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 산행기


   어느 고장 하면 연상되어 떠오르는 산이 있다. 광주의 무등산, 목포의 유달산, 대구의 팔공산, 서울의 북한산 그리고 대전의 계룡산. 어느 고장 하면 어느 산이 떠오른다는 것은 그만큼 그 고장의 사람들에게는 가슴 깊이 박혀 있고, 산의 정기가 그 고장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흐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대전의 계룡산. 계룡산을 대학교 때 처음 만나고 지금까지 참으로 많이도 다녀왔다. 어느 날은 먼발치에서 지켜만 보다 오고, 어느 날은 손목 언저리만 잡고서 아쉬워하다 돌아오고, 어느 날은 가슴에 파묻히어 사정없이 울다 돌아오고---- 또 언제 어느 날 저 산을 찾아 가 울고 웃다 올 것인지---
   오늘은 혼자다. 가족을 떼어놓고, 세상을 남겨놓고, 바람 속으로 산 속으로 오늘은 혼자다. 혼자 가는 산행은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산행길이 길어질수록, 산행길이 높아질수록 깊은 곳에 묻혀 있던 깊은 곳에 숨어 있던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산행을 시작한다. 가을로 접어드는 길목이라 그런지 계룡산의 풍경이 선명하다. 천왕봉에서부터 흘러내린 병풍 같은 산줄기. 언제 보아도 선의 오르내림이 참으로 아름답다. 장군봉에서부터 한바퀴 죽--둘러본 후 품속으로 안겨든다. 단풍이 들려면 아직 3주정도 남아 있어서인지 동학사 입구의 신록이 그대로다. 투명한 바람 속에서 푸르른 잎새를 흔들고 있는 나무들. 나무들의 밑동을 감싸고 흐르는 맑고 맑은 시냇물. 희미하면서도 뿌연 물안개와 햇살의 스밈. 동학사 입구의 풍경은 언제 보아도 신선하고 깊다는 느낌을 받는다. 산사 초입에 이만한 품을 안고 있는 산사가 우리 나라에 몇이나 될까. 가야산 해인사 정도?? 그 외에는 언뜻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무 밑은 지나는데 어깨위로 툭툭 눈물이 떨어진다. 고개를 들어보니 나무들이 흘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어찌 눈물이 나오지 않을 수 있을까? 조금 있으면 다가올 저 긴 이별 앞에서---그러고 보니 나무들이 참 슬퍼 보인다. 모두가 슬픈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 같다. 싱그럽지 않은 저 푸르른 신록. 저렇게 참다 한꺼번에 와락 울음을 쏟아버리겠지.
   수많은 세월을 저 쓰리고 아픈 이별을 하느라 가슴마다에 단단한 심이 박혀 버린 나무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이별을 거쳐 이곳까지 왔는가. 이별은 또 얼마나 단단한 아픔으로 가슴속 나이테가 되어 남아 있는가. 입술을 꼬옥 깨물며 남매탑 길로 접어든다.
   남매탑까지 오르는데 1시간여. 빠른 페이스로 올라왔다. 땀이 제법 흐르고 숨이 차다. 잘다듬어진 산행길을 따라, 가족이 오르고, 연인이 오르고, 전문 산악인이 오르고, 계룡산은 그러고 보면 가벼운 산책에서부터 어려운 산행을 하는 사람까지 참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고 있는 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제2의 국립공원이 되었겠지. 이런 산을 30분 이내면 언제라도 달려 올 수 있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햇살을 받으며 서 있는 남매탑은 언제 보아도 수수한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7층, 4층. 투박하고 잘 다듬어지지 않은 저 탑은 이곳의 풍경과 참으로 잘 어울린다. 계곡을 타고 올라온 바람과 그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 빗각으로 명암을 더해주고 있는 햇살. 바람과 탑, 동과 정의 저 절묘한 조화와 나무 사이로 흐르는 희미한 햇살의 어스름이 한폭의 묘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고 있다. 숨이 가빠올 딱 그 지점에서 등산객들을 맞아주는 저 탑이 없었다면 삼불봉까지의 산행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한참을 시선을 빼앗기다 삼불봉으로 향한다.
   삼불봉으로 가는 길. 금잔디 고개까지 오르면 산의 오름질은 끝이 난 셈이다. 그런데 이곳을 지날 때마다 아쉬운 것이 하나 있다. 예전엔 이곳에 막걸리를 팔던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한사발에 이천원씩이나 하였지만, 관음봉에서 삼불봉을 거쳐오거나, 남매탑을 거쳐 이곳까지 오거나 한입에 쭈-욱 들이키는 막걸리 맛은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시원함이었는데, 동학사 입구의 상가에서 자꾸만 민원이 들어오고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단속을 하여 지금은 그 맛을 볼 수가 없다. 얄팍한 상술에 밀린 등산객의 즐거움이 아쉽기만 하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30분여. 드디어 삼불봉이다. 삼불봉. 철계단을 한참 힘겹게 오르다 갑자기 맞닥트리게 되는 세상. 갑자기 몰아치는 바람. 모자를 꼬옥 움켜쥐고 바위 위에 선다. 와! 와! 소리만을 반복하는 등산객들. 야호 소리도 지르지 못한다.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이 아름다운 풍경을--
   서쪽으로는 천왕봉에서부터 흘러내린 봉우리들이 웅장하게 버티고 서 있고, 관음봉에서부터 삼불봉으로 이어지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바위들의 행렬. 황적봉 너머 대둔산, 덕유산으로 이어지는 높고 낮은 산들의 조망. 대전을 둘러싸고 있는 보문산, 식장장, 서대산, 계족산 등을 차례차례 살펴보다 시선은 어느새 신행정수도 후보지로 유명해진 대평리 들을 지나 천안의 광덕산, 청양의 칠갑산 자락까지 달려간다. 삼불봉의 해발이 700여미터 밖에 되지 않는데 어느 산의 어느 봉우리에서 이만한 풍광을 조망할 수 있을까. 한참을 넋을 놓고 있다가 관음봉으로 이어지는 자연성릉이 자꾸만 발길을 불러 길을 나선다.
   삼불봉에서부터 관음봉으로 이어지는 1.8키로미터의 자연성릉. 계룡산 등산 최고의 아름다움이 아닐 수 없다. 험하지도 짧지도 않으면서 어느 바위 어느 장소에서도 조망이 가능한  능선을 걷고 있노라면, 정말 저 멀리 조그마하게 보이는 세상 속으로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가까워지는 관음봉의 품속과 모습을 드러내는 삼불봉의 바위들. 수시로 모습을 바꾸며 나타나는 조망과 바람의 시원함이 산행의 극치를 더해준다.
   어느새 능선의 자락을 타고 단풍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들녘은 황금색과 초록색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멀리 들녘 한가운데에는 하늘 한 조각이 떨어져 나와 저수지를 만들었다. 참 맑고 정갈한 풍경이다.
   아무 생각 없이 투벅투벅 능선을 걷다보니 깊은 곳에 숨어 있던 때묻지 않은 나를 만난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산 속으로 깊이 들어올수록, 능선을 타고 높이 올라올수록 생각의 발길은 끝없이 마음 속 깊은 곳으로 향하고, 거기 몇번인가의 꺼풀을 벗고서야 만날 수 있는 순수한 자연인으로서의 나를 발견한다. 늘 저 모습으로 살아야 되는데--- 늘 저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하는데--- 깨끗한 계곡의 물이 도시로 나가 더럽혀지듯, 나는 세상 속에서 얼마나 찌들어 있는가. 1주일에 한번만이라도 이렇게 산에 올라와 씻어주지 않으면 금방 숨이 멎어 버릴 것만 같다.
   관음봉에 오른다. 이제까지 걸어 온 삼불봉이 한눈에 들어오고, 연천봉의 능선과 공주부근의 파도치는 듯한 산줄기들이 반긴다. 무엇보다도 한눈에 들어오는 황산벌의 너른 평야. 잠시 계백의 슬픔을 어찌 느끼지 않을 수 있으랴!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계룡산의 줄기는 여자의 음부를 닮았다. 동학사는 그 초입에 절묘하게 자리를 잡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저 절에는 여승들이 사는 것인가??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한 것이 기억난다. 대한민국의 기란 기는 전부 똘똘 뭉치에 계룡산 자락으로 숨어 든다고, 그만큼 계룡산의 정기가 좋다는 이야기인데--눈을 들어 대전을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들을 살펴보다 깜짝 놀란다. 모든 산들이 대전을 향해 줄기차게 달려오다 어느 범접하지 못할 신성한 땅이라도 만난 듯 갑자기 발길을 멈춰 버린 것 같은 형상이다. 아니다 다시보니 파도치듯 산줄기들이 기란 기를 모아서 싣고 와서는 대전 땅에다 모두 쏟아 붓고 있는 형상이다. 저 땅을 자기 아들처럼 감싸 안고 있는 계룡산---
   이제 하산이다. 관음봉에서 은선폭포를 거쳐 동학사로--- 꽤 늦은 오후인데도 아이들 손을 잡고, 연인들이 손을 잡고 등산객은 끊임없이 올라온다. 이제 내가 다시 세상과 손잡으러 이 길을 내려가듯 저들은 이제 서로의 마음까지 끌어안고 이 길을 내려오겠지. 1시간 조금 넘는 차분한 하산을 하는 동안 세상은 내 열려진 마음속으로 들어오고 나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동학사 상가에서 파는 아름다운 글귀 중에 오늘따라 유난
 히 눈에 들어오는 글귀가 있다. '처음처럼, 늘 처음처럼'. 살아가는 일, 사랑하는 일 모두 처음 마음먹은 그 때처럼, 처음 만난 그 때처럼만 간직하길--
   3시간 30분의 계룡산 산행을 마치며 다시 계룡산을 뒤돌아본다. 계룡산은 그대로 인데 나는 어느새 저 비린내 나는 포구의 소금끼를 털어 내고 맑고 깊은 바다에서 막 올라온 파도 한줄기가 되어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