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산 능선의 노송들...


 

 

천국의 계단을 오르다
오후 1시 30분이 되어서야 정상을 밟았다.
눈이 쌓인 능선 길을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하며 겨우 오른 것이다.

아침 11시.
적암마을을 한참 들어간 좁은 산자락 앞 길에 차를 주차했다.
그리고 알프스를 연상시키는 멋진 구병산 전경에 감탄하며 산행을 시작했다.

구병산의 등로는 처음부터 경사가 아주 가파르다.
숨이 턱을 치받고 장딴지에 힘이 무척 들어가는 힘든 길이었다.
이런 길은 주능선 첫 안부 갈림길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적암마을 입구 산행들머리의 해발 고도는 180미터이고,
853봉 바로 직전 주능선 안부 고도가 790m 정도니까
약 600m를 계속 치고 오르는 셈이다.
등로는 영문 제트(Z)자 모양으로 끝없이 위로~ 위로~ 이어져 있었다.
마치 하늘로 오르는 천국의 계단 같았다.
나는 지난 해 후지산 등산 때 체험했던 나선형 등로를 연상했다.
후지산은 8부 능선부터 정상까지는 그런 등로였다.

첫 안부 갈림길.
오른쪽으로 형제봉 11km, 왼쪽으로 구병산 1.3km 표지판이 있다.
코끝을 약간 시리게 하는 바람이 싸아하다.
아마 충북알프스 종주는 형제봉부터 시작하는 모양이다.

능선에서 보니 정상을 바라보며 삼각형(△) 모양의 산 오른쪽은 완만한 흙산 형태이고
산 왼쪽은 바위 절벽으로 이루어진 험준한 악산의 모습을 하고 있다.

구병산 정상 1.3km...속으로 별거 아니군...하고 땀을 닦았다.
그러나 곧 오산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잠시후 시작한 산행부터 정신을 단단히 차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긴 로프가 기다리고 있고, 그 로프 하강길은 눈이 쌓여 있는데, 반들반들하다.
미끄러지고...부딪히면서 내려와야 했다.

이렇게 시작한 구병산 능선 길은 아주 험난했다.
위험한 오르내리막 길에는 네댓 군데 로프가 있었지만
로프는 굵기도 제각각 다르고, 로프를 맨 위치도 적절하지 않았다.

신선대를 거쳐 853봉을 지난다.
능선에서 되돌아보면 올라온 길이 마치 물고기 지느러미처럼
살아 움직이는듯이 꼬리를 치고 있다.

 


신선대를 지나 853봉 중간...멋진 송이 몇그루 풍상을 견디고...

정상의 공포

구병산 정상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주위로 까마귀가 한 마리 두 마리 날기 시작했다.
정상은 겨우 대여섯 평 정도 좁은 공간이고,
그 바로 남쪽으로 두서너 평 좁은 평지가 있었고
거기에 점심보따리를 풀었는데, 그 주위를 까마귀가 배회하는 것이다.

한두 마리에 불과하던 까마귀는 어느새
수십 마리가 되더니 나중에는 백여 마리도 넘는듯했다.
까마귀들은 점심을 먹는 바로 옆의 소나무 가지에도 날아와 앉았다.
도대체 나 같은 건 두려워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까마귀가 참 큰 새라는 걸 느꼈다.
날개를 활짝 폈을 때는 두 날개 길이가 1m는 될 것 같았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오싹했다.
히치코크 감독의 영화 [새]가 생각났다.
인간을 공격하는 새떼의 두려움...

구병산 정상에는 인간이란 나 혼자다.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백여 마리의 까마귀가 나를 습격한다!
그럼...?

 


구병산 정상 ; 서너 평 남짓한 공터. 뒤쪽으로 속리산 줄기가 위풍당당하게 보였다.


 

소름이 돋았다. 나는 서둘러 밥을 먹는둥마는둥 짐을 싸서 일어나야 했다.
정상을 내서서면서 보니 그 까마귀들이 죄다 정상으로 내려앉는 것이 보였다.
아마 까마귀들은 오랫동안 굶어 배가 몹시 고팠나보다.
인간이 먹다 남은 음식찌꺼기라도 흘리고 가지 않았을까,
아까 내 점심에서 나는 스팸 햄 냄새가 났었는데….

극성스런 까마귀 덕에 하산을 서둘렀다. 오후 2시.

 


정상 바로 직전...뒤쪽은 올라온 능선 봉우리. 절경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하산길도 위험


구병산 정상에서 하산 길은 여러 갈래다.
산의 북사면, 속리산 천황봉이 바라보이는 쪽으로는 다소 완만한 육산 코스가,
능선을 타고 남쪽으로 향하는 루트는 종주 코스다.
내가 산을 오른 방향- 적암마을 방향으로 난 하산 코스도 있고,
남쪽 능선을 타고 가다가 중간중간 하산하는 코스가 있고,
구병산 정상 바로 오르기 전 안부로 내려가는 코스도 있다.

나는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으므로 정상 오르기 바로 직전의 안부에서
적암마을 쪽 계곡으로 곧장 하산하기로 했다. 최단거리였다.

이 길은 위성기지국(KT)으로 하산하는 길이다. 길목에 리본이 많이 달려 있었다.
초행일 때는 갈림길에서는 리본이 많이 달린 길이 안전하다고 했다.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급경사길이었다.
그냥 급경사가 아니라 길에 크고작은 돌멩이가 낙엽속에 숨겨져 있는
한 순간도 방심할 수없는 위험한 길이었다.

중간중간 로프도 있고 철계단도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철 계단이 발을 올려놓자마자 흔들흔들하는 것이
금세 미끄러져 추락할 것 같았다.

또 계곡은 마른 건천이었다. 아마도 봄이나 여름철에
이 건천 계곡에 물이라도 흐른다면 더욱 미끄러울 거다.
진행속도는 무척 더딜 수밖에 없었다. 산자락에 내려서니
KT 위성기지국의 거대한 안테나가 특이한 풍경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마치 [스타워스] SF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벼를 베고 난 텅빈 논과 밭들이 봄을 기다리고 있었고,
마른풀더미가 흐트러져 있는 산기슭에서
젖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오후 4시 10분...3km도 되지 않는 짧은 하산 길을
2시간 10분이나 걸린 것이다.

오후 4시 30분. 차에 시동을 걸었다.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서.

서울로 상경할 때는 오던 길과는 반대방향으로 갈 참이었다.
속리산 문장대를 거쳐 화양구곡을 지나 괴산-증평 갈림길에서
증평 방향을 선택하여 증평에서 중부고속도로를 탈 생각이었다.

왜냐 하면, 이 코스에는
대궐터산, 도장산, 백악산, 청화산, 낙영산 같은
좋은 산들이 옹기종이 모여 있고, 나는 해마다 그 산들을 오르려고
벼르고 있었다. 그래서 먼발치나마 그 산들을 바라보고 싶었다.

서울에서는 멀고 먼 구병산

아침 7시30분. 구병산을 향해 서울을 출발한다.
구병산은 충청북도 보은군과 경상북도 상주 사이에 있는 산이고,
웅대한 속리산 국립공원 산군에 속해 있다.

서울에서 대충 200km 정도로 예상되는 거리,
따지고 보면 그리 멀지 않은 산이지만 구병산으로 가는 길은
그리 단순하지도 가깝지도 않았다.

우선 경부고속도를 탄다. 대전을 지나 옥천까지 가서 옥천-보은-구병산 코스가 있고,
그 다음으로는 경부고속도로에서 청주 I.C를 나와 청주-보은-구병산에 도착하는 방법,
또 중부고속도로 증평 I.C를 나와 증평-화양구곡-구병산 도착하는 길,
그리고 중부고속도로 호법-영동고속도로-여주-충주내륙고속화도로-괴산-구병산 코스가 있다.
어느 코스로 가든지 직접 구병산에 도착하는 길은 없고
시간도 3시간 안팎은 소요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두 번째 코스인, 경부고속도로-청주I.C 나와 보은-구병산 코스를 선택했다.
여러 날 계속되는 설 연휴 탓에 고속도로는 무척 한가했다.

예정대로 청주I.C를 나오니, 그 유명한 가로길로 해서 청주 시내로 접어든다.
청주 시내 첫 사거리에서 보은-대전 방향 표지판을 따라 우회전,
한창 가다가 길은 보은으로 접어들고,
구병산이라고 쓴 표지판을 따라 계속 직진하니
상주방향의 잘 뚫린 길로 들어서게 된다.
한창 대전-상주행 고속도로 공사가 진행중인 듯했다.

상주방향을 타고 가다가 드디어 적암마을,
왼쪽으로 사진에서만 보았던 구병산의 화려한 자태가 바로 코앞에 있는 마을이다.
여기서 죄회전하면 산행들머리였다.
아침 7시 30분 출발, 도착 10시 35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