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지루했던 일을 마침내 마무리짓고 나니, 어느새 가을이 다 가려고 그런다. 어떡하지, 아직 제대로 가을산을 보지도 못했는데. 지난 늦가을 산과는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인연도 없었던 나를 사정없이 산으로 이끌었던 그 낙엽, 그 노을, 그 길의 정취를 꼭 다시 느껴보고 싶은데...마음이 갑자기 마구 급해진다. 올 가을에는 서울에 있는 예쁜 산들을 나풀나풀 밟아보자 내 다짐하지 않았던가... 주말까지 매우 시급했던 음주 및 인간관계에 관련된 일들을 대충 정리하고, 월요일 몸을 재정비한 다음, 화요일, 마침내 길을 나섰다.

 

언제: 2006년 10월 31일 화요일

어디로: 백운대 제2매표소-하루재-백운대-백운대매표소


북한산으로 간다고 작정을 하긴 했는데, 과도하게 몸을 재정비한 나머지 집을 나서며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후 두시 반이 넘었다. 바쁜 와중에 집 앞에서 윗길 아랫길을 오가며 한참을 혼자 방황을 한다. 윗길로 가면 뒷산 관악산이고, 아랫길로 가면 예정대로 북한산이다.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늦을 것 같은데... 물론 야간산행 준비도 하긴 했지만 홀로는 초행길이라 새삼 불안한 마음에서다. 에이, 가다가 불안하면 언제든 그냥 내려오자. 절대 미련두지 말고...알았지? 혼자 다짐 또 다짐을 하고서야 마침내 아래쪽 길로 쭈욱~~(이러느라 또 10분이 넘게 지체가 됐다).


북한산, 아, 맞어..이제 삼각산으로 부른다 했지. 삼각산이라면 김상헌의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똥말똥 하여라”에 나오는 산이라는 것외에는 아는 게 거의 전무하다. 아, 물론, 삼각산의 세 봉우리가 백운, 인수, 국망봉이라는 것도 물론 이제는 안다. 산악회 사람들 중에는 수십, 수백 번(진짤까??)을 와봤다는 사람들도 있던데, 나야 뭐 묻혀서 두어번밖에 와보지 못했지만 우아하면서도 웅장한 풍광에 그 심정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혼자서는 늘 뒷산만 가려니까 지겨워서 이제 활동반경을 쪼~~금 넓혀볼까 하는 취지로 시작한 산행이니 그래도 일단은 뽀대나는 북한산부터 시작을 해야지...암.

 

 


어제 친구가 일러준 대로 수유역에서 내려 120번 종점을 거쳐 도선사 입구로 간다. 시간은 벌써 네시가 다 돼간다. 널찍한 진입로에는 아주는 아니겠고 비교적 부지런한 사람들이 몇 명씩 하산을 하고 있다(아주 부지런한 사람들이야 물론 벌써 산행을 마쳤을 시간). 갈림길이 나와 표지판을 보니 산길과 아스팔트 길이 있다. 산길은 전혀 모르는 길이지만 물론 아스팔트 길보다야 낫겠지 싶어 오른쪽 산길로 접어들자마자 매표소가 있다. 아니나 다를까 매표소 아저씨는 금방 어두워지니 조심해서 후딱 다녀오라며 재차삼차 주의를 준다. 괜시리 막 뒷골이 땡기고 가슴이 콩닥댄다.



 

 

하지만 역시 자연은 사람은 참 단순하게 만든다(나만 그런가?) 고즈넉한 산길로 접어들자마자 어느새 시간 걱정은 속세와 함께 등뒤로 멀어져간다. 내가 좋아하는 인적 드문 숲길이다. 낙엽도 비교적 많다. 바야흐로 태양은 기운이 떨어져가는 티를 조금씩 내면서 울창한 나뭇잎들 사이로 비실비실 내 동정을 살핀다. 짜식...그냥 갈 수가 없어 한컷 또 찍어준다. 그러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지가 내 동정을 살필 때가 아니라 내가 지 동정을 살펴야 할 때다. 에그머니나... 고고, 고고...

 


 
 
 

영봉가는 갈림길이 나오자 비로소 사람들이 보인다. 잠시 쉬었다 갈꺼나...방석을 깔고 앉아 모처럼 사람 구경이나 해보자. 웬지 누군가 만날 것 같기도 하지만, 내가 아는 영혼들 가운데는 평일날 이 시간에 이런 곳에 올 만한 영혼이 물론 없겠지...했는데, 앗, 기적이 일어났다! 바로 얼마 전 염초봉 릿지산행 때 처음 뵌 산악회 님들 중 한 분이 누군가에게 길을 묻고 계신거다. 와우, 이런 인연이... 오늘 하루 가볍게 회사 땡땡이를 치시고 새벽부터 사패, 도봉산을 거쳐 영봉을 넘어오신거란다. 피곤하기도 하고 시간도 늦었기에 그냥 내려갈까 어쩔까 망설이던 참이라셨다. 그러니까 나는 그 중차대한 갈림길에서 하늘에서 똑 떨어진 안내판이 된 셈이다. 그렇게 우리는 동행이 되어 한결 가볍고 즐거운 발걸음으로 백운대로 향했다.



 


정상에 다다랐을 때는 5시 반이 넘었다. 사람 하나 없이 저물어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강렬한 바람에 나부끼는 태극기가 사뭇 비장해보여 괜시리 콧날이 시큰하기도 했다. 기념으로 배낭에 품어온 비장의 25도짜리 소주를 딱 한모금씩 나눠 마셨다. 심장을 터뜨려 버릴 것만 같은 바람과 저 멀리 도시의 불빛을 밝혀가는 어둠 속에서 다시 한번 실감을 한다. 역시 혼자보다는 둘이 낫구나. 나 덕분에 정상을 찍었다고 말씀은 하셨지만 절반은 걱정이 돼 따라오신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산벗님께 더욱 감사한 마음이다(물론 마음만...이 아니고 이 때문에 결국 또 한 건을 더 저지르게 되지만서도...가을산, 낙엽에 묻힘 제3편에서 공개될 예정). 

 

혼자보다는 둘이 낫다. 하지만 그렇게 절감을 하고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그동안 한참을 구석에 박아두었던 두 장의 카드를 꺼내들고 오히려 혼자의 패를 택했다. 언제나 둘이 반드시 나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곳을 보고, 같은 길을 걸어 가며, 어둠 속에서도 기꺼이 손을 잡을 수 있는,  그런 인연들이 아니라면 차라리 혼자가 덜 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