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주시작 9시간째 ( 오전 11시 )

 

꼴찌가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꼴찌군이 형성됐다.

산행 초반 선두에 서서 페이스를 조정하던 선배팀과 연대장이 이끄는 선두일행의 간격이 500M 이상 벌어졌다. 술기운으로 가는건지 원래 그런건지 팩소주를 잔뜩마신 연대장의 발길은 아직도 가뿐하다.연대장과 우리의 거리는 시간이 갈수록 멀어질게 분명했다. 우리팀 과 함께 너댓명의 일행들이 버거운 산행을 하는 동안 후미를 맡은 등반대장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온은 급강하 하고 시계는 나빠졌다.

강풍과 눈보라속에서 선두에 대한 추적은 막연하게 진행됐고 그 과정에서 후미의 체력에 손상을 가져왔다. 확트인 설경과 함께해도 힘들 판에 모든 신경은 오로지 눈보라에 갖힌 등산로를 찾는데만 집중 됐다. 우리가 어디쯤 왔는지 알 수 없었고 덕유산 산세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에 비하면 새벽에 진행된 삿갓재까지의 산행은 사치에 가까웠다.

< 아~~하 정말 지친다..>

< 아침을 션찬게 먹긴 했지만 왜 이렇게 배가 고픈지 >  

허기가 올 때 마다 깡깡언 초코바를 하나씩 입에 물었다. 그러나 그때뿐 20~30분만 지나면 다시 허기가 찾아왔다. 동엽령 까지 오는 16Km 의 구간에서 이미 스니커스 초코렛과 , 초코파이등등 모든 비상식의 여유분도 바닥이 났다.

유사시를 대비해 언제부턴가 갖고 다니던 치즈맛의 고칼로리 영양과자까지 나눠 먹고나니갈길이 더욱더 걱정됐다.

군주점버리 할 것두 없이 남은길을 이 눈보라와 싸워야 한다니..

삿갓재에서 탈출한 3명이 부러워졌다.

그나저나 선배가 걱정이 된다.

선배는 이미 한계점이 다다른듯 먹을 것을 줘도 잘 먹지를 못한다.

쉬는 횟수가 잦아졌고 쉴 때 마다 차디찬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동엽령을 지나 20분쯤 지나니 전날 등반대장이 얘기했던 안성으로의 갈림길이 나타났다.

이제부터는 중봉까지 1시간이상 계속 오르막입니다. 단단히들 각오하시고요. 이 고비가 오늘 종주의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등반대장의 당부는 계속 이어졌다

허허 벌판의 오르막이기 때문에 눈보라를 피할때가 마땅치 않을것입니다. 힘들다고 중간에 그냥 서계시면 오늘 같은 날씨에는 매우 위험합니다

오늘 여기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얘기를 등반대장은 몇 번이고 반복했다.

혹시라도 추가 탈출자가 있는지를 알기 위해 등반대장은 우회적으로 의사를 타진하고 있었다.

대장이 얘기를 하는동안

지극한 연배의 두분이 잠시 갈등을 보이고, 선배역시 우리의 눈길을 피한 채 생각에 잠겼다. 아주 오래된 친구라는 50대후반의 두 분은 삿갓재 대피소를 지나면서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햇반과 라면에 고기까지.. 진수성찬의 아침을 드시는게 좀 불안했다.그분들은 새벽내내 쪼그라진 위장에 너무 많은 음식을 쏟아 넣었다.

< 에이 그러게 아침에 내가 두리번 거릴 때 음식좀 나줘주시지내 그럴줄 알았어..>

우리가 얼마 못 먹어서 힘든 거라면 그분들은 너무 많이 먹어 지쳤던 것이다.

 

여보게 날 좋은날 우리 다시 오시게

그러지 뭐 덕유산 처음도 아닌데 ..새털같이 많은날에..허허

나머지 분들은 조심해서 잘 넘어가시오~~~

 

덕유산이 처음이 아니라는 그분들은 결국 안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분들은 오는 내내 힘들어 하면서도 서로가 극진히 위했다.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초로의 지기로서 남은 인생도 산과 함께 서로가 외롭지 않게 보내리라 다짐하는것 같았다.

 

< 오래 오래 건강하게 잘 지내세요 ..>

난 내려가는 두 분의 뒷모습에 우정과 건강을 빌었다.

 

종주 시작 10시간째(오후 12시)

 

드디어 동행하던 선배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고통을 호소했다.

강풍 때문에 중심도 잡기 힘든 오르막 능선 한가운데서 선배는 가던 길을 멈춘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미 남부서 최 형사와 베테랑 박사장도 함박만큼 벌어진 입에서 하얀 김을 토해내고 있었다.

 

사실 선배는 아까 갈림길에서 그 두분과 함께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명색이 산악동호인이고 같이온 일행과 우연히 만난 후배를 놔두고 혼자 내려갈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중봉을 향해 우리에게 이끌리는 표정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 만큼이나 애처러웠지만, 1시간만 버티면 되는 이순간 선배를 내려보낼수 없기는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갈림길을 지나 이미 여러 차례 쉬었지만 또다시  걸음을 멈췄다.

한발로 서있기는 불가능할 정도의 강풍 . 두다리를 곧곧하게 버티고 서있어도 휘청휘청하는 곳에서 우리는 온몸으로 바람을 맞았다.

 

난 뻣뻣해지는 손가락에 감각을 느끼기 위해 쉬는 중간 계속해서 주먹을 쥐락 펴락 했다.

눈속의 돌을 잘못 밟아 발목이 삐끗한 최형사도 고추세운 왼발을 돌리며 발목의 감각을 찾고 있었다.

우리는 체온의 유지를 위해 각자의 방법으로 계속 움직여야 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지만 선배는 눈 밭에 앉아 가쁜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 6편으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