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양산 기행/행주산성

  서울은 안으로는 주산(主山)인 북악산(북현무, 348m)을 중심으로 낙산(125m, 좌청룡), 인왕산(338m, 우백호) 남산(260m, 남주작)의 내사산(內四山)에 둘러싸인 분지다. 이를 다시  밖으로 진산(鎭山) 북한산(북현무, 836m)을 중심으로  한 용마산(348m,좌청룡), 덕양산(124.9m, 우백호),  관악산(829m, 남주작)이 외사산(外(四山)이 되어 이중으로 둘러싸고 있는 명당이다.

나는 지금 덕양산(德陽山) 앞에 서 있다. 덕양산이란 생소한 말 같지만 고양시 행주산성이 있는 산이다.
자식들의 이름에 자신의 이름을 묻고 사는 우리나라 어머니와 같이 덕양산은 행주산성에 이름을 묻고도 불평 한 마디 없이 사는 산이다. 높이로 명색을 내세우는 산의 나라에서는 8개 내외사산 중에서도 가장 낮은 124.9m밖에 안되는 산이라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산을 탄다는 사람들도 '덕양산' 하면 머리를 갸웃둥하다가도 '행주산성'하면 아- 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산이다. 고양시(高陽市)란 이름은 구일산에 있는 고봉산(高峰山)의 '고'에다가 덕양산(德陽山)의 '양'을 합해 생긴 지명이다.

정문인 ‘대첩문’을 들어선다. 대첩(大捷)이란 ‘捷(첩) 자는 싸움에서 이긴다는 전승(戰勝)의 뜻이다.
그렇다. 임진왜란에서 한산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3대 대첩에 행주대첩이 포함된다. 7년 전쟁인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중국에서는 '만력의 역(萬曆役)' 일본에서는 '분로쿠 케이초(文祿慶長)의 역(役)'이라고 하는데 이는 어떤 전쟁이었던가.
준비된 침략군인 왜놈들의 병력은 조총으로 무장한 총 20만인데 여기에 대항했던 우리는 그 절반도 못 미치는 활과 창으로 무장한 군인이었다. 한 마디로 승산 없는 싸움이었다.
그래서 상륙한 왜놈들이 서울을 완전 점령한 것은 불과 부산 상륙 20일만이었고, 개성, 평양 점령은 상륙 60일도 못되었다. 그러한 때였기에 행주대첩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승리였던 것이다.
1592년 임진년 7월에 호남으로 쳐들어 온 1만 명의 왜군을  권율 장군은 이치(대둔산)에서 깨끗이 물리쳤다. 이는 임진왜란 육전에서 첫 번째 승리요 이 승리로 아군은 전라도 곡창지대를 수호하게 되어 군량미와 전쟁 물자를 동원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날이 바로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을 이룩한 날이었다.
권율 장군은 그 군사 2,300명을 이끌고 왜놈에게 뺏긴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서 행주산성에 주둔하고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벽제관에서 대승하여 사기가 오른 왜군 3만 명이 공격해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9차의 공격을 맞아 싸워 그 중 1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시킨 것이다.
관군은 물론 승병과 의병과 행주치마에 유래를 낳게 한 부녀자까지 동원된 처절한 싸움이었다.

그때 그 자랑스런 모습이 대첩문을 들어서면서 보이는 근엄한 모습의 충장공 권율 장군 동상(4.5m) 뒤에 설명과 함께 부조 되어 있다.


승군

의병

당시 조정에서는 당리당략(黨利黨略)만 따지며 당파싸움만 일삼던 시절에 당한 무비유환(無備有患)이었다. 그 조정 대신들이 한 일이라고는 왕을 모시고 몽진하는 것이 전부였다. 말이 몽진이지 백성은 버려두고 저희들만 살겠다고 도망 친 무책임한 사람들이었다. 당시 백성들은 세월을 잘못 타고 태어나서 우리나라 역사상 전후무후한 고생을 한 시대의 백성이었다. 죽은  사람의 고기를 식량으로 먹을 지경이었다. 고진고래(苦盡苦來)던가,  40년 후에는 병자호란까지 겪은 세대였다.

근엄하게 긴 칼 짚고 서 있는 권율 장군이 나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대학시절 내 스승님이셨던 김 세종 교수의 조각이기 때문인가. 그분이 우리 선배이신 김 남조 시인의 부군이시기도 하여서인가.

권율 장군 동상 앞에서 왼쪽 길을 따라 내려가면 멋진 이층 누각의 충훈정(忠勳亭)이 있다. 옛날의 주무기였던 각궁 연습도장으로 건립된 것으로 매년 3월 14일 행주대첩제 때 궁도 대회를 개최하는 곳이다. 그날이 권 율 장군 대첩하던 날인가 보다.
밤꽃이 노랗게 만발한 깨끗이 정리된 길을 따라 오른다. 율곡 이이 선생의 고향 율곡촌에 갔더니 밤나무 지천이더니 권율 장군의 이름 율 자는 두려워할 慄(율) 자인데 밤 栗(율) 자로 연상하여 일부러 심어 놓은 듯하다.

홍살문을 지나 장군의 사당 충장사(忠莊祠)를 향하였다. 충장(忠莊)은 권율 장군의 시호다. 시호(諡號)란 죽은 뒤에 행적을 칭송하여 임금이 추증하는 가문의 영광이 되는 이름이다.
그 입구에 있는 비석이 헌종 8년(1842년)에 행주나루터에 기공사(紀功詞)에 세운 것을 옮겨온 행주대첩 중건비다. 그 초건비는 덕양산 정상에 있다.
살다보니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사람이 부모덕이 있는 사람이었다.
권율 장군이 그런 분이시다. 그분의 아버지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는 영의정 권 철이다. 게다가 46세에 과거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치전투, 독산성(오산) 전투에 이어 행주대첩에서 승전하여 도원수(오늘날 참모총장)로 승임되어 전군을 지휘하였다. 이 순신 장군 같이 전사한 분도 아니고,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일등 선무공신에 책봉되어 영화를 누리다가 63 세로 돌아가신 후에는 영의정 관직과 충장공(忠莊公)이란 시호까지 받은 분이 아닌가. 임란 때 공로가 많아 영의정까지 지낸 백사 이항복은 그의 사위였다.



여기 ‘충장사’란 현판은 고 박 정희 대통령의 휘호이고, 저 영정은 장 우성 화백의 그림이다. 명문 가정에서 태어나서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 부귀영화를 돌아가신 후까지 이렇게 누리시며 유방백세(流芳百世)하시니 세상에 이런 부러운 사람이 더 있겠는가.

홍살문을 다시 나와 그 건너 토성 길로 들어섰다. 정상을 중심으로 7~8부 능선을 따라 흙으로 총길이 1km에 달하는 길이다. 토성 415m를 복원할 때 삼국시대 와당과 토기 파편이 출토되었다니 통일신라 시절부터 행주산성은 군사적 요새지였던 모양이다.
이 토성 높이는 3~ 40m인데 그 위에 그만한 높이가 더 있다. 여기는 산성의 동남쪽으로 경사가 매우 급한 자연적인 요새여서 그 아래는 평야로 완전히 노출된 왜놈에게 화포와 강궁과 큰 돌을 굴리는데 어찌 감히 왜놈들이 감당하랴.
여기다가는 목책을 쳤던 것이다. 이 반대편은 강으로 둘려 싸여 있으니 이는 천혜의 요새였다.
토성에는 남산 같이 철조망을 치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완벽하게 관광객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 입간판에 하였으되
“ 주의! 경내 숲속에는 뱀과 벌 등이 많이 있어 매우 위험합니다. 숲 속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마시오.”

약수터에서 마시는 시원한 물은 퀄퀄 소리 내어 흐르는 물소리처럼 더위를 시켜 주는데 이 약수터의 이름이 기감천(奇甘泉)이다. ‘감천(甘泉)’이란 물맛이 좋은 샘이란 뜻이지만 ‘기(奇)’는 무슨 뜻인가 했더니 바로 그 위에 커다란 행주기씨유허비(幸州奇氏遺墟碑)가 그 설명을 대신해주고 있다. 비석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姓)이 있으니  기씨(奇氏), 한(韓씨(氏), 선우씨(鮮宇氏)라~.”
아아, 그랬었구나. 이렇게 여행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알게 하는 기쁨을 준다.
세 번째 나무층계 길이 끝나는 곳에 광장이 나타나고 거기 충의정(忠義亭)이 있다. 이곳은 애국심을 길러주는 산 교육장이라.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행주대첩과 권 율 장군에 관한 교육용 비디오를 10분씩 상영하여 주는 곳이다.

행주대첩비(15.2m)는 124.9m 덕양산 정상에 우람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이 비와 당시에 세웠다는 초건비(初建碑)의 비각이 과거와 현재와 어울려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지금 정상에 서 있는 이 비는 1970년에  세운 것이고 이 아래 대첩비각 속에 있는 글자가 닳아 없어진 초건비(경기유형문화재 제74호)로 임란이 끝난 선조35년(1602년) 휘하 장수가 공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602년에 세운 대리석비다.
비문은 최 립이 짓고, 한 석봉이 글씨를 썼으며 추기는 권율 장군의 사위 이 항복이 지었는데 내용은 1593년 대첩의 경과와 권 율 장군의 공덕을 기리는 것이었다.

이 덕양산에서 한강과 서울의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쉼터가 있다. 덕양정(德陽亭)이다.
급히 오느라고 점심 준비를 해오지 못해 와서 산성 입구 구멍가게에서 사온 막걸리로 요기를 대신하면서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굽어보니 그 크기와 아름다움이 넋을 잃게 한다.
마침 이곳에 오른 젊은 군인들이 있어 그들에게 잠깐 나는 신나는 문화 해설사가 되고 있었다.

“저 행주대교 너머에 있는 산이 6․ 25 때 998명의 전진부대가 김포공항을 사수하다가 모두 산화한 개화산이고(그 산록 미타사 뒤에 그 비석이 있음),  김포 공항 뒤의 안테나가 있는 산이 인천 앞바다까지 훤히 바라볼 수 있는 계양산이지요.

개화산 한참 아래에 있는 동그란 산이 서울에 유일의 향교가 남아있는 궁산입니다. 겸제 정선이 소악정이란 정자에서 한강의 아름다움을 그리던-.

그 아래 두 번째로 보이는 다리 뒤의 하얀 분수가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170m의 미국 파운틴필 분수보다 32m나 더 높은 세계 최고(最高)의 월드컵 분수지요. 왼쪽에 강가를 따라 주욱 뻗은 길이 일산신도시를 향한 자유로구요, 그 옆의 산이 난지도지요.”

행주산성을 찾은 젊은이들의 펄펄 넘치는 새파란 젊음이 너무 부러워 기념사진 한 장을 찍었다. ‘돌아가서 사진을 퍼갈 수 있지요?’ 하면서.
한강을 더 가까이 굽어 볼 수 있는 진강정을 거쳐 옛날에 구 무기고와 군량 창고가 있던 자리에 세운 대첩기념관에 왔다.
여기서는 몰래 카메라 한 것 몇이 있어 그 해설을 해보자.

1953년 3월 14일 왜군 3만을 군, 의병, 문학진 화백의 그림이다.

왼쪽이  조선시대의 일반 병사들이 입던 나졸복 그러니까 군복이다. 흰 무명에 바지저고리로 위에는 검정 수명 괘자(掛子, 옛 전복)를 입고 허리에는 무명 전대띠를 매었다. 이 전대띠(戰帶띠)는 일종의 계급장 같이 장교 이상은 남빛의 명주, 군졸은 그냥 무명 띠였다.
머리에는 흰 수건을 두르고 벙거지를 썼다. 이 복장으로  손에 창검을 들면 병사가 되고, 육모방망이를 차고 오랏줄을 갖추면 옛날의 경찰인 포졸이 되는 것이다.

임란 중 육전에서 최초로 대승한 이치대첩도다. 이치(梨峙)란 충남금산군과 전북 완주군 사이의 범재라는 고개로 권율 장군과 왜군 고바야카와 부대외의 전투 장면이다. 이 승리는 행주대첩으로 이어졌다. 서울미대 김 태 교수의 작품이다.

행주산성 전투에서 우리가 막강한 왜군을 물리친 원인이 병사와 의병과 승병과 부녀자까지 뭉친 호국 애의 의지에다가 다음과 같은 요인이 더 있었다. 신기전, 총통기, 비격진천뢰 등 각종 화약을 사용한 최신 무기의 힘이었다.
그중 신기전기라는 것은 100발의 화살을 꽂아 사용할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제작 설계도가 남아있는 무기이다. 신기전이란 귀신 붙은 기계화살이란 뜻으로  목표물에 이르면 저절로 폭파하는 지금의 로켓, 미사일과 같은 역할을 하는 무기로 대신기전은 크기가 5.6m나 되었다.
당시에 제작하여 쓰던 재주머니가 있다. 재를 던져 적들이 눈을 뜨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체류 탄의 전신이었던 것이다.

행주산성을 돌아보고 대첩문을 나오니 저건 무엇일까. 좌측 언덕에 하얀 탑이 있다.
'해병대 행주도강 전첩비'로 6.25 때 조국을 위해 산화한 전몰 해병 영령을 모신 비였다. 그 비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어 나를 숙연하게 한다. 이렇게 이 행주산성은 한양을 지키는 요새였던 것이다.

“인천 상륙을 성공리에 감행한 한미 양국 해병대는 다시 적을 추격하여 대거 한강을 건넜으니
때는 1950년 9월 20일 미명, 곳은 권 권율 도원수의 대첩기공비가 서 있는 행주 아수라의 혈전 끝에 서울진격의 교두보는 이에 확보되었으니
이 어찌 누란과 같은 조국을 위하여 새로운 감격이 아니리오.
이 무렵에 자유의 신으로 승천한 그대들의 빛나는 공훈과 아름다운 이름은
저 한강수와 더불어 이 국토와 겨레의 마음속에 영원 무궁히 흐르리라.
삼가 비노니 안심하고 명복 할지어다.
1958년 9월 28일 해병대사령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