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 산행기/ 포토 에세이
<2005. 2.4(입춘)/도봉산역-광륜사-도산서원-도봉산장-천축사-마당바위-주봉-신선대-포대능선-송추/내 아내의 유랑의 남편과>

*. 왜 도봉산이라 이름 했을까
오늘은 봄이 시작된다는 24절기의 시작이라는 입춘 날, 설을 앞두고 산행을 합니다.하늘도 입춘을 기억하는가.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던 추위가 약간은 물러갔습니다. 옛날에는 19번 버스를 타고 도봉파출소를 지나 검표소에 이르렀는데, 지금은 도봉산역에 내려서 우르르 몰려가는 산꾼 따라 가는데 길도 옛날 가던 큰 길이 아닙니다. 오른쪽의 그림 같이 조용하던  동네가 온통 상가로 바뀌어 상혼이 요란합니다. 등산용구 집 아니면 술집이나 음식점이 길 양쪽에 도열해 있고, 그냥 지나치기에 미안할 정도로 호객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빈 벽이나 전봇대에는 예외없이 산악회에서 비닐봉지에 묶어 넣어놓은 팸플릿이  어느 산 입구보다도 더 요란합니다.
북한산과 함께 도봉산은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단일 면적에 가장 많은 등산객이 모여든다는 북한산국립공원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다른 산 같으면 감추어 있을 산의 정상이 도봉산은 역에서부터 우람한 도봉산의 세봉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봉을 향하여 한발자국 한발자국씩 다가 가까이 가는 것이 도봉산 산행입니다.
그런데 왜 '도봉산(道峰山)이라 했을까 해서 여러 문헌과 인터넷 사이트를 아무리 뒤져봐도 어디에도 그 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추측을 하여 보았습니다.
옛날에 도봉산 앞을 지나는 길을 평구도(平丘道)라 했습니다. 양주에 공무로 다니는 벼슬아치에게 마필을 이바지하던 역(驛)인 평구역(平丘驛)이 있었거든요. 그때 그 길은 걷거나 가마를 타거나 아니면 마부가 끄는 말을 타고 다녔지요.
그런데 역(驛)과 역(驛) 사이에 길을 가다가 공무를 보는 벼슬아치나 길손이 쉬거나 묵어 가는 원(院)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보통은 30리 간격으로 있었다는데 이상하게도 이 길에는 원(院)이 유난히 촘촘히 많았습니다.
지금 남아있는 원(院)만 해도 그 이름도 운치 있는 서낭당의 무수원(無愁院)을 위시해서 다락원(多樂院), 장수원(長水院), 호원(虎院) 등이 그것이지요. 지금 같이 길가에 집이 없이 허허벌판이던 길에 동쪽의 불암산, 수락산도 그렇지만, 그보다 더 가까이 있는   서쪽의 깎아지르는 듯이 수직으로 서있는 백색의 도봉산의 우이암, 주봉, 만장봉, 자운봉을 위시해서 사패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수많은 봉들은  지자요수(知者樂水)요 인자요산(仁者樂山)의 경지를 숭상하는 선비들에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길에서 봉우리를 우러러 보는 산이라 해서 길 道(도), 봉우리 峰(봉), 도봉산(道峰山)이라 하지 않았을까요?

*. 도봉산의 바위 글씨들

그래서인가 도봉산 산행 길에는 발길을 멈추게 하는 바위 글씨가 어느 곳보다도 유난히 많습니다.
도봉산검표소에서 얼마 올라 도봉계곡 우측에 도봉산의 입구임을 알리는 ‘道峰洞門’(도봉동문)이라 쓰여 있는 바위 글씨가 있습니다. 숙종 때의 대현(大賢) 우암 송시열(宋時烈) 선생의 친필이랍니다.

도봉산을 옛 선인들은 어떻게 노래하였가를 이 도봉산 계곡의 바위 글씨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다음 자료는  ‘바위글씨 展’(서울역사박물관 간행)을 일부 참고하였습니다.
‘第一洞天’(제일동천)이란 바위 글씨는 우리 도봉산의 경치가 천하의 제일이라는 자부심의 표현입니다. 그 옆에 이런 글씨가 있습니다.
‘洞天卽仙境 洞口是桃源’(동천즉선경 동구시도원)  ‘동천(洞天) 안은 곧 신선이 사는 경치 좋은 곳이요, 동천 입구는 바로 무릉도원이로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동천(洞天)이란  물론 산과 내에 둘려 싸인 경치 좋은 곳으로 바로 도봉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바위 글씨 옆에 다음과 같은7언절구가 도봉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연하가 가득 쌓인 곳에         烟霞籠處洞門開(연하농처동문개)
동문(洞門)이 열리니              
그곳이 구름 낀 산을 향하여  地向雲山物外闢 (지양운산물외벽)
물외(物外)에 있네.
만장봉은 높디높고               萬丈峰高丹窟深 (만장봉고단굴심)
연단굴(練丹窟)은 깊으니
조화옹이 이 좋은                 化翁간秘玆泉石 (화옹간비자천석) * 아낄 (간)
천석(泉石)을 아껴서 감추었네.
   -정축9월도봉초추         丁丑九月道峯樵叟(정축구월도봉초수)

이 글을 쓴 이가 스스로를, 도봉을 사랑하는 ‘초수(樵叟)’라 했으니, 초수는 초옹(樵翁이)라 자신을 늙은 나무꾼이라 했으니  일만도 정축년 생의 보잘 것 없는 산꾼이지만 산을 사랑하는 것만은 시대는 서로 달리하였어도 같은 초수(樵叟)’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옛날에 서민들의 우상은 효자열녀였고, 양반들이나 유학(幼學)과 한량(閑良)들의 우상은 선비였습니다. 그 선비 중의 선비인 정암 조광조나 우암 송시열 선생을 모신 곳으로 서울에 단 한 곳 남아있다는 도봉서원(道峯書院)이지만 굳게 잠겨 있습니다.
위의 왼쪽 그림이 작자 미상의 18세기 후반의 그림이고, 오른쪽이 오늘날 서원의 모습입니다.
그냥 지나가려는데 운치 있게도 ‘침류대 터(枕流臺址)’란 표석이 눈길을 잡습니다. 베개 ‘枕’(침), 흐를 ‘流’(류)이니 계곡물을 베개 삼아 누워 즐기는 곳이랍니다.
조선 인조 때 유희경이 이곳 계곡 바위에 누각을 짓고 당시 유명한 명사들과 이곳에 모여 시회(詩會)를 가졌다는 곳입니다. 유희경은 서인(庶人)으로서 종2품인 가의대부까지 오른 분입니다만 알려지기로는 그의 연인인 부안의 명기 매창(계량)의 사랑 속에 꽃 핀 시조 한 수로 후세에 유명해진 사람입니다.

이화우(李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계량


이 침류대 터(枕流臺址)’ 아래를 조금만이라도 자세히 살펴보신다면 해서체의  다음과 같은 바위 글씨를 찾아 볼 수가 있지지만 많은 세월이 흘러서인가 맨 아래 글자는 물속에 잠겨 있었습니다.

‘高山仰止 庚辰七月 金壽增’


높은 산처럼 우러러 사모합니다.’라는 뜻으로 시경(詩慶)에 나오는 글인데 이 글을 쓴  곡은 김수증 선생은 1700년(숙종 26년) 사람이지요.
그 위로 더 오르면 계곡에 무우대(舞雩臺)라 쓴 바위 글씨가 남아있어서 일만이 시조로 번역해 봅니다. 이 세상에 서 우리 나라만이 가지고 있는 정형시 시조로 말입니다.  무우대(舞雩臺)란 효경(孝經)을 쓴 공자의 제자가 스승의 물음에  
"늦은 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어른 5, 6명과 무우(舞雩)에서 바람쐬며 노래하면서 돌아 오겠습니다."
라고 답한데서 유래한 글자입니다. 그 무우대(舞雩臺) 바위 글씨로 이런 글이 그 오른쪽에 쓰여 있어 역시 시조로 번역합니다.
‘霽月光風更別傳 聊將絃誦答潺湲 華陽老夫書 ’(제월광풍갱별전 요장편송답잔원 화양노부서 )

비 갠 뒤 달빛 풍광(風光) 특별한 정취 전하여
오로지 거문고에 시 한 수 읊조리니  
저 계류
소리에 화답하며
제월광풍(霽月光風) 되라 하네.
                   -일만 역


화양노부(華陽老夫書)란 우암 송시열 선생으로 1668년(현종 9)에 62세 나이로 이곳 도산서원에 와서 정암 조광조 사당에 참배한 후 서원 학생들의 요청으로 썼다는 글입니다.
도봉산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옛날분들뿐이겠습니까.
제가 지나쳐온 상가 근처에 있는 시비  ‘천축사로 가는 길’(목필균 시)도 그렇지만,  방금 지나쳐온 미륵불이 특히 멋진 법륜사(法輪寺) 바로 위의 녹야원(鹿野苑)과 자운봉 갈림길의 이정표를 조금 지나서 우측에 있는 소설가 이병주의 ‘북한산 찬가’ 시비는 도봉산을 사랑하는 우리들의 마음을 이렇게 대변하여 주고 있습니다.

나는 북한산과의 만남을 계기로
人生 이전과 人生 이후로 나눈다.
내가 겪은 모든 屈辱은
내 스스로 사서 당한  굴욕이란
것을 알았다.
나의 挫折 나의 失敗는
오로지 그 원인이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다.
親舊의 背信은 내가 먼저
배신했기 때문의 결과이고
愛人의 變心은 내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의 결과라는 것을
안 것도 北漢山上에서 이다.
   -<산을 생각한다>에서

*. 가장 아름다운 산 중의 한국 사찰
아취 모양의 멋진 서원교(書院橋)를 지나갑니다. 여기서부터 자연관찰로가 시작되는 곳으로 만장봉까지 2.2km, 우이동까지는 2km랍니다.
만장봉을 향해 가는 길에 청량교 넘어 금강암(金剛庵)이 있습니다. 쌍사자가 받치고 있는 석등과 5층 고탑 층계 위에 대웅전이 고즈넉한 한겨울 한낮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정표가 묻고 있습니다.  0.6km의 경찰구조대로 해서 우측 길 1.3km의 자운봉을 갈 것인가. 아니면 좌측 길 마당바위 0.7km로 해서 1.4km의 자운봉을 갈 것인가.
30여 년 전 명륜동에 살 때 주로 다니던 마당바위 쪽으로 갑니다. 젊은이는 추억을 만들며 살고, 나이들면 추억을 먹고살게 되는 것이 사람인 모양입니다.
천축사 쪽에 있는 도봉산대피소는 옛날과 같은데 당시에 없던 등산학교가 벌써 30년을 넘었답니다. 그때 여기를 지키던 털보아저씨는 세대교체가 되었는가 안 보이고 그이 대신 할머니 한 분이 추운 홀을 지키며 차를 팔고 있더군요.
여름에 여기서 일박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3,000원이랍니다. 지리산 뱀사골대피소나 연하천대피소, 치발목대피소 같이 옛 건물이거든요. 새로 지은 대피소는 어디서나 5,000천원씩을 받고 있지요.
천축사를 가고 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곧 나타날 것 같았는데 도봉매표소에서 2.4km나 되는 너무나 먼 곳에 천축사가 있더군요.


천축사 층계 오른쪽의 수석 같은 바위를 지나니  이제는 710m 만장봉이 바로 머리 위에 있습니다. 저 아래 모래함에서 주머니에 담은 기와를 지고 오는 사람은 점심을 무료로 주고, 사먹을 사람은 1,000원이라는데 가서 보니 엄두를 못 낼 만큼 사람들이 바글바글 하더군요.
천축사는 신라 시절 의상대사가 짓고 그 물맛이 좋아서 이름을 옥천암(玉泉庵)이라 하던 것을, 함흥차사(咸興差使) 사건을 겪은 이태조가 함흥에서 돌아오다가, 만장이나 되는 미륵봉에 백일기도를 올릴 때에 이곳은 부처님이 상주하는 곳이라 하여 천축사(天竺寺)라 절 이름을 사액(賜額)하여 주었다는 곳입니다.
그러나 불신자가 아닌 우리네 눈에 제일 인상이 깊은 곳은 두 군데입니다.
하나는 입구에서 제일 먼 곳에 있는 현대식 삼층 건물 선원(禪院)입니다. 이곳은 참선하는 곳으로 옛날 면벽구년(面壁九年)하던 달마대사처럼 한 번 들어가면 3년~ 6년 나오지 않고 참선만 하는 곳이랍니다. 밥도 감방처럼 창문을 통하여 준답니다.
또 하나는 절 입구에 있는 큰 인형 크기 만한 준수한 수많은 동상들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부처님 한 분 한 분은 개인의 시주로 만든 것으로 그 공양주 선남선녀들의 이름이나 가족이름이 발밑에 적어 놓았거나 조각되어 있는 것을 보니 순수한 불심보다는  기복 신앙 같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옹달샘에서 목을 축이고 만장봉을 향하여 가는데 소나무 한 구루가 돌을 비켜 꾸부렁 하게 위로 자란 것이 부처님이 화두(話頭)를 우리들에게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돌은 환경이요, 소나무는 사람입니다.  생활에서 무리 수를 두거나, 자식을 제 욕심대로만 키우려다 좌절하지 말고, 아내나 친구나 주위 사람들과 다툼이 있어도 비켜 가라는 그런 게시를 소나무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말하여 주고 있는 듯합니다.
일만은 정년 후 매년 지중해, 북유럽, 서유럽, 동유럽 등을 작년까지 다녀왔습니다.
어쩌면 속절없이 보낼 내 인생에 마지막으로 주어진 시간적 여유를 가치있는 일에 투자해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 하나가 해외여행 기행문을 쓰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유럽 여행은 기독교 성지 여행 같이 어느 나라를 가거나 모든 도시가 박물관입니다. 기독교 박물관 말입니다. 바티칸국은 그중에서도 극치였습니다. 우리가 거기서 부러워하고 감탄하며 보며 다니면서, 서양인이 우리나라에 와서는 무엇을 보고 갈까를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하여 그중의 하나가 우리나라의 산입니다. 서양의 나라들은 스위스 주변의 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산이 없는 지평선의 나라입니다. 폴란드의 ‘폴’이 평야란 말이고, 파리에서 제일 높다는 몽마르트가 130m 밖에 되지 않거든요.
우리나라 산의 가장 아름다운 곳에는 반드시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절입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어도 유럽의 성당과 교회를 둘러보듯이, 불교 신자가 아니어도 외국인들이 둘러보고 갈 곳이 바로 우리나라의 사찰입니다. 우리가 사찰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할 이유가 바로 그래서라고 생각합니다.

마당바위는 어디에서나 전망대요, 휴게소이며 나그네가 쉬어간다는 옛날의 산에 있는 원(院)입니다. 옛날에는 이곳에서 시원한 막걸리 한 잔을 마셨는데 그런 잡상인이 지금은 없어 약간은 서운합니다.
저 멀리 도봉능선 끝에 수유리 우이동(牛耳洞)의 어원이 되는 소의 귀 모양의 542m 우이암(牛耳岩)이 우뚝한데 그 넘어 북한산이 푸르스름한 얼굴로 발돋움하여 도봉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마당 바위에서 400m 더 간 곳에 이정표를 보고 150m라는 주봉을 향합니다.  산의 주봉(主峰)이 아니라 기둥같이 생겼다고 해서 기둥 '주(柱)' 자  주봉(柱峰))입니다.
능선 하늘이 보이는 도중에 점심을 먹습니다. 동내에서 사온 1,000원 짜리 차디찬 김밥이지만 꿀맛입니다. 노동과 흘린 땀의 소중함 때문입니다. 벌써 늦은 2시가 넘은 시간입니다.
주봉 뒤통수를 보고 가는 도봉산 주능선 길입니다.

*. 두려웠던 V자 형 오르 내림 길
지금부터 도봉의 참모습을 오랜만에 보게 되니 더럭 겁이 납니다. 도봉은 바라보기만 해도 수려한 산이지만 아기자기한 재미를 주는 기암괴석의 남성적인 커다란 수석을 바라보는 듯한 암산이지만, 위험한 대가를 치러야 통과할 수 있는 곳이 곳곳에 있는 험산이기에 말입니다. 젊어서도 두려워 피해 돌아 다니던 길었으니요.

일찍이 김시습은 산에 와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이 글 역시 시조로 번역해 봅니다.
登山則思學其高  臨水則思其淸 坐石則學其堅 看松則思學其貞 對月則思學其明
       (등산즉사학기고 임수즉사기청 좌석즉학기견 간송즉사학기정 대월즉사학기명)
            -雜著, 無思第一
                     -동봉 김시습

등산이나 물가에선, 높이와 그 맑음을
바위에선 굳셈을, 소나무 보곤 곧음을
달에선
맑고 밝음을
배울 것을 생각하라
                   -일만 시조 역


도움 쇠줄이 자주 나타나기 시작하고 노송과 어울린 봉우리들 사이로 만장봉에 가려 있던 자운봉과 선인봉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신선대지역은 위험지역이라고 좌측 탐방로를 이용하라’는 위험지역 안내판이 나오지만 이 말을 따르다가는 국도와 상계지역 넘어 수락산 불암산의 찬란한 경치를 보고 촬영하는 것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오늘은 무리를 해서라도 올라야만 합니다. 언제 다니 또 이 험한 코스를 오겠어요? 새해가 올 때마다 부디 금년 같이만 새해를 살게 하소서' 기도하는 나이에-.
세밑 설날 연휴 직전이라 오늘 따라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신선대 오르기 전의 길은 눈 덮인 미끄러운 길이어서 아니젠을 하고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걱정스레 수없이 물었습니다, 처음 가는 사람처럼. 수십 년 전에 수 십번 다니던 길이지만 이렇게 하는 것은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우리 친구들은 벌써부터 이런 위험한 산행을 접은 지가 오래되었거든요. 이런 마음이 초보운전자에게는 그 복잡하고 위험하다는 시내 운전에서도 안전 운전케 하는 기술이 되는 것이지요.
 용을 쓰고 사력을 다하는 곳은 몇 군데가 아니었지만 밧줄을 타고 손이 미끌어 질까봐 장갑을 벗고 오르다가, 로프가 끝나는 곳에서는 바위 타기는 내게는 너무 버거운 일이었습니다. 내려오는 한 젊은이의 떨던 발과 오금을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드디어 나타나는 탁 트인 시야, 오랫동안 살던 공주능 근처 장위동도, 불암산, 수락산도, 당시에는 텅 비었던 상계동과 마들 평야가 이제는 아파트 촌으로 빽뻭이 들어찬 모습들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백문불여일견이라 했으니 보세요. 저 경치를-.

올라오는 길도 그랬지만 내려가는 모든 곳에 도움 쇠줄과 밧줄이 있어서 생각같이 어렵지만은 않았습니다. 힘들여 오르내리다가 내려다보거나 올려다 보면 옛날에 오르내리던 길입니다.
그러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나는 산꾼인가.
산꾼이기엔 부족하지만 대신 저는 낚시꾼이요, 역마살의 나그네요, 술꾼이요, Ham 이요, 40년 이상의의 사력(寫歷)을 가진 카메라 맨이요, 시인이요 수필가라고 그 부족함을 보충해 주고 싶습니다. 젊어서부터 많은 분야를 욕심 내며 살았지만 아무것도 이룩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즐거운 추억만은 풍성합니다.

*. 고쳐야 할 '송추(松湫)의 어원'
포대 능선에서부터는 무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능선을 버리고 자취눈에 난 황토 흙길 발자국 따라 사패산을 향하여 왼쪽으로 왼쪽으로 가다 보니 이정표가 있습니다. 전방 1.2km 더 가면 사패산입니다. 거길 다녀와서 하산하기에는 서산에 지는 해를 보니 늦었습니다. 이제 송추 매표소까지는 1.8km만 가면 되니 서둘러 하산해서 오늘 밤 8시에 한다는 이집트와의 월드컵 한국대표팀의 최종 평가전을 봐야 합니다.

해는 뉘엿뉘엿지고 있고, 일만은 귀가 길을 서두르는데 멋진 다리가 이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지는 해가  나만을 위해 떴다 지지 않는 것처럼 저 다리도 나만을 위해 놓여있는 것이 아니지만, 나와 같은 사람을 위해 해가 뜨고 다리가 놓여 있는 아름다운 세상의 하루를 산에서 이렇게 살다 갑니다.

송추매표소 앞에 있는 송추(松湫)의 어원을 풀이한 '송추 유래'에서는 소나무 '松'(송)과 가래나무 '湫('추)라 해서 '이곳은 예로부터 소나무와 가래 나무가 많아서 송추(松湫)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가래나무 '楸'(추) 자는 나무 '木'(목) 변이고, 송추의 '湫'(추) 자는 물 水(수) 변입니다. '소나무와 어우러진 폭포라서 송추(松湫)라 했습니다.'라 고친다면 얼마나 더 좋을까요. 송추폭포가 더욱 빛날 것이니까요.
북한산관리공단과 관계하시는 분이 이 글을 읽으신다면 고치도록 연락하여 주었으면 합니다.
잘못을 알고도 시정하지 않으면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이렇게 다수를 상대하는 잘못을 그대로 방치하면 죄가 되는 일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