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패산 산행기/ 포토 에세이
(2004. 2. 17/ 회룡역-석굴암-회룡사-사패산-포대초소-망월사-망월역/ 내 어머니의 유랑의 아들과)

*. 차로 회룡역 지하 전철매표소로 돌진하다
“여보, 당신과 혼인 말이 있을 때 우리 엄마가 사주를 보러 갔더니, 겉궁합 속궁합 다 좋다고, 그 신랑과 결혼하면 자가용 타고 다닐 팔자라고 했다구요.”
그 자가용을 열심히 몰고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산꾼 구(丘)선생과 도봉산을 회룡역에서 오르기로 하고 왔을 때의 이야깁니다. 역 건너편에서 기다리던 친구만 보고 차를 몰았더니 차가 그만 층계를 거쳐 지하 매표소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놀랄 사이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 때도 지금처럼 승객이 많지 않았던 역이라서 인사 사고까지는 가지는 않았지만 “또 빠졌구나.”하면서 사람이 몰려오는데 그 중에 회룡역 역장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런 경우가 처음이 아닌 모양인데 왜, 안전시건 장치를 안 해 놓았냐구 큰소리치던 회룡역은 나에게 젊은 시절 하나의 추억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 회룡역의 지금의 역장에게 물어봅니다. “이 고장 안내판은 어디에 있지요?”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안내판으로 고장의 내력을 알리는 안내판이 역 앞 광장에 있어야 하는 것은 상식적인 일인데 회룡역 어디에서 그런 친절은 찾아볼 길이 없기에 하는 말입니다.

*. 회룡사 가는 길
그 뿐이 아닙니다. 회룡사로 가는 등산로 표지는 하나도 없고 도중의 철조망이나 담에 즐비한 비닐에 넣은 각 산악회의 등산안내 팸플릿만이 그 길을 짐작하게 할 뿐입니다.
아마도 호원동에서 근무하는 공무원들은 이곳을 한직이라 여기고 잠간 머물다가 떠나는 정거장쯤으로 생각하는 것인지나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주민들은 무엇하고 있는지 자못 궁금하기만 합니다.
역 부근은 온통 아파트 개발 중이어서 주위가 어수선한데 재건축을 앞두었음인지 단독 주택마저 초라한 것이 폐가 촌을 지나는 것 같습니다.
안내판도 이정표도 없고, 앞서 가는 등산객도 없는 길이지만 앞에 산이 있고 커다란 내가 있어 냇길 따라 갑니다. 사패능선에서 흘러내리는 회룡골의 회룡천입니다.

회룡매표소입니다. 매표소 머리 위로 동두천, 송추로 향한 서부외곽순환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사패터널 뚫는 것을 가지고 말도 많더니 그 길 같기도 하구요.
무단 입장객에게 자연공원법에 따라 과태료 10만 원을 부과한다는 안내문과 함께 북한산국립공원 입장 일년 연회비가 3만원이라는 연회원카드제 안내 현수막이 요란합니다.
그래 그런가, 지금은 9시경인데 등산하는 사람보다 하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주로 회룡역 근처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입장료를 받지 않는 새벽 시간대를 이용하는 모양입니다.

*. 석굴암에서 만난 백범 김구 선생
다리에서 사패능선까지는 3.2km라는 이정표 따라 오르다 보니 다리 넘어 체육시설이 있는 곳이 갈림길입니다. 200m를 직진하면 회룡사요, 여기서 우측으로 7분 거리에 석굴암(石窟庵)이 있습니다. 석굴암을 통하여 상상봉으로 향하는 등산로도 있지만 그 길은 석굴암 경내를 통과하는 길이라 스님들은 ‘탐방로가 아님’이란 이정표로서 산꾼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먹지 않고는 여간해서는 석굴암은 들르기 어려운 곳이지요.

회룡사 석굴암 입구는 석굴암이란 이름답게 커다란 바위가 이마를 마주대고 문을 열어 주고 있습니다. 이 석굴암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회룡사 석굴암은 백범 김구 선생이 상해로 망명하기 전 한 때 피신했던 곳입니다. 해방 후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귀국한 백범이 이곳에 자주 들렀을 때 당시의 언론인 남상도 외 7인이 선생의 친필 ‘石窟庵’, ‘佛’, ‘戊子仲秋遊此金九’(무자년 추석에 여기서 노닐다 김구)를 받아 1949년에 3개월 간 조각한 것입니다. 석굴암 경내에 선생의 위패를 모신 백범사가 있어 봄, 가을로 배향하고 있는 곳이지요.
석굴암 내에는 석조 석상과 마애 벽화가 있고 거기 서 염불하는 여승이 아까울 정도로(?) 여성미가 철철 넘치는 모습이기에 들어가서 마애 벽화 한 장을 사진으로 모실 것을 간청하였더니 이곳은 김구 선생으로 유명한 곳이니 밖이나 찍고 가랍니다. 김구라면 김창수 선생이 아시냐고 했더니 그게 아니고 백범이랍니다.
이 석굴암 뒷산이 무슨 봉이냐고 물으니 그런 건 모른답니다. 자기가 있는 곳에 전혀 관심이 없는 여승이 갑자기 가엾어집니다. 가까운 주위를 모르고 먼 극락을 생각하며 살며서도 도의 경지를 추구하려는 스님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지도를 찾아보니 뒤에 있는 산은 상상봉이었습니다.
백범 김구(金九)의 본명은 김창수(金昌洙), 아명은 김구(金龜), 호는 연하(蓮下)였습니다.
일제 시절 옥고를 치르면서 본명 '昌洙(창수)'를 당시 창씨개명으로 이름을 일본식 넉자 한자로 바꾸는 것에 맞서 아명이었던 구(龜)를 원수' 仇'(구) 자와 같은 음의 '九'(구)로 고쳤답니다.
당호 연하(蓮下)를 버리고 ' 白凡'(백범)이라고 고친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에 이르기까지 나 만한 애국심과 지식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것이 선생의 뜻이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등산로 따라 무학대사가 지성으로 이조창업을 위해 발원했다는 상상봉 중턱에 있다는 굴까지 올라 보고 싶지만 사패산 가는 길에 반듯이 들르기로 작정한 회룡사를 보려면 되돌아 가야만 합니다.

김구 선생은 누구신가 하는 것이 궁금해서 이곳에 오기 전에 그분이 지으신 '백범일지(白凡逸志)'를 보고 왔습니다.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이 53세에 10세, 7세 먹은 아들 인(仁) 신(信) 두 어린 아들을 상대로 쓴 자서전입니다. 다음은 그 책머리에 있는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락원 여사와 아내 최춘례의 묘비 그림과 그 옆에 백범이 써놓은 피맺힌 절규입니다.







"나를 위하야 평생을 옥바라지와 망명 생활로 낙은 없고 고생만 하다가 세상을 떠나신 갸륵하신 어머님과 불쌍한 안해'
안동 김씨 김구 선생은 방계 조상 중 한 사람이었던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리는 바람에 멸문지화를 피해 고향을 떠나와 이름을 숨기고 상놈행세를 하다가 양반 아닌 상인 가문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젊어서 동학란 때 해주에서 동학혁명을 지휘하다가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는다고 변복의 일본육군 중위를 살해하고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고종 특사로 감형 된 후 탈옥한 당시의 우리 국민들의 우상이었습니다.
상해로 망명하여 이봉창, 윤봉길 등 열사의 의거를 지휘했고, 1945년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무력으로 대항하던 당시의 우리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이승만 정부의 하수인이었던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지만 그 후 우리는 백범 같은 지도자를 만나보지 못한 불행한 국민으로 살아온 것이지요.
그래서 그분의 '백범일지'에 나오는 한문 글귀 몇 개를 정리해 봄으로써 그분의 생각에 가까이 가보고 싶습니다. 그 하나하나는 그분이 평생 좌우명으로 삼아 살아온 글귀이기 때문입니다.

*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상호불여신호 신호불여심호) -麻衣相書
: 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음이 마음 조음만 같지 못하다)
*哀哀父母 生我*구其恩 昊天亡極(애애부모 생아구기은 호천망극) *구는 수고할 구
:슬프다 부모님, 나 위해 바친 은혜 넓고 큰 하늘 같이 다함이 없어라.
*食人之食衣人衣 所志平生莫有違(식인지식의인의 소지평생막유위)
남(나라)의 밥을 먹고 남(나라)의 옷을 입었으니 편생에 뜻한 바에 어김이 없어라.
*崑崑落落赤裸裸 獨步乾坤誰伴我(곤곤낙낙적나나 독보건곤수반아)
: 깊은 산 속 적나라하게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외로운 천하를 누구도 없이 홀로 가니 누가 나를 따라 줄까
*熱卽熱殺*도理 寒卽寒殺도梨(열즉열살*도리 한즉한살도리) *도리- (불)덕행이 높은 스승
너무 더운 즉 덕행이 높은 스승까지 죽이고, 너무 추운 즉 역시 높은 스승까지 죽인다.

그런데, 선남선녀들이 눈길을 밟고 어렵게 올라와 불공을 드리고 있는 이 조용한 비구니들의 석굴암을 향하여 저 상상봉 꼭대기에서 등산객 하나가 '야호'를 외치고 있습니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적은 소리 아닌 큰소리로 말입니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철없는 불쌍한 산꾼입니다.
옛날 보현봉 아래 일선사가 바로 지척인 바로 위 바위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악을 쓰며 부르다가 손뼉 치며 찬송가를 끊임없이 부르던 빗나간 신자들이나, 백운대 바위 위에 올라 남을 아랑곳 하지 않고 등산객들과 싸워가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기도하던 광신자들이 생각납니다. 세상 어느 곳에도 없는 오직 한국에만 있는 추태들입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욕이 절로 나옵니다. 죽어서 지옥도 못갈 놈들 같으니-.
왔던 길을 되 내려와서 회룡사를 갑니다. 그 경내에 석굴암이 있지만 이런 등산객이 있어 철조망으로 굳게 막아놓아서입니다.

*.회룡사와 이태조
회룡사의 회룡(回龍)은 회란용가(回鸞龍駕)의 준말입니다. 난(鸞)과 용(龍)은 상상적인 상서로운 동물로 천자나 왕을 상징하는 말이구요. 그러니까 난가(鸞駕)나 용가(龍駕)는 어가(御駕) 즉 왕이 타는 수레를 말합니다. 회룡사 입구에는 이런 회룡사 안내판이 있습니다.
"조선 태종 3년(1240)에 태조가 함흥으로부터 한양으로 환궁하던 도중 되돌아가려는 것을 무학대사'께서 당사로 초치하여 용란기를 돌려 끝내 환궁케 한 사연에 의하여 원래 법성사(法性寺)라 하던 절 이름을 회룡사(回龍寺)라 개칭한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당사의 서쪽 1,200m 지점에 천연석굴이 있는데 무학대사께서 정진하던 곳이라 하여 무학골이라 부르고 있으며, 북쪽으로 100m 쯤 주봉 밑에 석굴암이 있는데 왜정 때 김구 선생께서 들려 은신하시던 곳으로서 그 후 조촐한 암자가 세워졌습니다."

구전에 의하면 이 절은 신라 신문왕 원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로서 고려 우왕 때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함께 이 산에서 병마절도사가 되어 안동으로 떠날 때까지 3년 동안 이조 창업을 위해 이 석굴암에서 기도를 드리다가 간 곳이랍니다.
중창된 절에다가 현란한 삼원색의 단청 때문에 유서 깊은 옛날의 고찰의 모은 찾을 길 없으나 회룡골 양측을 쌓아놓은 축대는 그 돌의 크기나 규모로 보아 절을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큰비 올 때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던 모양이지요?

*. 쇼핑의 즐거움
별러오던 회룡사와 석굴암을 둘러보고 사패능선을 향하는 길의 발길은 가볍습니다.
옛날처럼 대충 둘러본 것이 아니라 카메라를 가지고 샅샅이 뒤지고 다니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절을 지나서부터는 계속 눈길이지만 오름 길이라 아이젠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입니다.
어떤 사람이 취미와 관계되는 물건을 사고 좋아하는 것은 탓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보다 앞서서 세상에 가장 행복한 취미의 세계를 열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는 길이니까요. 이런 마음으로 캠코더 이야기를 하렵니다.
어저께는 큰맘 먹고 디지털 캠코더 하나를 샀습니다. 고가의 것으로 사고 싶으나 주머니와 타협하느라고 중고를 살 수 밖에 없었지요. 벌써 3번째입니다. 금년까지 캠코더와 나와의 인연은 15년의 사력으로 그동안 편집기, 효과기, 8m 데크에 이르기까지 거금을 투자하여 국내외를 촬영하고 편집하며 살아왔습니다.
오늘 산행은 며칠 전에 내린 눈 소식에 벼르던 설화를 디카로 캠코더로 찍고자 해서 새벽을 서둘러 온 것이지요.
나이 들어 이런 취미생활의 물건 하나하나를 탐낸다는 것은 건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 같은 호기심으로, 늙다리 같지 않은 젊음을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백발이 성성한 나이에 디카, 캠코더, 디지털 녹음기를 주렁주렁 목에 매달고 국내외 여행을 다니다가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문득 보게 될 때에 스스로 봐도 미친놈입니다. 美親놈(者) 말입니다. 대학에 합격하고도 입학금이 없어 인천 바닷가를 울며 다니던 고교시절을 지나, 4년 내내 고학하던 대학시절을 거쳐, 가난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던 아빠 시절을 보내고 나니 곧 늙음이 오더라구요. 가난해서 학창시절 내내 수학여행이라고는 한번도 가지 못한 한 때문에 여행을 즐기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가난을 어느 정도 극복하면 그 불편했던 가난도 재산이더군요. 게다가 우리 아버지가 주신 건강이란 유산은 건강수명으로 아름다운 노년을 살아가게 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 중에 가장 큰 복이 늦복이요, 그 늦복 중에도 가장 행복한 것 중의 하나가 이렇게 아무 걱정도 없이 산을 찾고 글을 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정상에 오를 때마다 캠코더를 가지고 다니면서 정상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우리 한국의 산하를 360도로 회전하여 찍어 가지고 와서 여러 가지로 이용하고 싶습니다. 디카로도 가능한 일이지만 그 성능이야 그것이 전문인 캠코더의 기능과 비교할 수가 없지요.
회룡골을 벗어나니 눈 덮인 철다리 길이 오래오래 계속됩니다. 봄이 가까와 오는가 맨손으로 가는 손이 시리지 않은 오전입니다.

*. 선조가 옹주에게 준 사패산(賜牌山)
드디어 사패선 능선 길 이정표가 보입니다. 오늘은 보름 전에 해가 저물어 못간 사패산을 다녀와서 시간이 허한다면 그때 내려갔던 송추길로 가지 말고 오봉능선으로 해서 눈 덮인 여성봉을다시 한번 보고 싶습니다. 도봉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봉은 오봉이 아닙니까. 그러나 무리를 하지 않으려면 사패능선과 포대 능선으로 해서 망월사로 내려가야 할 시간대입니다.
능선 길에 서면 언제나 뿌듯한 성취감이 앞섭니다. 고생길이 거의 끝나고 산하의 전망을 바라보는 느긋한 마음을 갖게 하거든요.
사패산 능선을 가다가 범골능선 못 미쳐 저것이 사패산인가 하고 속게 되는 커다란 바위가 회룡바위입니다. 거기서도 15분쯤을 더 가야 하는 곳에 사패산이 있습니다.
사패산(賜牌山)의 '사패'(賜牌)란 뜻은 임금이 궁가나 공신들에게 종, 산, 논밭 따위를 내려 주는 것을 말합니다. 궁가(宮家)란 대군, 왕자군, 공주, 옹주가 살던 집을 말하는 것이구요.
사패산 능선 길에 사패산(賜牌山) 안내도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사패산은 조선 시대 선조의 여섯째딸인 정휘옹주가 유정량에게 시집을 올 때 아버지 선조가 하사한 산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옹주(翁主)가 어떤 사람인가를 수학 공식 형식으로 풀이해 보겠습니다.
왕+왕비=♂: 대군 /♀: 공주 왕+후궁= ♂: 군 / ♀: 옹주

사패산은 동쪽으로 수락산, 서남쪽으로 도봉산을 끼고 안골계곡과 고찰 회룡사를 안고 도는 회룡골 계곡 등 수려한 자연과 어울린 522m 밖에 안 되는 산이지만 밧줄을 타고, 쇠줄을 타고 올라야 하는 산이요, 의정부 쪽에서는 가장 높이 우뚝 솟아 있는 산입니다.
정상을 오르는 오른 쪽 능선에 전두환 장군의 대머리 같은 모습의 봉이 있어 막 내려오는 부인에게 물어보았더니 모른다 해서 "갓바위'라고 말해 주었더니 화를 벌컥 내면서 반말 쪼로 퉁명스럽게 중얼거립디다. "알면서 왜 물어!"

어느 산이나 정상은 가장 훌륭한 전망대입니다. 그 정상에는 우리가 보고 싶은 세상이 다 있지만 그것이 어디 어디인지 모르고 그냥 둘러보다가 서둘러 내려올 뿐입니다.
불이낳게 그 전망을 담으려 캠코더를 꺼냈더니 왜서일까? 10초를 견디지 못하고 꺼집니다. 다른 배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추위에 배터리가 약한가, 고장 난 카메라를 거금을 주고 산 것인가. 아니면 이 아름다운 전망을 찍을 복이 없음인가.
나머지는 하산하여 걱정할 일이라 미루고 대신 디카로 열심히 담고 담습니다.
드넓은 정상의 마당바위에 서니 옛 시인 묵객들처럼 갖가지 시름을 떨치고 나도 그 한 사람이 되어 동하는 시심 따라 즉흥시를 읊어 봅니다.

마음이 부리는 대로 山을 찾아 왔습니다.
몸 따라 마음 함께 頂上에 온 거구요.
心身이
하나인 것을
이제야 알겠어요.

한 발 두 발 땀 흘려 自己ㄹ 이겨 가며
頂上에다 내 키 하나 올려놓은 봉우리로
世上을
굽어 살피는
展望臺가 됩니다.
-'사패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