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行 閑談 15

으악새 울어대는 천관산에서- - -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만큼 올여름은 무척이나 더웠었는데 어느덧 아침저녁으로는 오싹하리만큼 추위가 느껴진다. 이처럼 세월은 숱한 아쉬움을 남긴 채 줄달음친다.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잡힐 듯 잡힐 듯 하다가도 고단한 삶의 징표인 주름살만 늘려놓고 연륜 속으로 얄밉게 달려 가버린다. 
 

 가을이 깊어 가면 깊어 갈수록 어딘가에 또 다른 의미의 삶의 흔적을 남겨야 하기에 일상의 일탈을 꿈꾼다. 가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의 향연에 취해 오래도록 각인되는 발자취를 남기고 싶은 충동감에 사로잡히니 무척이나 뜨겁게 산이 그리워진다. 
 

 가을의 낭만인 으악새의 흐느낌이 귓전을 맴돌기에 그 정취에 흠뻑 빠져들고 싶어 젊은 시절 정치판에 뛰어들어 당당하게 지자체장에 당선되어 지역발전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후배를 비롯해서 지인들과 함께 남녘 끝자락에 있는 장흥 천관산으로 달려간다. 
 

 늦가을 천관산의 매력은 그 누가 뭐래도 은빛 물결의 억새의 향연임을 부인할 수 없다. 정상인 연대봉에서 시작된 산등성이의 억새 물결은 남녘의 쪽빛바다와 어울러 파노라마 같은 풍광을 연출하기에 이때쯤이면 그 멋스런 낭만에 취해본 산우들의 발걸음을 이곳으로 향하게 한다. 
 

 천관산은 지리산, 내장산, 변산, 월출산과 함께 호남의 5대 명산이다. 남녘바다와 인접되어 있음에도 특이하게 능선을 따라 여러 가지 형상의 기암괴석들이 독특한 자태를 뽐내고 있어 그 앞에 서면 혼이 깃든 조각품을 감상하듯 신비감을 자아내고 가을이면 어김없이 으악새의 군무가 펼쳐지기에 많은 산우들의 칭송이 자자하다. 
 

 그동안 뜻하지 않은 고막 천공으로 본격적인 산행은 엄두를 못 내고 근교 산행으로 다소나마 욕구를 충족하려고 애써보지만 허전함을 달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부족하기에 일상의 풍취를 잃어버릴 정도의 삶에 대한 무기력 증세로 심한 가슴앓이에 시달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렇게 몸 상태가 좋지 않는데 며칠 전 해외 나들이로 아직까지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아 잘 올라갈 수 있을까 걱정스런 마음이 앞선다. 이런저런 생각에 젖다보니 어느덧 주차장에 도착한다. 후배 일행이 기다리고 있어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산행 준비를 서두른다. 
 

 「오늘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니 고생깨나 하겠는데 - - -」

 「이런 가을에 사람이 없으면 오히려 이상하지요.」

 번잡한 산행을 피하려고 비교적 이른 시간 도착했지만 벌써 많은 산우들이 산행에 나서고 있어 우리 일행도 슬그머니 그 속으로 끼어든다. 
 

 이곳에서 산정으로 오르는 등산로는 3갈래 길이 있다 오늘은 가장 오른쪽 길로 금강굴을 둘러보고 환희대에 올라 연대봉을 거쳐 장안사 방향으로 내려오는 원점회귀 코스를 산행키로 작정하고 후배와 정담을 나누면서 산을 오른다. 
 

 장천재(長川齋)에 도착한다. 이곳은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선생의 얼이 서려있는 곳이다. 선생은 조선시대 실학의 전성기에 그 중심에 머물다간 호남지방의 지식인 중의 한분이다. 한평생을 드러내지 않고 초야에 묻혀 투철한 선비정신으로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했기에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고 한다. 
 

 의리와 지조를 중시하며 시대적 사명감과 책임의식을 견지해 나가는 것이 진정한 선비의 길이다. 궁벽스런 이곳에서 낮은 자세로 살다 가신 선생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치열한 영겁의 세월을 버텨왔기에 온 몸뚱이에 철갑을 칭칭 두른 노송(老松)은 너무나 늠름하게 그 자리를 오롯이 지키며 오늘도 길손들을 맞아한다. 
 

 조선시대 선비가 지향하는 최종목표는 극기복례(克己复禮)였다. 즉, 이기심과 욕망을 이겨내고 예(禮)로 돌아가서 모든 사람이 공존하고 공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공후사(先公後私), 억강부약(抑强扶弱),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자세를 늘 푸르게 서있는 노송처럼 지켜나가는 것이 선비의 정도임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산등성이를 타고 오른다. 
 

 천관산은 다가설수록 큰 산의 자태를 서서히 드러내 명산임을 입증시켜주는 매력을 갖고 있다. 금강굴은 가뭄으로 바싹 말라있어 목마른 길손들의 목을 축여주지 못한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이곳은 다 좋은데 능선에 물이 없기 때문에 가볍게 생각하고 오르다가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어 먹는 물 준비는 필수품이 되어버렸다. 

 

 등골에 땀이 촉촉하게 배이게 발품을 팔고나니 노승봉을 지나 환희대에 선다.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모두다 수석 작품으로 여겨진다. 이곳에 서면 언제나 그 경관이 색다른 양태로 다가오기에 싫증을 느낄 수 없어 너무 좋다. 그렇기에 한 번 찾으면 또 다시 찾지 않을 수 없다. 누런 들녘을 내려다보는 오늘의 풍취는 다시 볼 수 없는 눈요기가 아닐 수 없다. 
 

 이곳에서 연대봉으로 이어지는 억새 물결은 황홀한 장관 그 자체다. 바람에 흔들거리는 억새의 향연에 취해 넋이 나간 듯 모두들 말이 없다. 이처럼 크나큰 자연의 신비는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들의 가슴에 스며든다. 쪽빛 하늘과 바다가 한데 어우러지고 바람결에 흐느적거리는 은빛 으악새의 흐느낌이 한참 동안 길손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억새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하늘을 향해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며 살아간다. 그것은 꼭 필요치 않는 것은 과감하게 버리려는 비움의 자세를 견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꺾이지 않으려고 바람에 흔들거리지만 고개는 숙이지 않는다는 억새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풍성하게 준비한 음식으로 잔치를 벌인다. 
 

 봉화대로 사용되었던 연대봉에 올라 내년에도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억새의 향연을 또다시 느껴보리라 다짐하고 내리막길로 내딛는다. 올라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서로 교행하기 곤란하고 가뭄으로 흙먼지가 일어나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애쓰고 오르막을 힘겹게 오르는 산우들에게 격려의 말 한마디를 던져주고 조심스레 내려간다.   

 

 정원석이라고 부르는 기묘한 탑 형상의 바위를 지나가다 오른쪽으로 희미한 길이 보이기에 호젓하게 걷고 싶어 그길로 접어든다. 잡목 그루터기들이 날카로운 화살촉 모양으로 방치되어 조신하지 않으면 다칠 위험이 많아 신경 쓰며 내려오다 보니 정담을 나눌 겨를이 없어 아쉽기 그지없다. 그러나 뜻밖에 미답로를 밟는 행운을 잡아 후회스럽지 않다. 
 

 정상적인 등산로로 내려온 동료들이 주차장에 도착해서 기다리다가 지쳤는지 어디쯤 내려오고 있느냐고 전화가 빗발친다. 안전하게 내려가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안심시키고 차분하게 가을의 풍류를 즐기면서 내려오니 뒤풀이 준비에 여념이 없다. 
 

 만추의 정취가 물씬 배어나는 억새 물결에 휩싸여 가을의 노래를 마음껏 부르면서 천관산을 찜한 오늘 산행이 너무나 즐거워 해피~ 해피한 탓인지 띵한 머리를 개운하게 식혀준다. 이런 묘미를 자아내기에 가을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지는가 보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소중한 사람에게 편지를 띄우련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