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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jpg-청량산 정상에 자리한 수어장대, 남한산성 남문(지화문)- 

남한산성(南漢山城)<21년도 85번째 송년산행(送年山行) 역사현장으로>
2021085076호       2021-12-26(
 
자리한 곳 : 경기도 광주시
지나온 길 : 마천역-신축단지-日長泉약수터-연주봉옹성-서암문-청량산(수어장대)-(지화)-누비길-불망비-산성역
거리및시간: 4시간 29(10:09~14:38)           도상거리   :   10,1km       보행수(步行數)   :  17,817
함께한 이 : 민선배님과 둘이서
산행 날씨 : 흐림 가시거리 매우불량 <해 뜸 07:46     해 짐 17:22           ‘최저 0,     최고 6>

특별한 인연(因緣)을 지닌 선배님과 함께한 2021년도 송년산행
동병상련(同病相憐)일까? 상처(喪妻)의 아픔을 지니고 있는 처지이기 전에, 지연과 학연 그리고 같은 회사, 같은부서에서 20년을 함께 근무한 관계로 평소에도 존경하고 의지해온 친근한 선배님께서, 2주전 전화로 불편하던 발목이 호전됐다며 송년산행에 관심이 계시다며 지리산천왕봉을 운운하시는 언질에 일단 날짜(29)부터 잡아놓고 산행지(山行地)는 천천히 생각해서 확정하기로 약속은 했다. 문제는 선배님께서 7학년 마지막 송년산행이라 나름 의미 있게 피날레 무대로 기억되도록 기획해 드려야겠다는 부담감 때문에, 가슴이 답답하고 걱정이 앞서 십여일을 고민하다 일요일 방장산 눈행중에 끝낸다. 79세의 선배님 연세와 산행능력을 고려해 지하철로 접근이 쉽고 육산이며 역사현장으로 널리 알려진 청량산으로 확정 동의를 얻어냈다. 남한산성<원점회귀=마천역1번출구-1.2km-성불사-1.9km-연주봉옹성-0.2km-서문(우익문)-0.6km-청량산(수어장대)-0.9km-남문(지화문)-1.4km-동문(좌익문)-1.4km-남장대터(산성)-1.3km-북문(전승문)-0.8km)-서문-1.5km-청운사-0.9km-마천역 : 총거리 12.1km, 소요시간 6시간 내외다. 이벤트(event)란 단어가 적합하지는 않으나 송년인 만큼 마음이 쓰여 마천역 부근의 맛집들을 검색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투자했다.

남한산성(南漢山城)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일원의 도립공원이다.
사적 제57. 둘레는 약 8,000m. 신라 문무왕 때 처음 성을 쌓고 이름을 주장성(晝長城)이라 했으며,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에는 일장산성(日長山城)이라 기록하고 있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溫祚)의 성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1624(인조 2)에 왕이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로 하여금 성을 개축하게 하여 1626년 공사를 끝마쳤다. 4문과 16암문(暗門), 성가퀴[女墻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 1,897, 옹성(甕城), 성랑(城廊), 우물, 샘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공사는 승려 각성이 도총섭(都摠攝)으로서 8도의 승군을 동원하여 진행했는데, 이들을 위해 7개의 절을 지었다. 지금은 장경사(長慶寺)만 남아 있다. 그뒤 순조 때까지 여러 시설을 확장했다.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은 상궐(上闕) 73칸 반, 하궐(下闕) 154칸이었다. 1688(숙종 14) 좌덕당(左德堂)을 세웠다. 1711(숙종 37)에 종묘를 모실 좌전(左殿)을 세우고, 남문 안에는 사직을 모실 우실(右室)을 두었다. 1624년에 세운 인화관(人和館客館)1829(순조 29)에 수리했다. 관청으로 좌승당(坐勝堂일장각(日長閣수어청(守禦廳제승헌(制勝軒) 등과 군사기관으로 비장청(裨將廳교련관청(敎鍊官廳기패관청(旗牌官廳) 등을 두었다. 또한 종각·마구(馬廏뇌옥(牢獄온조왕묘·성황당·여단(塾壇) 등을 두고, 승군을 총괄하는 승도청(僧徒廳)을 두었다. 남한산성의 수비는 총융청이 맡아 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여기에는 전····후의 5(五管)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前營將)은 남장대(南將臺),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진을 치고 있었다. 지금은 서장대(일명 守禦將臺)만 남아 있다. 이밖에 현절사(顯節祠연무관(演武館지수당(池水堂영월정(迎月亭침과정(枕戈亭) 등이 있다. 1636(인조 14)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했으나,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에 항복하는 굴욕을 당했다. 오늘날까지 여러 차례 보수를 하고 197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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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jpg-대단위 택지개발로 지형이 변한 마천지구의 남한산성 자락- 

대단위 택지개발로 지형이 완전히 변해버린 마천지구

29()아침 배낭을 꾸려 마천역에서 선배님을 뵙고 남한산성으로 향하는 길목인 마천지구는 대규모 택지개발로 지형이 현저하게 변해버려 준비한 지도가 무용지물이니 예정했던 코스를 따르기엔 무리라 감으로 건설현장을 넘나들어 터널공사가 한창인 계곡에서 일장천(日長泉)약수터에 이르러서야 겨우 독도가 가능했다. 일장천약수터에서 청량산497.1m(수어장대)에 이르기 까지는 250m가량의 고도차를 극복해야하기 때문에 힘든 구간인데, 구름이 많아 조망권이 없어 연주봉옹성에 이르는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졌는데 때마침 싸라기눈까지 내렸고, 선배님께서는 떠밀려서 17시에 월계동성당의 모임에 참석키로 약속하셨고, 힘들어하신 눈치가 보여 예정된 일정대로 진행하기는 무리란 판단에, 단축코스로 변경하기로 결론짓고 남문(지화문)에서 급하게 성남누비길로 방향전환 아기자기한 재미를 공감하며 불망비(不忘碑)를 경유해 8호선산성역에 도착하는 순간이 놀며 쉬며 쉬엄쉬엄즐기던 넉넉한 산행을 마감하는 깃점이다.(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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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jpg-일장천약수터에서 독도, 오르막 등산로에 들어선다.-

테뫼식, 북한산성과 포곡식, 남한산성의 특성과 운용 목적
조선국(朝鮮國)의 수도인 한양도성 방어용이자 저지선이며 궁궐을 비롯한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북한산성과, 서울을 남북으로 나누고 효과적으로 이용하려는 다른 목적의 산성중의 하나인 남한산성은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인조 2)에 축성했다. 두 산성은 여러 가지로 차이점이 있다.
북한산성(北漢山城)은 북한산의 암봉들을 빙 둘러 쌓은 산성이다. 이를 테뫼식산성이라고 하는데 뫼(봉우리)에 테두리를 둘렀다는 의미로 적의 직접적인 공격을 막는 데는 유리하지만, 산꼭대기에 있어, 장기간 포위당하는 지구전에는 불리하며 보급, 특히 식수가 문제다. 그 반대로는 포곡식(抱谷式) 산성이 있는데 성안에 비교적 넓은 골짜기가 있고, 물이 풍부하다. 큰 성에는 촌락과 농경지까지 있어 장기 농성에 강점이 있다. 성곽의 규모도 테뫼식보다 상대적으로 크고, 면적이 넓은 것이 특징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대표적인 포곡식 산성이 바로 남한산성(南漢山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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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jpg-남한산성 성벽, 수어장대 담장, 돌탑군락-

조선16대 임금님 인조(재위26) 집권 14년의 병자호란(丙子胡亂)
병자호란(丙子胡亂)이란 1636(병자년) 12월 청나라 태종(홍타이지)2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 사건이다. 정묘호란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침략하였으나 실제로는 명을 공격하기 전 조선을 군사적으로 복종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으로 옹립된 인조는 집권 14년만에 궁궐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피하여 적의 포위 속에서 혹한과 싸우며 버텼으나 식량마저 끊어져 청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1637130일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에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항복하는 의식을 치르며 전쟁이 끝났다. 비교적 짧은 전쟁 기간에도 불구하고 항복 후 엄청난 전쟁 포로가 발생하면서 조선은 막대한 피해를 받았던 사건이다.

수많은 역사학자는 물론 소설과 영화 또는 드라마로 조명한 사건이니 더 이상의 거론이 불필요할지도 모르겠지만 병자호란(丙子胡亂)은 조선 제16대 인조(재위26)임금님 14년에 일어난 비극적인 국난으로, 광해군의 개혁정치가 못마땅하다고 반정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수구세력들은 정권욕만 있었을 뿐으로 국가를 어떻게 운영(運營)할 것인지? 비전이나 철학의부제로 국민의 생명과 재산, 국토를 지켜야하는 중차대한 국방과 정치는 소홀하고 권력에만 눈이 어두워 개인욕심 채우기에 급급하느라 남한산성 축성 뒤 이시백 유사시에 대비할 기동훈련 실시를 건의하여, 12,700명을 동원 훈련을 실시했으나, 12월 막상 청나라가 국토를 유린하는 침략전쟁이 일어나자 싸워보지도 못하고 탁상공론만 벌이느라 막대한 노력과 비용으로 쌓은 남한산성은 활용하지도 못해보고 항복하는 한미한 민족이란 뼈아픈 역사의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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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jpg-구름때문에 동문에서 하산을 결심한다. 비석거리-


조선 인조께서 오랑캐 청나라 황제에게 삼전도 굴욕 항복
1. 인조는 세자와 신하들을 이끌고 남한산성 문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고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굴욕적인 항복
2. 청나라 황제는 인조의 항복을 받고, 내용을 비석에 새겨 그 자리에 삼전도비(三田島碑)를 세우게 했을 뿐아니라,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빈궁(嬪宮), 봉림대군(鳳林大君, 후에 孝宗)비롯하여, 척화(斥和)의 주모자인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를 잡아 철군하며 수많은 부녀자와 양민들을 닥치는 대로 인질로 붙잡아가 환향녀(還鄕女)란 슬픈 어원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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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시 보호노거수, 신성역으로 방향을 잡고 하산한다-


아쉬움으로 남아있는 역사를 돌이켜보면 답답하기만 하다.
호란이 일어난 인조임금 때(1636년)의 조선인구(朝鮮人口)  1,100만 명 내외로 국가를 지켜내고 침략군을 섬멸해낼 병력10만명 유지하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는 사실이며, 누루하치가 20,000명의 침략군을 이끌고 왔을 때 남한산성 조선군은 14,000명이였으니 숫자상으론 방어가 가능했으나, 국론이 분열되고, 훈련이 안된 군사들과 부패한 지배계급 그리고 국가의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늙은 국가와 무능한 군왕(君王)으론 역부족으로 파편은 힘없는 백성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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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jpg-이번 산행에서 처음 만난 불망비, 누리길의 마을유래 판-

부족하나마 2021년도는 85번째 산행으로 송년 피날레 한다.
산행을 끝낸 시간이 점심시간을 훨씬 넘긴 1438분에 산성역1번 출구에 닿았다. 식당근로자들의 휴게시간과 겹친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바쁜데 식당 간판이 보이지 않아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어렵게 간판을 찾았는데 영업장소가 2층이다 올라서 식사가능한지를 확인하고 1층으로 내려와 선배님을 안내해 대구볼때기와 식사를 주문하고 막걸리와 소주를 시켜 건배하는 의식으로 2021년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송년 산행을 자축하고, 2022년 새해에는 괴질(코로나바이러스)에서 자유롭고 백성들은 생업에 충실해 국태민안(國泰民安)하고, 선배님의 안녕은 물론이고, 내가 기억하고 나를 아는 모든 분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진솔한 마음을 술잔에 담아 건배로 자축하는 의식을 대신한다. 금년도엔 85번째가 송년 산행이라 조금은 아쉽다. 사연인즉 지난여름(612일 토요일) 월악산행 중에 비에 젖은 바위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어깨탈골 부상을 당해 헬기로 후송, 2달 가까운 치료기간 산행에 나서지 못했던 까닭으로 목표했던 100회 산행에서 15회나 모라자란 초라한 성적으로 2021년도를 마감하는 심경은 한마디로 안타깝다새해에는 질병에서 자유롭고 근심걱정거리가 많이 줄어들기를 기원하는 간절한 바램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

~오라는 곳도 불러준 이도 없지만 찾아가 안기면 언제나 포근하기만 한 을 찾아서 ~

2021-12-31
계백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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