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전선의 소이산(所伊山)과 백마고지 전적지(白馬高地 戰蹟地) 답사기

□ 답사일자/ 2014년 5월 6일 화요일 맑음

참가인원/ 아들과 함께 

□ 답사진행상황

   09시 45분 : 파주집 출발

   10시 07분 : 경의선 월롱역

   10시 50분 : 경원선 전곡역

   11시 25분 : 점심식사

   12시 25분 : 경원선 백마고지역/ 답사 시작

   12시 46분 : 대마리 입구(검문소)

   13시 25분 : 노동당사

   13시 44분 :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

   14시 40분 : 팔각정자

   14시 48분 : 소이산 정상

   15시 40분 : 노동당사

   16시 05분 : 대마리 입구(검문소)

   16시 10분 : 대마리 정수장

   16시 13분 : 백마교

   16시 40분 : 백마고지 전적비

   17시 14분 : 대마리 입구(검문소)

   17시 30분 : 경원선 백마고지역/ 답사 종료

   18시 56분 : 경원선 전곡역

   20시 45분 : 파주집 도착

  

 

□ 소이산과 백마고지 답사지도

답사코스/ 백마고지역~노동당사~소이산~노동당사~대마리~백마고지 전적비~대마리~백마고지역

                                                                                                               <지도를 클릭하면 확대됨>

 

 

 

 

 

 

 

 

□ 소이산과 백마고지 전적지 답사개요

소이산(所伊山)/ 362.3m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사요리 산1번지의 철원평야에 위치하고 있는 해발고도 362.3m의 소이산(所伊山)은

철원평야 논 바닦에 떠 있는 작은 섬 같은 산으로 철원평야와 비무장 지대의 최고의 조망점이다.

주변지역과 표고 차이가 200여m에 불과한 낮으막한 산으로 보이지만 산정에 오르면

넓은 철원평야와 비무장지대, 그리고 그 건너편으로 북한지역의 평강고원이 한 눈에 들어오는 산이다.

" 이 소이산이 없었다면 6.25전쟁때 철원평야를 지킬수 없었을것" 이라고 말하고 있는

김준락 육군 제6보병사단 공보참모의 설명이 실감이 나는 산이다.

동경(127도 12분) 북위(38도 15분)에 위치하고 있는 소이산은 일명 봉의산이라고도 불리고 있는데

넓은 철원평야와 비무장지대의 백마고지, 고암산(일명 김일성고지), 북한의 평강고원 등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철원군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4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한이 1946년에 건립한 3층짜리 노동당사 건물앞의 87번국도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다.

철원평야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가치 때문에 이 소이산 정상에는

회령, 길주, 함흥, 영흥, 안변, 철원을 거쳐서 서울 남산으로 연결되었던 제1선인 경흥선 봉수로에 속해있던 산이다.

또한 이곳 철원군 사요리는 옛 철원읍의 중심지로 농축산물이 모이고 경원선을 통하여 금강산 관광객이 북적대던 곳이다.

"철원군지"에 실린 1930년 소이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그 당시 산 주변으로 크고 작은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모습을 볼 수 있다.

김철암 철원 문화원 사무국장은 "해방때 철원읍 인구는 8만명이였고, 은행 2개소와,

도립병원도 있었는데 현재 철원읍 인구는 그 절반에 가까운 4만 7천명에 지나지 않는다" 고 말하고 있다.

농산물 검역소 등 과거의 주요건물은 근대 문화유적으로 남았지만 농가와 논밭의 상당수는 습지와 숲으로 바뀌었다.

마상규박사는 "통일이 되어 철원에 평화도시가 조성된다면 이 소이산은 서울의 남산과 같은 구실을 할 것" 이라며

"평화의 숲으로 도시의 산림공원으로서 보존하고 개발하는 길을 찾아야한다" 고 말하고 있다.

시민단체 "생명의 숲" 이 2006년에 이 소이산을 "천년의 숲" 수상지로 선정한 것도 "평화의 숲" 으로 가치를 인정해서였다.

소이산의 북쪽 산자락은 모두 지뢰지대이고 노동당사에서 87번국도를 따라 대마리로 향하는 길 양쪽은

옛 철원의 시가지였지만 이 지역은 지난 60여년 동안 "지뢰 통제구역"으로 묶여 있어서

그 동안 이 지역의 묶은 논은 습지로, 묶은 밭과 집터는 숲으로 바뀌었다.

소이산 자락에서 출입 영농을 하고 있는 현응기(71세)씨는 "이 지뢰지대 안에

고사리와 고라니가 많지만 지뢰 폭발사고의 위험으로 사람들이 들어가길 꺼린다" 고 말하고 있는데

전문가들은 소이산의 생태적 가치는 훼손이 심한 산 위보다 산 자락 아래의 지뢰지대가 높을것으로 보고 있다.

철원군은 지난 2011년 12월에 행정안전부 친환경 생활공간 조성공사사업으로 국비 등 50억원을 들여서

북부지방 산림청과 철원군이 공동산림사업구역으로 협약을 체결하여 소이산 둘레길에

2,382㎡의 면적에 "지뢰꽃길1.3km" "생태숲길2.7km" "봉수대오름길0.8km" 의 생태숲 녹색길을

지난 2011년 6월에 착공하여 12월에 공사를 완료하여 그동안 60여년간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였던 이곳을 전면 개방하였다.

 

 

 

백마고지(白馬高地) 전투 전 상황

1950년 6월 25일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개전 초기 낙동강 선까지 밀렸던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을 계기로 전세를 역전, 한만국경선까지 도달하였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여 2차례나 38선을 오르내린 끝에

1952년 10월 6일 백마고지 전투가 벌어지지 직전에는 현 휴전선 일대에서

피아간에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당시는 전쟁 지속 능력이 이미 한계에 달한 공산측의 요청에 의해 휴전 협상이

계속 되었던 시기로 현 접촉선이 군사분계선이 될 것에 대비하여 더욱 치열한 전투가 벌어졋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1952년 9월 이후에는 수도고지, 지형능선, 불모고지 일대에서

피아 손실을 고려하지 않은 혈전이 계속되었는데

10월에 들어서자마자 적()은 백마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모택동으로부터

"만세군" 칭호까지 받은 중공군 정예 제38군단 112사단, 113사단, 114사단을 동원하여 전투가 시작되었다.

 

 

철의 삼각지(三角地)

철의 삼각지는 김화(金化), 철원(鐵原), 평강(平康)을 잇는 지도상의 개념으로, 6.25전쟁 당시의 격전지로

1951년 6월 23일 야코프 말리크 소련 국제연합(UN)대표가 UN에서

6.25전쟁의 휴전협상을 제의하고, 6월 30일 미국의 M. B. 리지웨이 UN군사령관이

이를 정식으로 동의함으로써 6.25전쟁은 교착상태에 돌입하였다.

휴전회담을 고려한 미국과 UN은 북한을 협상에 끌어들이기 위해 승리도 패배도 아닌 제한정책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초기에 낙관적이었던 휴전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휴전회담과 전투가 동시에 벌어지게 되었다.

북한과 남한은 휴전이 이루어지기까지 최대한의 영토를 탈환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지금의 휴전선을 중심으로 서부에서 동부까지 전지역에 고지를 점령하려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이곳 철의 삼각지는 중부전선에 위치한 곳으로 도로망이 여러곳으로 발달한 전략 요충지였다.

1951년 9월 북한은 중국인민지원군과 함께 철의 삼각지 안의

백마고지, 수도고지, 저격병능선 등을 집중적으로 하여 대공세를 전개하였다.

이곳의 전투는 휴전이 성립되기 직전인 1953년 7월 13일까지 마지막 공세와 수세가 계속되던 곳이다.

이곳은 6.25전쟁중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곳으로 결국 김화와 철원은 남한의 영토로, 평강은 북한의 영토로 확정 되었다.

 

 

백마고지 전투(白馬高地 戰鬪) 개요

1952년 10월 6일 6.25 전쟁중 강원도 철원 서북방 395고지(일명 백마고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백마고지는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그 주변이 평야이고

평강, 철원, 김화 이 세곳, 속칭 철의 삼각지를 차지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곳을 탈환하면 국군의 주요 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중국인민지원군과 국군간에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치열한 공방이 전개 되었다.

공격을 감행한 중국인민지원군은 장융후이(江擁輝)가 지휘하는 제38군단의

6개 연대의 지원부대병력을 합하여 총병력 4만 4,056명이 었으며 각종포 55문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국군은 이에 대응해 김종오 소장이 지휘하는 병력에

미군의 지원을 받아 중공인민지원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였다.

이 백마고지 전투는 한국전쟁(1950년 6월 25일~1953년 7월 27일) 기간중 가장 치열하게

고지쟁탈전을 전개했던 1952년 10월에 철원에 위치한 작은 고지를 놓고

국군 제9보병사단과 중공군 제38군 3개 사단이 고지 쟁탈전을 벌인 끝에 9사단이 승리한 전투를 말한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10일 동안 불과 395m밖에 되지않는 고지를 빼았기 위해

중공군 1만여명이 전사상 또는 포로가 되었으며, 국군 9사단도 총3,4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발사된 포탄수는 아군 219,954발, 적군 55,000발 등 총274,954발이다.

결국 세계 전사상 유래가 없을 만큼 처절한 포격전, 수류탄전, 백병전을

12차례에 걸쳐 치러진 공방전에서 중공인민지원군은 약 1만명, 국군은 3,500명의 사장자를 냈다.

현재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된 휴전선에 있어서

방어에 가장 강력한 교두보인 철의 삼각지의 한 축을 잇는 중요한 고지이다.

이 백마고지는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신명리에 위치하고 있는 해발395m의 야산으로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눈여겨 보지 않았던 무명고지에 불과하였으나 전선이 고착 되면서부터

철의 삼각지 좌견부를 감제하는 중요 지형지물로 유명해진 곳이다.

명칭의 유래는 전쟁 중 포격에 의해 수목이 다 쓰러져 버리고 난 후의 형상이

누워있는 백마처럼 보였기 때문이라는 설과

당시 참전했던 어느 연대의 부연대장이 외신기자의 질문에

"화이트 호스 힐(white horse hill)" 이라고 대답하여 비롯되었다는 설 등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격전을 치루고 난 후의 처절한 산의 형상이

마치 백마의 와상(臥床)같이 보인다 하여 불리우게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6.25전쟁시 백마고지 전투를 계기로 국군 제9보병사단의 부대 명칭을 백마부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 소이산과 백마고지 전적지 답사사진

 

오늘은 중부전선 강원도 철원군에 있는 소이산과 백마고지 전적지를 아들과 함께 답사하기로 하였다.

고양시에 살고 있는 아들과 경의선 월롱역에서 10시 10분에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집에서 늦은 아침식사를 하고 차를 몰고 경의선 월롱역으로 가서 아들을 태우고 전곡역으로 향하였다.

    월롱역에서 1번국도 통일로를 아침의 상쾌한 공기를 가르며 달려서 문산을 지나서

37번국도를 따라서 좌측으로 임진강의 유유히 흐르는 강줄기를 곁눈으로 보면서 연천군 전곡으로 향하여

전곡역 주차장에 차를 주차를 하고 역전 근처의 식당에서 백반으로 간단하게 점심식사를 하고 

전곡역에서 11시 49분에 경원선 비들기열차를 타니 석탄일이라 열차 안은 만원이다.

30분 가량 아직은 오염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는 창밖의 들판의 모습을 보며 백마고지역으로 향하였다. 

 

 

 

 

백마고지역에 도착하여 역 플랫홈에서 보이는 고대산~금학산과 철원평야에 떠 있는 소이산의 모습과

대마리마을 뒤 비무장지대 내에 위치하고 있는 백마고지의 모습을 몇 장 카메라에 담고

이곳 백마고지역에서 출발하여 3번국도와 87번국도를 거쳐서 노동당사로 맞은편에 있는 소이산으로 향하였다.

 

 

 

 

백마고지역에 내려서 3번국도로 걸어서 대마리마을 입구 삼거리에 검문소로 가기전에 바라본

철원평야의 논 뒤로 소이산의 모습과 대마리마을 뒤로 비무장지대에 모습이 보이는

그 유명한 백마고지와 그 우측으로 피의500능선 사이로 살짝 고암산(일명 김일성고지)의 모습 등이 보이고 있다.

 

 

 

 

저 앞에 군부대 검문소가 보이고 있고 3번국도는 검문소로 직진하여 이어지고

그 우측으로 87번국도가 노동당사 건물을 지나서 철원읍과 동송읍 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3번국도를 걸어서 군부대 검문소로 향하면서 보니 철원평야의 논에서는 한창 이양기가 모를 심고 있고

논 뒤로 고대산~금학산의 모습과 잠시후 올라가라할 소이산의 모습이 보이고 있는데

이곳 철원평야가 해발200m의 높은지대가 되어서 마치 고향집 뒷산같이 낮으막히 보이고 있는 산으로

그동안 지뢰지대라서 6.25전쟁후 60여년간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 되었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산이다.

 

 

 

도로 옆에 세워져 있는 청백리부사거사비(淸白吏府使去思碑)를 지나고...

 

 

 

 

 

도로 양쪽으로 철조망이 쳐진 지뢰지대로 6.25 전쟁후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위험지역이다.

 

 

 

 

운동화를 신고 먼지와 매연속에 도로로 걸어서 전국을 일주중이라는 한 젊은이를 만나고...

 

 

 

87번도로 옆으로 모내기가 끝난 논에는 갸날픈 벼 모종의 모습이 보이는데...

이제 며칠이 지나면 땅의 기운을 받고 씩씩하게 창공을 향해 푸릇~푸릇~ 힘차게 솟아 오르겠지...

 

 

 

도로 저 앞에 붉은 공산당의 상징같이 보이는 노동당사 폐 건물이 보이기 시작하고...

 

 

 

철원노동당사(鐵原勞動黨舍)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3-5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노동당사 건물을 대한민국 등록문화재22호이다.

철원군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통치 당시에는 강원도의 도청이 소재하고 있었다.

구철원은 철원군의 중심지였으며, 이때에 이 곳에 조선 노동당에서 당사를 건설하였는데...

6.25전쟁 때에 대한민국 영토로 편입이 되면서 노동당사도 대한민국 영토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6.25전쟁을 치르면서 폐허로 변하여 이 건물은 현재 1층은 그런대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2층은 골조만 남아 있다.

  

 

 

 

 

노동당사 건물에서 바라본 해발고도362.3m의 소이산은 6.25후 60여년만에 개방된 최북단에 있는 산이다.

 

 

 

논길로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로 올라서면서 두번을 뒤 돌아서서 바라본 노동당사 건물의 모습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

철원군이 북부지방산림청과 공동협약을 체결하여 철원군 철원읍 사요리 산1번지의

지뢰지대였던 소이산 일대 2,382㎡의 면적의 지뢰를 제거하고

빙~ 둘러서 일부는 우마차길 정도로 넓게 산책를 조성하여 일반인에게 개방을 하였다.

 

 

 

 

 

 

 

 

 

 

지뢰꽃길 끝 지점에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의자가 있는 포토존에서 바라본 대마리 일대와 백마고지를 바라보고...  

 

 

 

평온하고 한적한 오솔길로 이어지는 둘레길을 걷고... 

 

 

 

이제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봉수대 오름길로 올라서고...

 

 

 

철원평야와 백마고지, 낙타고지, 평강고원 등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팔각정자

 

 

 

팔각정자 위에 올라서서 바라본 탁 트인 철원평야의 시원한 모습과 주변의 모습들

 

 

 

지난해에 올라왔을때 한창 공사를 하더니 정상부위에 <소이산 평화마루공원>을 만들어 놓았다.

 

 

 

소이산(所伊山 362.3m) 정상

소이산 정상에 올라서니 정상 주변에 <평화마루금공원>을 조성하여 정상의 주변의 모습이 조금 변하였다.

세멘트헬기장이 정상부위를 덮고 있었는데 나무테크로 덮어 정상 주변이 깨끗해졌고,

조금전에 전위봉인 팔각정자에서 바라 보았던 모습보다 월등한 모습으로 시야를 압도하는 철원평야의 모습과

남방한계선(GOP) 직전에 있는 백마고지 위령비 있는 곳에서부터 삼자매봉의 모습과

그 남방한계선 뒤로 비무장지대(DMZ)의 아군GP의 모습이 정상에 보이는 백마고지의 모습이 보이고

그 우측으로 피의500능선과 고암산(일명 김일성고지)의 모습과 우측으로 낙타고지와 북한의 평강고원의 모습이 보인다.

 

 

 

소이산 정상에서 내려서면서 남쪽으로 보이는 고대산과 금학산의 모습

 

 

 

소이산 정상부위에 새로 꾸며놓은 <평화마루금공원> 내의 모습들이 보이는데

6.25사변때 사용하던 포탄피, 반합, 탄통, 군화, 철모 등을 전시해 놓은 모습이 보이고 있다.  

 

 

 

소이산에서 내려서서 87번국도를 걸어서 다시<大馬里 백마고지>표지석이 보이는 검문소에 도착하여

정상에 있는 아군GP가 보이는 <백마고지>를 바라볼 수 있는 백마고지전적비가 세워져 있는 백마고지 조망대로 향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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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리마을 입구에서 바라본 모내기를 끝낸 논 뒤로 백마고지 전적지와 그 뒤로 백마고지의 모습

 

 

 

넓은 주차장 주변에 여러가지 전시물을 전시해 놓은 백마고지 전적비가 세워져 있는 전시관의 모습

 

 

 

백마고지 전투 (白馬高地 戰鬪) (1952년 10월 6일 ~ 10월 15일)

제1차 전투 - (1952년 10월 6일 19시 15분 ~ 20시 15분)

중공군 제38군 제114사단 제340연대의 선제공격으로 백마고지 전투 시작 되었다.

적은 공격 전 백마고지 일대에 2,000여발의 포탄을 투하하여

아군 전 진지가 초토화 되고 매설한 지뢰까지 폭발하여 생지옥으로 변하였다.

중공군 포로 증언에 의하면 적들은 공격전에 도수 높은 배갈을 먹이고

수류탄 만을 휴대시킨 채로 공격해옴

아군은 포병과 공군의 지원사격으로 제9사단 제30연대가 극한 상황속에서 적을 격퇴시킴

 

제2차 전투 - (1952년 10월 6일 20시 40분 ~ 24시 00분)

1차 공방적이 끝난 후 25분 만에 적은 수류탄 공격조, 다발총 사격조,

장총 돌격조 등으로 연속적인 파상공격을 감행해옴

백마고지 우견부가 일시 피탈되었으나 곧 바로 역습을 감행하여 적을 격퇴시키고 진지를 회복함

 

제3차 전투 - (1952년 10월 7일 00시 40분 ~ 05시 10분)

중공 제38군 제114사단 제340연대는 두 차례의 공격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슴에도

1,000여 발의 집중 포격과 함께 40분 만에 3차 공격을 감행해 옴

적 돌격조의 3차에 걸친 연속 공격으로 피아 사상자가 속출, 능선과 계곡이 온통 시체와 포연으로 뒤덮힘

혈전 사투 4시간 30분 만에 적 퇴각, 아군 진지와 500m 거리를 두고 상호 대처함

 

제4차 전투 - (1952년 10월 7일 20시 00분 ~ 02분 40분)

중공 제38군은 제114사단 제340연대가 공격에 실패하자 제112사단 제334연대를 투입하여

공격하여 전투 개시 3시간 후인 23시 경에 최초로 백마고지가 피탈 당함

피탈 3시간 40분 만인 02시 40분경에 치열한 공방전 끝에 백마고지를 다시 탈환함

국군 제9사단 제30연대는 제29연대와 백마고지 방어 임무를 교대함

 

제5차 전투 - (1952년 10월 8일 05시 30분 ~ 23시 05분)

주로 야간 공격만 하던 적이 주간 여명 시간에 공격을 감행, 이때부터 밤, 낮을 가리지 않고

뺏고 뺏기는 고지 쟁탈전이 반복됨

피아간의 공격 양상은 이 일대를 포격으로 초토화 시킨 다음 새로운 공격부대로 집중적으로 공격해옴

 

제6차 전투 - (1952년 10월 9일 00시 20분 ~ 10월 10일 00시 30분)

5차 공방전이 끝난지 1시간 15분 만인 10월 9일 0시 20분경에 적은 백마고지를 탈취 못하면

사단장을 총살하겠다는 명령과 함께 새로운 부대인 제114사단 제342연대를 투입하여

공격 전에 백마고지 일원에 1,100여 발의 집중 포격으로 해옴으로서

교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상당한 사상자가 발생하며 03시경에 백마고지가 또 다시 적에게 넘어감

아군은 다음날 새벽 0시 30분까지 8차례의 격전 끝에 33,000여 발의 포탄을 사용하며 백마고지를 재 탈환함

전투 후 쇠사슬에 묶인 채 기관총 진지에 얽매여 있는 적 시체를 발견, 중공군의 비인간성에 놀람

 

제7차 전투 - (1952년 10월 10일 01시 30분 ~ 06시 40분)

아군은 제9사단 제29연대가 제28연대로부터 백마고지 방어 임무를 인계 받음

01시 30분부터 적들은 포격에 이어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공격을 재개해옴

03시 30분 적의 수류탄전과 백백전으로 집중 파상공격으로 또 다시 백마고지를 빼앗겼으나

아군은 06시 40분 격전끝에 백마고지를 재 탈환함

이날 일곱번째로 백마고지에 발을 들여놓았던 중공군은 많은 사상자만 남긴채 다시 퇴각함

 

제8차 전투 - (1952년 10월 10일 08시 00분 ~ 13시 20분)

중공군 제114사단 제342연대는 4차례에 걸쳐서 막대한 타격을 받았음에도

7차 공방전이 끝난지 1시간 20분만인 08시에 다시 공격을 감행해옴

안개가 11시까지 낀 가운데 적의 근접으로 순식간에 수류탄전과 백병전이 벌어져 혈투를 계속하던 중

아군 포병의 오폭으로 참화를 입고 다시 백마고지를 적에게 내어 주었으나

아군은 다시 역습을 감행하여 고지 정상과 30m 거리를 두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50명의 수류탄 특공대를 조직하여 육탄돌격으로 적 기관총을 파괴하고 백마고지를 재 탈환함

 

제9차 전투 - (1952년 10월 10일 10시 00분 ~ 10월 11일 12시 04분)

중공군 제38군은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한 제114사단 제342연대 대신에

제112사단 제335연대를 투입하여 10일 18시 45분경에 파상공격으로 다시 백마고지을 빼앗겼으나

피아간 포격으로 온 산이 무릎까지 빠지는 모래밭으로 변해 쓰고 있던 철모로도

대피호를 팔수있을 정도에 이른 11시 04분경 수류탄이 떨어져 돌맹이로 저항하는 적을 섬멸하고 고지를 탈환함

 

제10차 전투 - (1952년 10월 11일 15시 30분 ~10월 12일 13시 20분)

11일 15시 30분 집중 포격 후 적의 공격으로 처절한 백병전 끝에 17시경에 또 다시 백마고지를 빼앗김

12일 13시경 정상을 눈 앞에 두고 적의 기관총으로 더 이상의 전진이 불가하자

제9사단 제30연대 1중대 3소대장 강승우소위가 오귀봉하사, 안영권하사와 함께 수류탄을 들고

육탄 돌격을 감행하여 기관총진지를 폭파하고 장렬하게 전사하여

백마고지를 다시 탈환하여 이 육탄 3용사는 백마고지 3군신으로 호국의 별이 되면서

내, 외신기자들에 의해 이때부터 395고지는 세계적인 관심속에 국군의 명예를 건 백마고지라 불리게 되었다.

국군 제9사단 제30연대가 제29연대로 부터 백마고지 방어 임무를 인수 받음

 

제11차 전투 - (1952년 10월 12일 14시 40분 ~ 16시 50분)

중공군의 10차 공방이 끝난지 1시간 20분 만에 아군 부대가 교대하는 사이 또 다시 역습을 해옴

16시 50분 전후 국군 제30연대는 침착하게 후퇴하는 적에 대해 포격과 사격으로 궤멸적인 큰 타격을 가함

 

제12차 전투 - (1952년 10월 12일 19시 30분 ~ 10월 15일 11시 00분)

12일 19시 30분부터 13일 03시 35분까지 적은 3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포격과 총격 후

돌격을 감행, 피아간에 필사적으로 공방이 이어짐

이후 15일 11시까지 최후의 결전 끝에 백마고지 일대 전 지역에서 새로 투입된 적 38군

제112사단 제336연대의 반격을 격퇴하고 10일간의 혈전을 종결하였다.

중공 제38군은 이 전투에서 결정적 타격을 받고 후방에서 부대를 재건하다가 53년 7월말 본국으로 철수하였다.

 

 

 

백마고지를 바라보고 주차장이 있는 곳으로 내려서면서 바라본 고대산(831.8m)과 금학산(947m)의 모습

 

 

 

백마고지 전적지에서 백마고지역으로 향하면서 바라본 고대산, 금학산의 모습

 

 

 

군부대검문소에 있는 앞면에는 <대마리 백마고지> 뒷면에는 <향군촌 대마리>가 각인 되어 있다. 

 

 

 

백마고지역으로 향하면서 바라본 모내기를 한 논 뒤로 보이는 고대산, 금학산, 소이산의 모습

 

 

 

아들과 함께 중부전선 철원의 소이산과 백마고지 전적지 답사를 무사히 마치고 백마고지역에 도착하였다.

12시 25분에 이곳 백마고지역에 도착하여 37번국도~87번국도~노동당사를 거쳐서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 둘레길을 걸으며 두런 두런 이야기도 하면서

소이산 정상에 올라서서 광활한 철원평야의 모습과 백마고지~피의500능선~고암산 낙타고지 등의

멋지고 장엄하게 펼쳐지는 모습과 탁 트인 시원한 철원평야를 한 없이 바라보았다.

오늘 다섯시간 동안 <백마고지역~소이산~백마고지 전적지~백마고지역>의 답사를 무사히 마무리하였다.

 

 

 

무원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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