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눈 오는 날 지리산 중북부능선의 7암자 순례

 

-산행일시: 2004. 12. 24.

-산행구간: 실상사- 약수암- 삼불사- 문수암- 상무주암- 영원사- 도솔암.

-함께한 사람: 초생달님.

 

                                           <영원사의 눈 내리는 풍경>

 

나는 기독교인도 아니고 佛子(불자)도 아니다.

요즘 같이 어렵고 힘든 세상에 내 살아온 흔적이 문득 덧없는 것 같은 아쉬움이 쌓이고, 삶이 고달프다고 느낄 때 부처를 알지 못하지만 훌쩍 떠나 그 곳 피안의 세계에 머물고 싶다. 빛 바랜 불상 앞에 합장 한 번 올려보면 과연 내가 이 곳에 왜 들어와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애당초 속세의 번뇌를 씻어주리라는 기대는 버렸다. 할 수만 있다면 스님과의 대화 속에 어떤 진리를 찾고 그것도 할 수 없다면 무심의 경지라면 너무 거창할 것 같고 허허로운 마음 그대로 떠나 보리라. 암자와 사찰을 따라가며 자기 자신을 한번쯤 되돌아보는 사색의 코스이기 때문에 암자에서 되도록이면 여유 있게 머물기로 한다.

 

                                        <실상사 가는 길: 만수천 건너>

 

-떠나기 전.

크리스마스 이브 날에 무슨 산에 가느냐고 큰 애가 야단이다. 작년에도 꼭 이날에 지리산 만복대에 갔었던 기억이 있다. 기독교인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냐면서도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떠올린다. 마냥 기다려지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와 들뜬 마음에 순간순간이 아쉬웠던 그 날들이. 그리고 빨리 산행을 마치고 가족과 함께 해야겠다는 마음의 약속을 남긴채……

 

                              <실상사 증각대사 응료탑비: 보물 제 39호>  

             

                                    <실상사 보광전과 석등: 보물 제35호>

 

                                 <실상사 경내와 3층석탑: 보물 제 37호>

 

-08:00 실상사

새벽 5시 25분에 출발하여 이곳의 실상사에 8시 다 되어서 도착하였다.

이른 아침도 아닌데 만수천 주변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잔뜩 흐린 날씨는 금방이라도 눈이 올 것만 같았는데.. 좌측의 돌 장승이 익살스런 표정으로 우리를 맞는다. 작년 여름에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 새만금을 살리겠다며 삼보일배를 나섰던 도법 스님이 이곳 출신이라는 것과 마을보다 높지 않은 산사의 어수선한 모습을 보고 나서 솔직이 실망하였던 이곳이 아닌가! 그런 후로 실상사의 내면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 사찰 중 보물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통일 신라시대의 고찰로써 사람과 가깝다는 地理(지리) 때문에 그 찬란했던 1000 년 전의 영화는 숱한 화제와 도굴로 시달려 왔던 것이다. 요즘 전국의 사찰이 어마어마하게 하루가 멀다 하고 달라짐과는 거리가 멀게 실상사는 쇠락한 고찰에 머물고 있음이 아쉬움을 더한다.

 

 

 

                               <실상사 보광전과 보물 제 38호인 증각대사응료탑>

 

 

경내의 모습은 마냥 여유로움 그 자체이다. 부지런히 빗자루로 경내를 쓸고 계시는 스님의 부지런함에 두 손으로 합장하며 인사를 건넨다. 보광전 앞 뜰에 놓인 실상사의 삼청석탑과 석등이 예사롭지 않더니만, 이윽고 스님들이 머무는 요 사채를 지나 걸으면 거북 모양의 탑비를 만나게 된다. 실상사 중각대사의 응료탑비로 의미있는 보물이다.

 

 

 

                         <약수암의 사립문을 산객을 맞이하고 눈은 내리는데......>

 

 

< 약수암 가는길>

실상사를 뒤로 하고 넓은 콘크리트 임 도를 따라 10여분을 오르면서 우리의 눈에는 분명 눈이 내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분명 좋은 징조라 생각하면서도 어쩌면 오늘 산행이 계속 이어질까 하는 불안감도 없지 않았다. 이 곳 삼거리에서 직진 길을 버리고 전봇대 맞은편의 좌측 길을 따라 계속 오르면 된다(우리는 직진 길을 택하여 한참 오르다 다시 되돌아옴:15분 알바코스) 약수암 닿기 직전 우측능선으로 유혹하는 등산로가 있는데 이 유혹을 뿌리치며 계속 임 도를 따라가면 이윽고 약수암이 나타난다.

 

 

 

                               <약수암 목조탱화: 보물 제421호 와 약수암의 보광전>

 

-09:05 약수암

약수암은 실상사의 (말사)로써 1937년 함양의 불자 한 사람으로써 시주 금으로 증수하였다 한다. 1974년 비구니 스님의 두 번에 걸쳐 증수하였으며 경내는 항상 맑은 약수가 솟아나는 약수 샘이 있어 약수암이라 한다. 이곳에는 약수암 보광전 탱화의 보물이 있다. 이제 제법 굵은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맛 좋기로 소문난 약수샘에서 한 모금으로 물맛을 음미 해본다. 차갑지 않으면서도 시원한 그 맛이다. 또다시 경내를 둘러보고 개 짖는 소리가 나지만 이내 스님은 나타나질 않고, 우리 역시도 설마 방해가 될까 싶어 조심스럽게 빠져 나온다.

 

                              <삼불사 가는 길 삼거리에서>

 

                                                 <삼불사 가는 길>

 

                                                     <삼불사에서>

 

-09:35 도마마을

약수암에서 도마마을까지는 산사 면을 타고 계속 이어진 길을 가면 된다. 왼쪽으로 인월-마천간 도로가 눈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며 앞의 천왕의 모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이따금씩 낙엽 위에 쌓인 눈이 뽀드득 소리를 내면서 부드러움에 전해 오는 느낌이 좋다. 마을 사람에게 삼불사 코스를 물어 보고 도마 1교를 건너서 임도를 따라 오른쪽으로 견성골을 끼고 오른다. 이윽고 Y자 길이 나오면 왼쪽 길을 버리고 우측 길로 오른다.

 

 

 

 

 

                                          <삼불사 경내를 둘러보면서>

 

-10:50 삼불사

도마마을에서 40여분 오르니 삼거리 이정표가 나온다. 좌측은 문수암 가는 길. 우측은 삼불사 1km다. 이윽고 20여분 오르니 개 짖는 소리가 요란스럽다. 초생달님과 둘만의 호젓한 이 산행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더욱 더 쏟아지는 함박눈을 맞으며 산행하는 모습이 얼마만의 행운인가 하며 좋아하는 초생달님, 이제 그만 짖을 때도 됐는데 그칠 줄 모르는 개 짖는 소리는 이 곳에 도착해서도 결코 불청객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굴뚝에서 피어 오르는 연기는 떨어지는 함박눈과의 조화가 동화 속의 그림나라 같았다. 이곳에는 비구니 스님께서 계신 걸로 알고 있어 소리쳐 스님을 불러 보지만 사람의 인기척은 있는데 좀처럼 문은 열리지 않아 그냥 그곳을 나온다.

 

 

 

                              <눈은 계속 내리는데 문수암의 도봉스님은......>

 

-11:20 문수암의 도봉스님은……

사실 삼불사를 나서면서 문수암의 도봉스님을 만나 뵐 수 있을까 하는 큰 희망을 걸고 있었다. 넉넉한 인품에서 우러나오는 度量(도량)이 넓으신 스님이신데.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계시지 않구나. 처마 밑 빈 의자에 걸터앉아 혜일스님의 신년 메시지를 떠 올려본다. 나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것은 佛菩薩(불보살)의 모습이요, 자기를 높이고 남을 업신여기면 이 자리가 곧 고통이 그림자처럼 따르는 衆生(중생)들의 세계다. 우리 모두의 마음을 열어 자비를 베풀어 나간다면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密嚴淨土(밀엄정토) 를 이루는 청정한 불사가 된다고 하였거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석간수 한잔으로 목마름을 대신하고 앞마당에 중생의 발자국만 남기고 이곳을 떠난다.

 

 

 

                      <날씨가 좋았다면 천왕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상무주암>

 

-11:55 신선이 살 것 같은 암자 상무주암에서

상무주란 부처님도 발을 붙이지 못하고 머무름이 없는 자리라는 뜻으로 신선이 살 것 같은 암자이다. 지리산 영원사의 末寺(말사)로써 해발 1200m의 상무주암은 고려시대 보조국사가 창건한 절로써 문수암에서 30여분이 소요된다. 지난여름 이곳 앞마당에서 지리의 장엄한 산줄기를 바라보며 발길을 돌릴 수 없던 기억이 새로워 다시 그곳에 들어서 보는데, 이윽고 노 스님이 나오면서 하시는 말씀이 눈을 밟지 말란다. 스님 오랜만에 내리는 눈이 반가워서 그러십니까? 하고 물어봤으나 별로 대꾸를 하지 않으신다. 혹시 몰라 이곳에 문수암의 도봉스님이 마실 오시지 않으셨는지요 하고 물었으나 자꾸 귀찮아하시는 느낌이 들어 더 이상 질문을 하지 못하고 상무주암을 나오면서 지척에 계시는 스님들끼리는 서로 왕래는 하지 않으신지……

 

 

 

 

 

                                  <영원사의 눈 내리는 풍경>

 

-12:40 눈내리는 풍경 영원사에서

삼정산을 거치지 않고 그냥 나오기가 아쉬워 삼정산에 올랐다. 사방팔방 방향감각을 찾을 수 없어 나침반을 새워두고 정북의 위치를 확인한 우리는 눈 내리는 천왕만 응시한 채 내려온다. 이윽고 빗기재에서부터 영원사까지는 내리막이니 더욱더 미끄러워 조심조심하면서 영원사에 다 달았다. 신라 때 영원대사가 창건한 절로 조선시대는 수행 처로써 이름난 고승 109명이 安居(안거)하였다고 한다. 영원사에 대한 창건의 일화를 초생달님에게 전해 들으며 눈 내리는 영원사의 풍경에 빠져 든다.

 

 

 

                                                 <도솔암 가는 길에서>

 

 

 

                                  <도솔암과 그의 부속건물>

 

-13:40 도솔암에서.

마지막 7번째 암자 도솔암을 찾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작년에 어렵게 찾은 기억을 되살려 가는 길은 주변의 잡목들과 산죽들이 잘 정돈되어있어 암자 길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어 좋았다. 사실 그때는 도솔암을 찾고 싶어 간 게 아니었다. 길을 잃어 헤 메다가 우연찮게 암자를 발견한 나는 도솔암 인지도 모르고 지나쳤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그 자리에 다시 섰다. 아! 이런 곳에 암자가 있었구나. 주위의 소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여있고 생각보다 넓은 앞마당이 특이한 청정 수행 처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어느 산행 기를 통해서 알고 있었지만 이곳의 천왕 방향의 전망이 오늘의 도솔암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차마 이곳에서도 쉽게 발을 내딛지 못함은 눈을 밟으면 나는 뽀드득 소리가 精進(정진) 중이신 스님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하여 슬며시 자리를 비켜선다.

 

 

 

                                     <영원능선암봉에서>

 

-14:20 영원능선에 올라서다 (1375 암봉)

지금까지 산행이 널널 산행이었다면 이제부터는 고행이 시작되는 산행이 이어지리라 생각해본다. 영원능선으로 따라 붙기 위해 위쪽사면을 치고 오른다. 잡목과 산죽에는 어느새 하얀 눈이 쌓여 우리의 장애가 되고 있으며 몇 번이고 넘어지고 일어나는 과정에서 결국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꼬리뼈에 충격을 당한 나는 한참 동안은 몽롱한 상태였다. 허전한 왼쪽손목에 고도시계는 오 간데없고 (다행이 줄이 떨어져있는 상태로 눈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어렵사리 영원능선에 올랐을 때는 사면을 볼 수 없는 시야 속에서 삼각점으로 가야 할까 왕운능선으로 가야 할까 망설여 본다.

 

 

 

                   <날머리인 와운골의 지계곡과 뱀사골의 눈오는 전경> 

 

 

-15:00 사거리 안부에서(1275).

휘 날리는 눈 속에서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와운능선을 택하기로 하고 40여분 동안을 북동쪽으로 향하였다. 사거리 안부에 도착하여 좌측 계곡이 와운골의 지 계곡임을 직감적으로 판단하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가끔씩 보이는 퇴색된 표식 기의 사랑합니다의 반가움이 우리를 반긴다. 눈으로 덮여 지 계곡의 모습은 찾을 수 없는 길이 되어버렸고 다만 고로쇠 호스를 따라 마냥 내려간다. 800고지에 내려서면서부터 줄어든 눈의 량 때문에 확실히 등로를 구별할 수 있었다.

 

 

 

           <약수암 경내의 모습과 통일신라 후기 대표적인 작품인 철제여래좌상: 보물 41호>

 

-산행을 마치면서.

지리산의 수 많은 암자가 대부분 빼어난 절경을 끼고 있듯이 오늘 순례한 7암자 역시도 모두 지리산 천왕을 우러러 보고 있었으며 7암자 모두가 우리 산 객들에게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는 공통점이다. 오늘 쉽게 산행을 마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우리는 기상대의 오보로 인하여 뜻하지 않은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미끄러짐과 넘어지는 과정을 무시하더라도 분명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추억의 겨울 지리산행이 되었다. 주머니 속의 핸폰을 꺼내 들고 문자 메세지를 확인한다. 한겨울에도 좀처럼 내리지 않은 여수에도 상당한 눈이 내린 모양이다. 공장장님의 성탄 메시지를 비롯하여, 카페의 방장님 등등. 아빠, 언제 오세요. 오늘 무슨 날인지 알지?아~ 크리스마스 이브……

 

                        <실상사 보광전 앞뜰의 3층 석탑>

 

<에필로그>

서두에서 말했듯이 나는 불자도 아니다. 또한 정치가도 아니며 다만,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는 샐러리맨일 뿐이다. 한동안 관습헌법으로 어지럽던 세상이 이제는 국보법 폐지며 과거사 법이며 우리에게 관심 밖이던 4대 법안이 또다시 신문지상의 메뉴거리로 나선다. 과연 그들에게 4대 법안만 있고 민생은 없는가를 묻고 싶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깨우침이 있었으며 하는 바램으로 이만 산행 기를 마친다.    

  

     -코스별 시간.

-08:00 산행 시작 (실상사에서)

-09:05 약수암.

-09:35 도마마을

-10:20 삼거리 (좌: 문수암/우: 삼불사).

-10:50 삼불사.

-11:20 문수암.

-11:55 상무주암.

-12:25 빗기재.

-12:40 영원사.

-13:40 도솔암.

-14:40 음정부락.                              

                                                 

                                                 2004 . 12 . 28.

  

                                                

                                                       전    치    옥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