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백-금원-현성산 산행기

 

ㅇ 일시 : 2004. 12. 26(일)
ㅇ 위치 : 경남 함양군 안의면, 거창군 위천면(기백 1,331m, 금원 1,353m, 현성 965m)
ㅇ 코스 : 용추계곡 일주문-기백산-동봉-금원산-현성산-금원산휴양림(18km. 6시간30분)
ㅇ 찾아간 길 : 대진고속도로-지곡 I.C - 거창방향 약 20분 진행-용추계곡


   문득, 삶이 초라해지고 마음이 추워지는 날이면 기백산으로 떠나리라. 기백산에 올라 황석, 거망, 남덕유로 이어지는 그 장쾌한 능선 앞에 서리라. 가난하고 위축되고 찌들었던 마음들. 저 매섭게 휘몰아치는 칼바람 속에서 훨훨 날려보내리라.  
   

   성탄절 다음 날. 유비형님 내외분과 거창 땅으로 향한다. 7시 20분 대전 I.C를 통과한 '사'산악회 차량이 지곡 I.C를 빠져나와 용추계곡에 도착하니 9시 10분. 간단하게 장비를 정비한 후 바로 기백산 오름질을 시작한다.

  

   그리 험하지도 비탈지지도 않은 길을 2시간 못되게 오르다 보니 어느새 기백산 정상이다. 정상에 올라서자 첫 눈에 들어오는 것은 주위를 압도하고 있는 황석, 거망, 남덕유로 이어지는 장쾌한 능선. 1300미터 이상의 산들이 연봉을 이루며 만들어내는 스카이라인이 일순간에 가슴속의 티끌들을 날려 버린다. 시선을 돌리면 몇 개의 바위와 함께 이어지는 멋스러운 금원산 능선. 지난 밤 내린 눈이 1300미터 이상의 능선 곳곳에 남아 있어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환호성 섞인 풍경을 사진기에 담으며 얼른 능선 길로 들어선다.

  

   금원산으로 향하는 능선 길. 기백산 정상에서 떠나간 시선이 능선 길 내내 돌아 올 줄을 모른다. 장쾌하게 일획을 긋고 있는 황석, 거망의 줄기가 금원산 능선과 평행을 이루며 계속하여 따라오고, 이제 남덕유를 지나 무룡산, 향적봉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덕유의 줄기들이 흰눈을 뒤집어 쓴 채 금원산 앞쪽으로 늘어선다.

  

    계곡에서 휘몰아쳐 올라오는 칼바람을 맞으며 1시간 30여분이 넘게 그 능선 길을 걸고 있으려니, 그 거대한 산줄기 앞에서 살아온 날들이 갑자기 한없이 부끄럽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저렇게 장엄하고 웅장하게 살아가는 삶도 있는데---저렇게 당당하고 힘차게 살아가는 삶도 있는데---나는 왜 그리도 못나게 살아왔던가? 나는 왜 그리도 쭈글쭈글하고 조잡하게 살아왔던가?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속에서 커다란 짐승 한 마리가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한다. 세상에서 누군가를 미워하여야 했던 일. 세상에서 누군가와 다투어야 했던 일. 세상에서 세파에 휩쓸려야 했던 일. 꿈과 희망을 포기한 채 막연하게 떠돌아야 했던 일. 술 마시고 세상을 욕하였던 일. 진실 되지 못하였던 일. 사랑하지 못하였던 일. 최선을 다하지 못하였던 일. 이제는 더 열심히 살자고--- 이제는 더 크게 살자고--- 이제는 더 깊고 힘차게 살자고--- 칼바람 속에서 커다란 짐승 한 마리가 사정없이 울부짖는다.

  

   뜨거워진 마음을 안고 이제 금원산에 오른다. 덕유산 줄기는 나무에 가려 조망이 시원치 않지만 지나 온 기백산의 줄기가 참으로 늠름하게 서 있다. 그 꼿꼿한 모습. 그 당당한 모습. 세상사에 옹색하였던 마음씀을 다시 한번 부끄럽게 만든다. 잠시 지나온 기백, 황석, 거망, 덕유산의 줄기를 뒤돌아보고, 마지막 코스인 현성산으로 향한다.

  

   현성산. 현성산의 높이가 965m이건만 금원산에서 바라보는 현성산은 동네 뒷산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 만큼 주변의 산들이 높기 때문에 일어나는 착시현상이겠지만, 저 아래에 있는 조그마한 산이 계룡산보다도 높다는 사실은 도저히 믿겨지지가 않는다. 암릉과 암봉의 연속인 현성산 구간을 목숨을 담보로 잡힌 채 조심조심 정상으로 향한다.

  

   현성산 정상에 올라서자 첫눈에 들어오는 압권은 덕유산 줄기다. 현성산의 아름다운 암봉을 배경으로 향적봉에서부터 흘러내린 산줄기가 그야말로 병풍처럼 늘어서며 남덕유로 흐른다. 저렇게 아름다운 덕유산 줄기를 한줌의 거침도 없이 감상 할 수 있는 곳이 있다니---산을 감상하려면 감상하려는 산과 마주하고 있는 산을 오르라는 말을 정말 실감나게 하는 곳이다. 지금까지 걸어온 기백, 금원의 높다란 산줄기와 부드럽고 힘차게 펼쳐져 있는 덕유줄기. 거기에 우뚝우뚝 솟아 있는 현성산의 암봉. 역시 산은 바위가 곁들여져야 제 맛이라는 생각이 절로 난다. 능선에서의 뜨거웠던 마음도 이곳에서는 잠시 긴장을 푼 채, 풍경의 아름다움 속으로 빠져든다. 산행시간이 여유가 있다면 한없이 머무르고 싶은 곳이지만, 정해진 시간이 있어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나무하며 서둘러 하산 길로 접어든다.

  

   하산길. 짧아서 좋다. 이곳의 지대가 높기 때문이리라. 약간 가파르지만 50여분만에 내려올 수 있는 하산길이 지친 몸에 더없이 고맙다. 예약된 장소로 내려와 뜨끈한 찌개와 막걸리 한잔으로 산행을 마무리한다.

 

   기백-금원-현성산. 오늘은 너를 만나 뜨겁고 아름다웠나니--- 살아가다가 어느 날 심장의 피가 식어지는 날이면 너의 품에 다시 안기리라---잘 있으라. 그 때까지----


 

(금원산 가는 능선)


  

(금원산 가는 능선 암릉)


 

(금원산 가는 능선에서 본 황석, 거망산)


 

(금원산 가는 능선에서 본  남덕유)


 

(금원산에서 본 기백산)


 

(현성산 암릉)


 

(현성산 암봉과 멀리 덕유산 능선)


 

(현성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