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경 새재 산행기(5) -

 

‘10년간 100군데 산 찾아다니기’

 

이번은 경북에서 골랐다. 200곳 이상을 찾아도 썩 내키지 않았다. 처음에는 의성의 비봉산을 짚었다. 문익점 선생 기념비도 그렇고, 삼국시대의 국가 조문국이 마음에 끌렸으나, 너무 단조로워 불만스럽다. 그래서 포기했다.

그런 중에 문경에서 찾는 것은 어떨까 생각했다.

문경시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관광 안내도를 보다가 무릎을 쳤다.

‘ 문경새재 ’

여기다.

문경새재를 소개한 안내도가 청계천을 소개한 것처럼 아기자기했다. 멀리 아래에서 정상까지의 계단식으로 소개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행선지를 정할 때는 늘 이렇게 허둥댔다. 둘째아들 이름을 지어 출생신고할 때 허둥댔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도 신고 마지막까지 시간에 쫓겼다.

 

유, 청년시절 ‘전설 따라 삼천리’를 라디오로 재미있게 듣던 시절이 있다. 신립 장군이 생전에 한번은 도와주어 살렸지만 또 한번은 외면해서 죽은 여인 유령이 나타나, 유령이 일러주는 대로 전투를 치러 첫 번 싸움은 대승했지만, 두 번째 싸움은 일러주는 대로 했다가 대패했다는 전설을 기억하고 있다. 그 문경새재 이야기를 조령이야기라고도 불렀다. 당시의 이야기는 내 마음에 늘 멀고 높은 곳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느낌이 오늘따라 새삼스럽다.

머리위 높은 곳 깊숙이 자리잡은 영혼의 별에 외따로 있던 섬 같은 이야기가 신비스럽게  다가왔다. 

 

아침 7시 15분에 집에서 서둘러 출발했다.

강변역에는 8시에 도착했다. 고속버스는 8시 20분에 출발했다.

요금은 10,700원. 승객은 운전기사 빼고 3명.

뒤쪽에 앉았던 나이든 여자가 내 옆으로 다가와서 앉았다.

“심심한가보군요.”

“예.”

보통 용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굴에는 병색이 있다. 그러고 보니, 용기가 아니고 만약의 경우를 나름대로 대비한 거라고 생각했다.

신장과 심장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그 여자는 건대분교까지 간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그 멀게만 보이던 문경새재가 충주 근처라는 점에 놀랐다.

고속버스는 9시 50분에 충주에 도착했다.

여인은 거기서 내렸다.

충주시내로 들어가지 않고, 고등학교 시절 행군하던 임경업 장군을 기리는 충렬사 쪽으로 가더니, 이어 10시 20분에는 연풍을 지나갔다. 연풍면은 이웃집 얘기처럼 많이 듣던 괴산군의 여러 면 중 하나다.

거기서 겨우 10분 더 가니 문경새재 버스 정류장이 있는 게 아닌가.

방금, 문경시청까지 수십km로 나타나 있어 시청 부근이 목적지인줄 알고 착각에 빠져 근심했던 터다. 다행히 더 이상 멀리 갈 필요가 없다.

관문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7분 정도 가면 된다고 말했다.

10시 45분에 시내버스를 탔다. 요금은 1,300원이다.

 

10시 55분, 관문정거장에 내리니, 어떤 아주머니가 같이 걸으면서 촬영세트를 보러 왔느냐고 물었다. 자기는 엿을 파는데 3관문 까지 가려면 네댓시간은 걸리므로 식사를 하고 가야한다면서 알고있는 식당으로 안내했다. 나는 은연중 그 아주머니의 관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낯선 이의 끈질긴 친절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악의가 없게 보여 버티다가 말하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6천원 하는 비빔밥을 아침으로 먹었다.

그 때가 11시 30분.

입장료 2,100원을 내고, 입장표를 끊었다. 엿 파는 아주머니는 2천어치 엿을 너무 많이 줬다.

 

12시까지는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향토박물관인데 느낌이 기획 관광단지 같다.

고서전시실에는 강태공전, 장화홍련전, 임진록전 등, 전부터 듣던 소설의 필사본이 진열돼 있다. 구전을 뒷받침하는 숨은 공로서들이다. 그 밖에 향토 출신의 인물들을 전시했다. 눈에 띄는 것은 신문에 크게 보도된 적이 있던 평산 신씨의 미이라였다. 발굴에서 유물 분석까지의 과정을 사진과 더불어 구분해 전시했다.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향토작가의 그림들을 전시했다. 생전 꾼 꿈을 그려 모은 것이다. 배고픈 중에도 그렸음을 나타낸 글귀를 보니, 배고픔보다 체면을 중히 여긴 선열들의 올곧지 못한 처신들이 미련스런 대로 진하게 배어있다.

 

12시부터 1시 까지는 촬영세트를 둘러봤다.

문경새재는 더 이상 첩첩 산중의 오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서민들의 마을로 꾸민 초가집과 이엉으로 덮인 야트막한 담장을 보니, 다소, 혼란스럽고 충격적이다. 그 모습은 중학교를 지나 고등학교 시절까지 내 삶의 푸근한 보금자리였다. 그러나 지금 보니 초가지붕과 담장들이 정겹기보다는 골동품된 유물 같다. 유년시절 그 담장에는 벌도 살고, 나비도 살고, 나팔꽃도 올라가 살고, 뱀도 살았다. 초가지붕도 그랬다. 굼벵이도 살고, 새도 살고, 박 덩굴도 올라가 살고, 호박도 올라가 살았다.  

왕궁은 쓸쓸했다.

촬영세트라 어쩔 수없는지 모르지만, 골목마다 나무와 꽃이 없어 아쉽다. 우거진 숲, 나무가 그립다. 일지매가 산책했다는 산책로를 걸으면서 촬영세트장 보는 것을 끝냈다.

‘왕건’, ‘주몽’, ‘연개소문’ 등의 사극 촬영장이라고 했다.

어떻든간에 단 시간에 인간의 세계를 속성으로 둘러본 기분이다.

 

지금까지 인간의 삶 총론을 보았다면 이제부터는 각론을 들여다본다고 생각했다. 촬영세트장을 통해 인간 세계의 축소판을 보았다면, 이제 그 세계를 내려다보면서 하늘로 한발 한발 올라간다고 생각했다.  

 

길은 호젓했다. 윤곽도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처럼 뚜렷했다. 산신령 굴에서 서민들 삶의 불안, 공포, 무지, 어둠, 희망을 느꼈다. 지름틀 바위는 멋있게 생겼다. 지름이 줄줄 흘러내릴 것 같다. 산골에 있느니, 지름틀이지 아프리카 해변에 있다면 악어바위가 어울렸다. 몸체와 이빨이 섬뜩한 악어와 똑 같다. 하여튼 토속적이다.

 마당 바위에 앉아 과도로 사과 한쪽을 베어 입에 넣고 씹었다. 달콤함이 혀끝으로 모였다.

길손을 습격하던 산적의 마음이 됐다.

나도 배고픈 산적이었다면 도리가 없으리라.

 

 그속에서 떠오르는 또 하나의 발견.

‘과거보러 가는 길’ 이라는 샛길이, 강물로 흘러드는 지류처럼, 여러 갈래로 문경새재 길로 모였다. 이 길로 가야 합격해야 한다는 맹목적인 믿음이 그 험한 오지임에도 가게 했거나, 피할 수 없는 지름길이라 다른 도리가 없었는지 모른다. 추풍령은 피했다고 한다. 낙엽처럼 떨어진다는 미신 때문이다.

젊은 청춘을 과거 공부에 몸 바친 젊은이들이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초라한 행색으로 하나 둘 이길로 들어섰을 광경이 눈에 선했다. 영락없이 강물로 흘러드는 개울물의 모습이다.


 

주막있던 자리는 오히려 숙연했다. 담고 있는 사연이 넘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깊은 두레박 우물터가 내려다 보였다. 화려함과 젊음이 사라진 여인의 자궁안 같다.

경상도 출신 과거 합격자가 60%였다고 해서 그런지 시를 남긴 학자들이 즐비했다. 이 나라에서 대학자가 되려면 문경새재를 거쳐야 했다는 말을 하고싶을 정도였다. 조선시대의 대학자들은 모두 문경새재를 들렀다가 간 기분이다. 금방 주막에서 한시 짓기 대회가 끝난 것 같다. 

이 퇴계, 김 시습, 이 율곡, 정 약용, 유성룡 등 부지기수다.

 

설렁하지만 이 율곡의 시를 옮겼다. 물론, 한시를 한 글로 옮긴 것이다.

 

‘ 새재에서 묵다’

 

험한 길 벗어나니 해가 이우는데

산자락 주점은 길조차 가물가물 

산새는 바람 피해 숲으로 찾아들고

아이는 눈 밟으며 나무지고 돌아간다.

야윈 말은 구유에서 마른 풀 씹고

피곤한 몸종은 차가운 옷 다린다.

잠 못 드는 긴 밤 적막도 깊은데

싸늘한 달빛만 사립짝에 얼비치네. 

 

  말년의 서애 유성룡도 같은 제목으로 이런 시를 남겼다. 같은 제목의 시를 남긴 사람은 이곳에 있는 것만 넷 이상이다.

 

살랑살랑 솔바람 불어오고

졸졸졸 빗물소리 들려오니

나그네 회포는 끝이 없는데

산 위에 뜬 달은 밝기도 해라

덧없는 세월에 맡긴 몸인데

늘그막 병치레 끊이질 않네

고향에 왔다가 서울 가는 길

높은 벼슬 헛된 이름 부끄럽구나.

 

 이 산에는 나무의 종류도 많았다. 물박달나무가 야무져 보였다.

 

 교귀정을 지났다. 경상 감사의 업무인수인계행렬 장소다. 300여명의 행렬이 이곳에 집결했다가 일을 보고 지나갔을 거다.

용추, 용담 등 용에 관련된 이름과 전설이 더러 있다. 지금은 물이 없어 과장된 느낌의 폭포도 있다.

천주교 박해를 피해 예배를 봤다는 예배굴. 그 굴은 김대건에 이은 최앙업이라는 신도가 박해받으며 기도하던 곳이란다. 지금의 성당에 비하면 돼지우리만도 못했다. 

산적, 어두움, 짐승소리, 기도 소리 ... 어딘지 으스스했다.   


 

 오르는 길에는 소원성취탑이 여럿 있다. 소박한 민간신앙이 만든 간절한 염원의 흔적이리라. 처음은 오가는 이들이 던져서 만들었을 테고, 언젠가 부터는 얹어놓았을 것이다.

 실제 물레방아가 있었다고 생각하기에는 무리이지만, 수로처럼 짠 길고긴 목재로 만든 수로 위로 물을 흘러가게 해서 물레방아를 돌리게 한 흔적이 있다. 크기나 규모는 세트장의 모형정도다.

 

 제1관문 매표소에서 마지막 제3관문까지는 6km가 안됐다. 그 길 양 옆에 인간사에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삶을 다 진열한 듯 했다.

 

주흘산 가는 길이 나타났다. 거기서부터 거의 6km 가까이 되는 길이니, 가는데 두 시간 이상 걸린다. 오늘은 인연이 없다.  


 

 드디어 제2관문인 조곡관이 나타났다. 시간은 오후 2시다.

조곡관 문을 들어가 약수터로 달려가 한 모금 쭉 들이켰다. 주변의 나무에는 한시를 번역한 한글 시가 나무 이름대신 명찰처럼 붙어있다. 그것을 일일이 읽다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다.

 상처난 소나무도 많았다. 제왕 수술한 여인의 꿰맨 자국처럼 흉했다. 일본인들의 송진 채취 때문에 상처난 소나무가 반세기 이상 자라다보니, 그 상처도 계속 자라 구겨진 뱃골처럼 넓어졌다. 오랜 세월 수술 자국이 계속 자란 것 같다. 그런 소나무가 꽤 많았다.

 

 그러나, 더 이상 가슴 아픈 흔적은 혈지른 자리다. 영웅의 탄생을 두려워한 일본인들의 소심함과 조급함이 그랬다는 설도 있고,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온 이여송 장군이 그랬다는 설도 있다. 중국이나 일본, 모두, 한반도에서의 영웅 등장은 원치 않는다. 혈을 지르자 피가 흘러내렸다는 붉게 물든 바위가 있어 더욱 그럴 듯했다. 선죽교도 피 흐른 전설이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곳에서 불린 노래인지 모르나, 흘러나오는 아리랑 노래도 그렇고, 한시를 감상할 수 있게 따로 길을 가꾼 것도 특이했다.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한시 10여 수를 한글로 번역해 큰 돌에 새긴 다음 길을 따라 비석처럼 세워놓았다.

 

 서낭당의 흔적이 그랬던 것처럼, 새재우의 전설도 흥미롭다. 큰 바위 아래에서 비 피하다가 싹튼 애정도 그렇고, 훗날 어머니가 일러준 아비의 엉덩이에 큰 점이 있어 알게 된 부자간의 맞대면도 그렇다. 발가락이 닮은 거나 왼손잡이를 닮은 거나, 물레방앗간 사랑이나, 바위 아래 사랑이나 다 그렇고 그렇다. 그리움과 연을 중요시한 정서 때문이다.  

사람 그립던 시절, 피임약도 없던 시절, 얼마든지 있을 수 있던 일이다. 다만, 미혼모의 위치가 처량했을 뿐이고, 지금 말로 말하면 그 남녀들은 벤처기업에 투자를 한 것처럼 사랑에 집중한 셈이다.

 

 귀틀집에 큰 호감이 갔다. 튼튼함과 단순함 때문이다. 4방 네 귀퉁이에 넓적다리 보다 굵고 튼튼한 통못을 고정시켜 박을 수 있다면, 또, 그 통못으로 고정시켜가며 통나무를 쌓은 후 흙과 콘크리트로 입힌 후 타일을 붙이면 최고일 것 같다.

 속은 통나무, 겉은 미끈한 타일 조각.   

 가볍고 견고하고 통풍 잘 되는 아름다운 집을 꾸밀 것 같다.

 

 산을 오르는 사이에 사람들의 모습이 확 줄었다. 되돌아가는 사람도 있다.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표현이 맞다. 짧은 거리가 아니고, 꽤, 지루하고 멀었다.

 

 신립장군이 위장 진을 쳤다는 곳을 지나갔다. 새재(조령)에서 적을 맞아 싸우자는 부하 장군 김여불의 간언을 물리치고, 허수아비를 세워 위장진을 쳤다는 곳이다. 전설에서 꿈에 나타난 여인이 그렇게 하라고 일러줬다는 곳이다. 신립 장군은 그곳에 위장진을 치고 탄금대로 가서 배수진을 쳤다. 위장진은 왜병 초병에게 발견됐다. 허수아비 초병 머리위에 까마귀가 앉아 울다가 도망갔기 때문이다. 돌파당한 8천여명의 농민군은 왜병 18천명에 의해 유린됐다.  

 명장 신립장군이 꿈만 믿고 전쟁을 했을까마는 전쟁의 승패 예측은 인생의 갈림길 예측만큼 답답하고 불확실했다. 그 전쟁의 결과가 천년만년 전해지기 때문이다.

 

 미완성 마애를 보는 추측은 더욱 재미있다. 한 마디로 바위에 세 사람을 그리다가 만 이유를 놓고 상상의 나래를 폈다. 공덕이 많은 사람 생전에 그 공덕을 기리고자 석공이 새기는데 주인공이 극력 말려서 중단했을 거라는 추측이 그 하나다. 또, 하나는 공덕 없는 사람이 스스로를 기리고자 새기다가 주위 사람들의 극력 반대로 그만 뒀을 거라는 거다. 내가 보기에 후자가 맞는 것 같다.

 

 거의 정상에 다왔다는 신호로 어사화를 쓰고 과거 본 유생이 돌아오는 것을 축하하는 음악이 흘렀다. ‘금의 환향’ 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성문을 지나보니 여기부터는 충청북도이고 수안보로 가는 길이다.

 3시 30분이다. 

 되돌아와 매점으로 들어갔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집에서 담갔다는 솔잎 막걸리를 사서 마셨다. 한 동이를 다 마실 수 없어 반 동이만 반값인 3천원 주고 달라고 했다. 그리고, 라면이 그렇게 먹고 싶어 3천원을 따로 주면서 끓여 달라고 했다.

 온 세상이 내 것 같다.

 올라온 길을 다시 내려가니 완전히 어둡다.

 5시 30분에 출발지인 제1관문 매표소까지 내려왔다.

 

 어두움 속에서 아침의 엿장수 아주머니와 얼굴이 예쁘고 보조개가 큰 제천서 온 어묵아줌마가 반갑게 맞았다. 어묵 한 조각을 물어뜯자 엿장수 아줌마의 조카가 아주머니를 모시러 왔다. 아주머니는 시내버스를 타러가려면 기다려야 하니, 자기네 차를 타라더니 나를 태웠고, 버스터미널까지 태워다 주었다. 고마운 마음이 후끈했다.

 그렇게 그림같은 하루를 보냈다(06. 12. 25. cnilter@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