굴의 현장 답사는 다른 땅굴과 달리 밧데리 열차가 운행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 답사사

제2땅굴

지난 2월 23일 겨울철에 이곳 철원의 안보관광을 다녀가고 계절이 바뀐 여름철인 오늘 이곳을 다시 찾았다.

오늘은 집에서 좀 일찍 출발하여 동두천역에서 10시 정각에 출발하는 경원선 열차를 타고

백마고지역에  도착하여 안보관광버스에 올라서 지난 2월달과 같은 코스로 안보관광을 하게 되었다.

지난번과 달리 백마고지역사 옆에 조그만 "철의삼각전적지관광사업소"에서 매표를 하는데

지난번에 "철원안보관광" 이라는 명목으로 4,000원에 입장을 시키더니

이번에는 입장권 3,000원을 내고 입장표를 받고나서 관광버스를 타려고 하니 또 다시 5,000원을 내라고 한다.

할 수 없이 도합 8,000원을 내고 버스에 올랐는데 조금 이상한 것이...

처음에 입장표를 3,000원에 끊고 입장표를 주더니 버스문 앞에서 8,000원을 받고는 그냥 타라고 한다.

영수증도 입장표도 주지않고 버스문 앞에서 5,000원만 받고는 그냥 차에 타라고 한다.

백마고지역을 11시 10분에 출발하여 민통선 제2검문소를 통과하여 철원평야에 들어서니 광활한 철원평야에는

벌써 벼가 꽃이 지고 이삭이 보이는 것이 곧 여물어 가려고 하는 모습이 보이고 있다.

지난번과 같이 첫 번째로 제2땅굴로 향하는 안보관광이 시작되었다.

서울 북방106km 지점에 위치한 북한의 기습남침용 지하땅굴은 1973년 11월 20일

푸른별 청성부대 상병 이기태와 일병 김효섭이 경계근무 중 지하로부터

폭음을 청취한 것이 계기가 되어 수십일간 끈질길 굴착작업 끝에 1975년 3월 24일 발견 되었다.

DMZ일대에서 두번째로 발견된 제2땅굴은 총 연장 길이 3.5km에 달하며

지하 50~160m의 견고한 화강암층을 뚫고 군사분계선 남쪽 1.1km까지 파 내려 왔으며

유사시 높이 2m의 아치형 터널을 통해 북한군 무장 병력 16,000여 명이 한 시간 동안 0.8m의 간격을

유지한 가운데 2열 또는 3열 종대 대형으로 침투가 가능한 엄청난 도발현장으로

땅굴발견시 내부 수색작전에 투입되었던 선배 전우 중사 김호영 외

7명의 대원은 북한이 차단벽에 설치해 놓은 지뢰와 부비트랩에 의해 산화되었다.

  땅굴은 유사시 아군 후방으로 병력을 침투시켜 국가혼란을 조장하고

국군의 방어태세를 무력화하여 한반도를 공산화하기 위한 기습남침용으로 만들어졌다.

우리는 이 엄청난 도발현장에서 분단의 고통과 아픔의 주범인 북한의 적화통일

야욕을 깨닫고, 민주주의 체제로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경각심을 갖고 긴장의 고삐를 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헬멧을 쓰고 시원한 냉기가 도는 제2땅굴 속으로 들어가서 이번에는 사진을 여러장 촬영하였다.

 

 

 

40여분간 에어컨을 켠 듯이 시원한 제2땅굴 속에 들어가서 답사를 하고 다시 밖으로 나와서

제2땅굴 입구에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북한군들의 장비, 무기 등을 잠시 구경하고

매점에서 부라보콘을 2,000을 주고 하나 사 먹고 안보관광 버스에 올라서 평화전망대로 향하였다.  

 

 

 

철원 평화전망대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중강리 588-14에 위치하고 있는 철원 평화전망대는 2007년 8월 30일에 준공하였으며

총 52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착공한지 5년만에 연면적1,578㎡에 지하1층, 지상3층 규모로 지어졌다.

 1층 전시실에는 민족의 아픔이 서린 6.25영상물과 상처의 땅 철원 전적물 등이 전시되어 있고

제2땅굴 및 군막사와 검문소 재연, 북한 바로 알기 인터넷 검색와 DMZ생태보고 사진전시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2층에는 관람석 300석 규모의 전망대와 망원경을 이용한 야외 관망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관광객들의 체험관광을 위하여 길이 283m의 모노레일카(50인승)를 설치하였다.

2층의 전망대는 휴전선 비무장지대(DMZ)를 비롯하여 평강고원, 북한선전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2층 전망대 바로 앞쪽에서부터 광활한 모습의 비무장지대(DMZ)가 펼쳐지고 있다. 

남북간의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각각 2km씩, 폭4km의 한반도의 허리를 자르는 비무장지대(DMZ)는

동서간 길이 155마일(248km)에 달하며 면적은 992㎢로 계곡과 분지,

여러줄기의 강이 포함되어 있으며, 산악지대 생태계, 그리고 담수 및 해안 생태계가 함께 존재하는

생물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으로 휴전 후 60년 세월 동안 이 비무장지대에는

민간인의 출입이 완전히 통제되었기 때문에 자연 그대로의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곳이다.

또한 이 비무장지대에는 국제적 보호종 뿐만 아니라 많은 천연기념물과

멸종위기종 및 보호야생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곳으로 국제적으로 중요한 물새나

두루미류의 서식처 및 유네스코에서 국제 자연환경조성과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적할 정도로

국제적 차원에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역으로 한반도에 서식하는 2,900여종 이상의 식물 가운데 1/3 이,

70여종의 포유류 가운데 1/2 이, 320여 종의 조류 가운데 1/5이 이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2월 23일 눈이 쌓여 있을때 이곳 평화전망대를 다녀 갔는데 그때에는 모든 초목이 겨울옷을 입고 있을 때여서

오늘은 푸르른 초목이 보이는 DMZ 안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이번에 철원 안보관광을 다시 오게 되었다.

 

 

 

평화전망대 앞에서 바라본 동송저수지와 철원평야 너머 저 멀리 금학산과 고대산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평화전망대 앞에서 모노레일을 타지 않고 걸어 올라가면서 바라본 비무장지대(DMZ) 안의 모습으로

좌측 저 멀리 백마고지(395m)에서부터 피의능선(이북의 대성산 619m)의 모습과

그 우측으로 김일성고지(고암산 780m)의 모습과 낙타고지(432.3m)의 모습이 비무장지대 안의 철원평야 뒤로 보이고 있다. 

 

 

 

평화전망대 건물 3층의 전망대로 올라와서 바라본 비무장지대(DMZ) 안의 광활한 평야의 모습 뒤로

좌측 저 멀리 백마고지(395m)에서부터 피의능선(618m)과 북한지역의 김일성고지(고암산 780m)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위의 사진들을 조금씩 확대하여 바라본 모습들>

 

 

 

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바로 아래의 155마일 철책선 너머로 비무장지대(DMZ) 내의 철원평야의 광활한 모습과

저 멀리 좌측으로 6.25사변 때 그 유명한 피의능선(619고지)과 우측으로 김일성고지(고암산 780m)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궁예(弓裔)의 태봉국도성지(泰封國都城址)

 신라의 왕실 태생으로 전해지는 궁예(?~918년)는 일찌기 궁중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세달사에서 성장한 후

북원(원주)의 양길 밑에 들어가 세력을 키웠는데(892년) 특히 명주(강릉)등 영동지역 일대를 장악한 궁예는

사원의 수원승도들을 세력기반으로 삼아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고 미륵사상을 내 세우면서

부패와 혼란에 빠진 진성여왕(877년~897년) 통치하의 신라에 반기를 들었다.

영서지방을 거쳐 철원으로 진출한 궁예는 계속 서진하여 고구려 세력의 중심지요 왕씨 세력의 아성인

송악을 장악한 후 그곳에 후고구려를 건설하였다. (901년)

그러나 한반도 전체를 통합하려는 야망을 지녔던 궁예는 국호를 대동방국을 뜻하는 마진으로 바꾸고(904년)

도읍지도 한반도의 중심지인 넓은 철원평야의 풍천원으로 다시 옮겼다.(905년)

그는 새 도읍지에 대규모의 도성을 쌓고 국호도 태봉(泰封)으로 바꾸면서(911년)

강력한 중앙집권 통치체제를 수립하여 나아갔다.

그는 불교적 이상세계 건설을 위해 자신을 미륵불로 자처하면서 신정적 전제정치를 추구하였으나

이러한 신정정치는 왕건을 중심으로 하는 고구려 호족들과의

불화와 갈등을 초래하여 궁예는 결국 그들과의 대결에서 패자가 되고 말았다.(918년)

비록 궁예는 몰락했지만 자주적이고 개혁적인 그의 정치이념과 대제국 건설의 이상은 왕건(王建)을 통하여 고려로 계승되었다.

궁예가 풍천원의 새 도읍지 주위에 쌓은 태봉국 도성지는 현재 월정역 북방 비무장지대안에 놓여 있다.

이 도성은 외성과 내성의 이중성으로 되어 있으며

모두 남북으로 긴 사각형 형태이고 북쪽이 동쪽으로 9.5도 기울어져 있다.

성의 둘레는 외성이 12.5km, 내성이 7.7km로서 대부분 토성이지만 일부는 현무암을 섞은 토석 혼축성이다.

해방 당시 외성의 하단폭은 10.9m, 높이3.6m 였고, 내성의 하단폭은 3.6m, 높이 2.1m 정도 였으나

최근 확인결과 현재 남아있는 성의 폭과 높이는 해방 당시 규모의 절반 정도이고 많은 부분이 붕괴되어 있는 상태이다.   

  또 해방 당시에는 내성안 북쪽에 궁궐터인 포정전지(布政殿址)와 석등(해방당시 국보118호) 그리고 외성 남벽에

 남대문지(南大門址)와 석탑 및 돌거북 비석 받침돌인 귀부(龜趺)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확인이 어려운 상태이다.

또 도성안 동쪽에는 일제시대에 부설한 경원선 철도가 통과하고 있었으나 철도는 모두 제거되고 철도 제방만 남아 있다.

지금은 이 도성 한 가운데를 군사분계선이 가로 지르며 도성을 남북으로 양분하고 있어서

앞으로 이 도성의 조사와 연구는 남과 북이 뜻을 합하여 함께 추진하지 않으면 안되는 우리민족 공통의 과제로 남아 있다.

 

 

 

 

낙타고지(432.3m)

6.25 전쟁때 가장 치열했던 곳으로 속칭 철의 삼각지(철원-김화-평강)로 철원평야에서 평강고원으로

이어지는 광활한 평원인 철원평강용암대지(鐵原平康熔岩臺地)로서 신생대 제4기 용암의 열하분출로 이루어진 대지로

강원도 철원군 평강군을 중심으로 펼쳐진 총면적 약650 의 대규모 용암대지이다.

이 지역의 해발고도는 200~500m이고 평균고도가 300m이며 용암을 분출한 분출구는 평강 남서쪽으로

저 낙타고지 좌측 뒤에 넓은 분화구를 가진 한반도의 배꼽이라는 철원평강용암대지의 산실인 오리산(압산鴨山 453m)이다.

 

 

 

철원월정리역과 두루미전시관

월정리역에는 두루미전시관이 설치되어 철새들의 낙원이며 청정지역 철원에 대한 홍보와

평화와 장수의 상징인 두루미와 철새를 주제로 전시관이 2층에 154.3의 철원의 자연과 철새관이 있고

3층은 202.46의 두루미관이 설치되어 전시하고 있다. 

월정리역은 서울에서 원산으로 달리던 경원선 철마가 잠시 쉬어가던 곳으로

이 곳 월정리역에서 서울까지10km, 평강까지 16km, 원산까지 123km에 위치하고 있는 북녘땅이 지척인 곳이다.

월정리역 바로 맞은편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 는 간판 아래 6.25 당시 이 역에서

마지막 기적을 울렸던 객차의 잔해와 유엔군의 폭격으로 부숴진

인민군 화물열차가 앙상한 골격을 드러낸채 누워 있어서 분단의 한을 실감케 하고 있다.

 

 

 

11시 10분에 안보관광을 출발하여 2시간 40분 동안 제2땅굴과 평화전망대 그리고 월정리역과 월정리역 바로 옆의

두루미전시관을 관람하고 다시 백마고지역에 도착하여 건너편에 있는 소이산을 잠시 바라보고 곧 바로 도착한 열차로 귀가 하였다.

 

 

 

무원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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