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채봉과 칠성봉 그리고 집선봉으로 이어지는 화채능선이 빤히 내려다 보인다.

눈보라가 날리는 화채능선의 품 속으로 찾아간다.

  

바람에 날리는 눈은 은가루처럼 빛나고

하얗게 쌓인 눈은 곱게 빻아진 쌀가루처럼 풍요로움을 느끼게 한다.

걸음 걸음마다 발바닥으로 전해오는 부드러운 감촉.

화채능선의 품 속은 감미로움과 아늑함으로 포근하다.

  

언제 지나갔는지 알 수 없는 발자국은 사라졌다 나타나곤 한다.

쌓인 눈이 얼어서 미끄러운 경사지를 스키 타듯이 신나게 내려간다.

빠른 속도감은 넘어질까의 조바심을 잊게 하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휘몰아 친 북풍의 매서움은 능선에 쌓인 눈 위에

호수의 파문을 순간적으로 동결시켜 옮긴 것과 같은 바람결 무늬를 남기고 있다.

  

마음을 비울 수 없어 무거워진 육신을 호수에 빠뜨리고자 한 걸음 한 걸음 옮기지만

몸은 빠지지 않고 발목만 빠져서 허우적거린다.

흐느적거리는 육신의 거추장스러움.

  

번데기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어서 자유롭게 저 푸른 하늘을 날아 가듯이

육신의 허물을 벗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피안의 세계로 가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나는 그리워하면서 버린다.

  

움푹 패인 염주골의 깊은 모습도

하늘을 향해 날카롭게 솟은 범봉의 자태도

부드러운 능선으로 이어진 대청봉의 우람함도 설악의 모습이다.

 

 염주골

  

 무너미고개, 신선대, 범봉

  

  

뒤돌아 본 대청봉

  

눈이 세찬 바람에 날리면서 능선에 쌓여서 만들어진 눈처마의 높이가 1m도 넘는다.

표면이 얼어 붙어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눈처마 가장자리를 조마조마한 가슴을 안고 걷는다.

밟아도 발이 빠지지 않아서 편안하지만 만약에 눈처마가 무너지면 계곡으로 굴러 떨어질 것이다.

  

칼날 능선에서 눈처마 위를 걸을 떄에는 자일로 안자일렌하고

만약에 한 사람이 낭떠러지 아래로 실족하면 나머지 한 사람은 반대편 낭떠러지로 몸을 날려

힘의 균형을 이루어 추락을 막아야 한다.

  

옛날에 읽었던 고산 산행기나 산악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하면서 걸으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지고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만경대로 갈라지는 1253m 봉에서 나뭇가지를 헤치며 바위능선으로 직등 하다가 등산로를 찾기 못하고

만경대 능선으로 내려와서 허벅지까지 빠지는 봉우리 사면을 트래버스하여 안부에 도착한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났지만 갈 길이 먼 까닭에 간식으로 쵸크파이와 귤 하나를 먹고 출발한다.(14:30)

  

화채봉 직벽 아래에서 하산 길에 대한 숙의 끝에 윤더덕님이 얼마 전에 다녀간

샘터에서 1260.1m봉 능선으로 트래버스 한 후에 피골능선으로 하산하기로 하고

화채봉 남쪽 샘터로 간다.

  

1260.1m봉으로 트래버스 하는 등산로는 눈 속에 파묻혀 찾지 못하고

둔전골로 하산하는 등산로에는 발자국이 있다.

계획을 변경하여 둔전골로 하산하기로 하고

30여분 내려 갔을 때 발자국은 끊어지고 등산로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아마도 이 발자국의 주인은 이곳에서 망설이다 되돌아 간 것 같지만

우리는 눈 위로 러셀을 하면서 계속 하산한다.

  

계곡으로 내려갈수록 눈은 점점 깊어만 간다.

이제는 허리까지 빠지는 것은 다반사고

어떤 경우에는 가랑이 사이에 눈이 걸려서 더 빠지지는 아니하지만

눈 속에서 빠져 나오려고 발에 힘을 주면 발은 더 깊숙이 빠지면서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는 꼴이 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힘들고 불안하지만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한 결과는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기수님이 지도를 정확하게 판독하고 진행하고 있으므로

나는 독도 시간과 노력을 비축하기 위하여 지도를 배낭 속에 넣고 산행한다.

이기수님의 치밀함과 정확함은 익히 알려져 있기 때문에

대화로 지도상에 표시된 전방의 상황을 묻고 정보를 공유한다.

  

독도는 일반적으로 능선보다 계곡이 더 어렵지만 이기수님이 구두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심전심”

서로 통하는 것이 있다.

이것을 팀웍이라고 하는가?

비록 지도와 나침반을 볼 수 없지만 전방에 펼쳐진 계곡과 능선의 모습과 이기수님의 설명을 대비시켜 기억한다.

그것은 만약의 사고에 대비하여 정보를 가장 효율적으로 공유하는 방법 중에 하나일 것이다.

  

갈 길을 멈추게 하는 절벽이 나타난다.

바로 위에 있는 팔뚝만한 나무에 슬링을 걸고 내려가려 하지만

이기수님은 확보나무가 불안하게 보이는지 좀더 위에 있는 다리통만큼 굵은 나무에

슬링을 걸고 직선으로 아래로 내려보내지만

  

하강 루트는 비스듬히 내려 가므로

만약에 미끄러지면서 몸무게가 실리면 슬링은 일직선이 된다.

  

이렇게 되면 몸이 오른쪽 허공으로 쏠리게 되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

나는 중간에 서 있는 나무를 중간 확보용으로 활용 할 수 있도록 슬링을 돌려서 내리게 하자

이기수님은 나의 의도를 곧바로 이해한다.

  

설명이 필요 없다.

슬링 끝을 묶어 매듭을 만들고 선두로 나서 다운 클라이밍으로 하강한다.

산둘, 윤더덕, 이기수님 모두 능숙한 솜씨로 20m 슬링을 이용하여 10m벼랑을 차례로 내려온다.

  

남쪽으로 대청봉에서 관모봉으로 뻗어가는 능선이 시야에 들어온다.

저 아래 둔전골 본류와 합수되는 지점을 예상하고 선두에서 러셀 하면서 부지런히 걷는다.

  

나의 앞 길을 인도 하는 것은 동물의 발자국이다.

내가 선택하는 루트와 동물의 발자국은 정확히 일치한다.

길 찾는 데 동물적 감각을 지니고 있음인가?

아니면 인간과 동물 모두가 안전과 편함에 대한 본능과 시각이 동일함인가?

  

날은 점점 어두워지므로 최대한 많이 하산하기 위하여 혼자서 열심히 내려간다.

계곡은 점점 넓어졌지만 눈에 빠지는 경우는 더 빈번해진다.

계곡에는 눈이 덮여서 모두가 평탄한 듯이 보이지만 바위 사이를 밟으면 영락없이 엉덩이까지 빠진다.

  

그뿐만 아니라 전진하려고 발에 힘을 주면 더 깊이 발이 빠져서

계곡물 위에 살짝 언 얼음이 깨지면서 물 속으로 발이 잠긴다.

등산화 속으로 물이 들어간다.

방수가 되는 등산화이기 때문에 등산화 속의 물은 좀처럼 빠지지 않고 질펀거리지만 계속 걷는다.

  

모 양발의 기능을 믿지만 물에 잠긴 것과 진배없는 상태에서 얼마나 보온기능을 수행할지 의구심이 들고

동상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날씨는 별로 춥지 않지만 등산화 속의 발가락은 점점 얼어오는 것을 느낀다.

  

그래도 계속 하산한다.

18:00경에는 둔전골 본류로 진입한다.

또 다시 물에 빠지지 아니하기 위하여 가능하면 계곡 중앙을 피하고 가장자리로 걷는다.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모두들 배가 고픈 모양인지 쉬는 시간에 생라면을 먹는다.

배고픔도 훈련이라 생각하고 출발한다.

  

손전등이 점점 희미해져서 이기수님의 여분의 건전지로 바꿔서 앞길을 밝히면서 걷는다.

얼마나 내려 왔을까?

간혹 발견되는 빨간 끈은 우리가 제대로 하산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가끔은 등산로도 발견하지만 내려가도 내려 가도 산으로 둘려 싸여 끝이 없다.

  

점점 시간은 흘러가고 불안감이 스물 스물 일어날 때쯤에는

누렇게 변색된 킬문님의 리본을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어둠에 잠겨있는 눈 덮인 계곡에서 길 찾기란 쉽지가 않다.

등산로는 산 사면으로 이어지다가 작은 능선에서 끊어졌다.

돌무더기가 있고 빨간 끈이 있지만 등산로는 찾을 수가 없다.

  

이기수님은 혼자서 능선 아래와 위를 확인하지만

사방은 벼랑이어서 도저히 통과할 수 없다고 한다.

지금 시간은 20시가 지났을 것이다.

  

이곳에서 비박할 것인가?

계속 하산할 것인가를 결정하여야 한다.

  

저녁을 먹으면서 모닥불을 피우면 하룻밤 비박 하는 것은 별 어려움이 없을 것 같고

계속 하산하면 조금 위험은 하지만

잘만 하면 속초나 양양에서 23:30분에 출발하는 심야고속버스를 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따뜻함이 보장되는 하산을 원하는 분위기이므로 하산하기로 마음 속으로 결정한다.

어떤 결정에도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조난에 대한 두려움은 아닐지라도

우리들 중 누군가는 실수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위험을 어떻게 최소화하고 관리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주변 지형을 정찰한다.

어둠 속이지만 작은 능선은 계곡으로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지만 이곳은 분명 등산로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동쪽으로 조금 평탄한 길 흔적이 있지만

사면을 가로질러 내려 가기에는 너무 위험 한 것 같아

등산로를 못 찾고 내려오는 이기수님에게 저 곳이 등산로 인 것 같으니

슬링을 걸고 내려 가자고 하니

  

그렇다면 바로 위에 있는 나무에 슬링을 걸고 내려 가는 것이 좀더 안전하다고 하여

올라가 보니 충분히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안전을 위하여 슬링을 나무에 걸고

이기수님이 먼저 내려가서 등산로를 확인하고 다시 산행은 시작된다.

  

오리엔티어링 지도(OL지도)를 제작하기 위한 지표조사를 하면서 얻은 경험은

길이란 두 지점을 빠르게 편하게 안전하게 연결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등산로도 마찬가지이다.

두 지점을 편하고 안전하게 빨리 갈 수 있는 선을 연결하면

그것이 곧 등산로가 되는 것이다.

  

위험한 지형에서는 절대적 안전함이란 없고

단지 상대적 안전함이 보장되는 지형을 찾으면 된다.

산행에 있어서 경험이 중요한 이유이다.

  

“산행에서 길을 잃거나 낙오되는 예측 불허의 상황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것은 정밀한 독도실력과 풍부한 경험 및 정확한 판단력이며

이것을 실제화 시킬 수 있는 체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산악독도교실에서 강의할 때 사용했던 빛 바랜 노트에서 옮김)

  

이번 산행의 고빗사위를 넘긴 것 같다.

등산로는 산 사면을 가로질러 이어져 있다.

가도 가도 기다리는 둔전저수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아무도 시계를 갖고 있지 아니하고 휴대폰 불통지역이어서

시간을 알 수 없지만 밤 10시경이라고 유추해 본다.

  

육체의 지침.

발가락 동상의 두려움.

배고픔

사방을 감싸는 캄캄함 만큼 암울한 상황이다.

  

작은 개울을 건너는 곳에 물이 흐른다.

“자 먹고 가자 !

” 모닥불을 피우고 삼겹살을 굽고 라면을 끓인다.

  

“의식(衣食)이 족해야 예절을 안다.”는 말이 있듯이

생존을 위한 기본적 욕구가 충족되기 아니하면 준법의식도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한 잔의 술도 마신다.

심야버스도 포기하고 1시간 동안 먹고 마신다.

  

등산화를 벗고 양말을 짠다.

물이 주루룩 흘러 내린다.

등산화 내부가 완전히 젖었기 때문에 새 양말을 바꿔 신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아

불에 대강 말린 양말을 그대로 신는다.

  

배가 부른 탓인지 불안감은 사라지고 새로운 힘이 생긴다.

산행에 대한 전의를 불 태우며 출발한다.

하산길이 한결 쉬워지는 것 같다.

  

얼마나 갔을까?

선두로 진행하는 이기수님이 등산화 발자국을 발견했다.

눈 위에 뚜렷이 찍힌 등산화 밑창의 무늬.

  

이제는 안심이다.

우리들의 산행도 막바지로 접어든 것 같다.

한참을 내려오니 불 빛이 보인다.

  

어둠 속에 집이 나타나고 “尋牛齊” 라는 현판도 걸려 있다.

여러 개의 촛불은 위쪽에 있는 조그마한 암자에서 너울거린다.

만해 한용운님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궁금하지만

갈 길이 바쁜 걸음은 빠른 속보로 하산을 계속한다.

  

우마차로가 나타나고 기다리던 저수지도 나타난다.

얼어붙은 저수지에 하얀 눈이 쌓여 있어 어둠 속에서도 환하다.

진전사지 안내간판이 나타나지만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아니하여 그냥 하산한다.

  

마을이 나타나고 핸드폰은 밤12시임을 알린다.

속초에 있는 택시를 부르고 10여분을 하산하자

얼어 붙은 포장도로에서 택시가 조심스럽게 다가 온다.

  

택시를 타고 계곡을 벗어나자 넓은 들판이 펼쳐지고

사방이 확 트인 들판 사이로 길은 이어져 있다.

깊이의 세계에서 넓이의 세계로 나온 것 같은 광활함을 느낀다.

  

속초 고속버스터미날에서 요금13,000원을 지불하고 택시에서 하차한다.

주변에 있는 여관에서 비수기인 관계로 4명이 자는 넓은 방을 35,000원으로 투숙한다.

방바닥의 열기가 후끈거린다.

  

대강 씻고 무사 산행을 기뻐하면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면서

오늘의 산행에 대한 뿌듯함을 느낀다.

얼큰하게 취기가 돌자 먼저 잠자리에 든다.

  

40시간만에 잠자리를 찾으니 눕자마자 잠이 온다.

위험에 대한 스릴을 느낄 수도 있고 안전한 산행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