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 12월 18일

누가 : 홀로

어디서 : 지리산 중산리-천왕봉-세석-거림

얼마나 : 7시간 45분

 

05:30 중산리매표소

07:15 로타리대피소

08:00 개선문

08:35 천왕봉

09:25 장터목대피소, 식사

11:20 세석대피소

13:15 거림매표소

 

冬至는 일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이지만 마지막 절정이기도 하다.

동지 다음날부터 밤은 짧아지고 낮은 길어진다.

저 하늘의 달이 꽉 찬 보름달이 된 순간부터 일그러지듯이

陰의 절정에서 陽은 태어나 또 하나의 순환을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동지가 한 해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

동지가 되기 전 묵은 것을 보내고 새로운 것을 맞이하기 위한

송년산행을 지리산에서 하기로 했다.

  

02시 30분에 일어나 산행준비를 하고 03시에 차를 몰아 지리산으로 향했다.

부산에서 김해 거쳐 진주로 가는 고속도로는 평소 지체가 심한 구간인데

새벽인지라 짐 실은 화물차들만 간혹 보일 뿐 다니는 차들이 거의 없다.

빨리 달릴 필요도 없으니 천천히 차를 몰았다.

 

중산리에 도착하니 05시, 차 밖에 나와 보니 생각보다 춥지 않다.

차 안에서 빵으로 간단히 요기하고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 빼먹는다.

몸을 풀고 중산리매표소에 이름과 주소 적은 다음 05시 30분에 산으로 올라간다.

일출은 대략 07시 30분, 천왕봉까지 3시간 정도 걸리니

천왕봉 일출 보기는 어렵고 법계사 근처에서 해를 맞게 될 것 같다.

 

헤드랜턴을 켜고 계곡을 따라 올라간다.

어둠 속의 투박한 바위길이라 넘어지지나 않을까 조심해서 걷는다.

30분 정도 걸으니 갑자기 호흡이 힘들고 머리가 어지럽다.

아침으로 먹은 빵이 체한 것 같다.

체한 것이 빨리 내려가라고 비상약으로 가지고 다니는 소화제 두 알 먹었다.

 

지리산 밤하늘의 별을 찍어 볼까하고 삼각대를 준비하여 왔으나

구름이 많은지 별이 보이지 않는다.

별이 보인다 하더라도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 길에서는 사진 찍기가 힘들다.

전망이 탁 트인 곳에서 별이 총총히 빛나면 좋겠건만 후일을 기약해야겠다.

 

날씨가 너무 따뜻하다.

방풍 재킷을 입고 올라가다 더워서 벗어버리고 티셔츠 하나만 입고 걷는다.

12월의 지리산이 이래도 되는 것인가?

칼바람이 불어 귀가 떨어져 나갈 만큼 춥고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이어야 제대로 된 것 아닌가?

지리산의 겨울다운 본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장터목 갈림길까지는 혼자서 걸었다.

본격적인 능선 오르막이 시작되자 사람들 소리가 들린다.

앞에 가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낸다.

머리까지 올라오는 배낭을 짊어지고 뱀사골까지 간다는 젊은 친구들이 몇 명 있고,

삼사십 명이 단체로 온 팀들도 있다.

망바위에 단체 산행팀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날이 서서히 밝아온다. 6시 30분 정도 되니 랜턴 없어도 걷기에는 지장 없다.

 

해발 1400미터의 법계사(法界寺)에 왔다.

아마 법계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중의 하나일 것이다.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있어 일출 보기도 힘들겠다.

쉬지 않고 바로 통과했다. 경사가 가파른 길이 이어지고 호흡을 고르는 간격이 짧아진다.

개선문(凱旋門) 이정표의 해발 1700미터라는 숫자가 무척 반갑다.

이제는 1915미터의 천왕봉이 머지않다.

 

개선문에서 조금 올라가니 천왕샘이다.

이 높은 지대에 겨울철 갈수기임에도 불구하고 물이 제법 고여 있다.

천왕봉으로 가는 마지막 된비알을 올랐다.

한국인의 기상이 발원된다는 천왕봉 정상이다.

역시 바람이 세차게 분다.

오늘은 구름이 많이 끼어 조망이 좋지 않다.

모든 것이 희미하다.

 

오늘도 아무도 없다.

내가 천왕봉에 오를 때 마다 정상에 아무도 없었다.

바람 많고 사람 많은 지리산 천왕봉을 온전히 홀로 즐길 수 있음은 나의 기쁨이었고,

이 기쁨을 가까운 사람들과 더불어 나누지 못했음은 나의 외로움이었다.

다음에는 가족과 같이 여기에 서고 싶다.

 

정상에서 내려간다. 통천문(通天門)을 지나간다.

하늘로 통하는 문이라, 산과 자연의 이름에는

역시 과장이 어느 정도 있어야 낭만적이고 멋이 있다. 바위의 자연 형상과

이름의 낭만적 이미지를 잘 나타도록 통천문 사진을 이리저리 찍어본다.

사진실력이 시원찮으니 제대로 나온 것이 없다.

 

해가 갈수록 황량한 제석봉의 고사목들은 점점 없어져가는 것 같다.

고사목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9시 25분에 장터목에 왔다. 4시간 산행하니 배가 출출하다.

대피소에서 야채 비빔밥과 캔 커피 하나를 사먹었다.

비빔밥은 더운 물을 붓고 10분을 기다리면 비빔밥이 된다.

취사장 안에는 라면을 끊이거나 밥을 짓는 사람들이 많다.

동행한 사람들이 있다면 나도 당연히 저렇게 하겠지만

혼자일 때는 빵, 컵라면으로 대충 먹는다.

 

장터목에서 세석까지 길, 煙霞仙境이라 불린다.

1시간 조금 더 걸리는 산길이지만 내가 아끼고 아끼는 길이다.

시원한 전망이 펼쳐지고 기묘한 바위들과 갖가지 초목들이 서로 뒤엉켜 조화를 이룬다.

이 길에 눈이라도 쌓여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연하선경의 雪景, 상상만 해도 가슴 설렌다.

촛대봉에서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멀리 제석봉과 천왕봉은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세석대피소에 입산통제기간이 끝나고 첫 휴일이라 전국에서 몰려온 산꾼들이 제법 많다.

여기서 노고단까지 바로 가고 싶다. 당초 계획은 1박 2일의 일정으로 중산리에서 시작하여

벽소령에서 1박을 하고 화엄사까지 종주하려고 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19일에 종친회가 열린다는 연락을 받아 할 수 없이

중산리, 세석, 거림의 당일치기 산행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이렇게 된 것은 아마 가까운 시일 내에 한 번 더 찾아오라는 뜻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은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거림쪽으로 향했다.

 

세석대피소에서 조금 내려가면

왼쪽의 거림, 오른쪽의 의신 방향 길로 나누어진다.

쌍계사부터 세석까지 남부능선은 다음 산행 때 걸을 것이다.

거림 가는 길은 계곡을 따라 울창한 나무 사이로 나있다.

길은 뚜렷하지만 주능선에 비하면 사람들이 많지 않아 호젓하다.

 

오늘의 거림계곡은 수량이 풍부하여 물소리가 크게 들린다.

계곡이 깨끗한 것이 사람 때가 많이 묻지 않았다.

길 양편으로 푸른 산죽의 바다이다.

햇빛이 산죽의 표면에 반사되어 반짝인다.

산죽 바다의 은빛 비늘 같다.

날이 추워지고 난 후에 송백의 지조를 안다고 했는데

산죽의 지조(?) 또한 보통이 아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올라오는 홀로 산객이 세석까지 얼마나 걸리냐고 묻는다.

2km 더 가야 되니까 1시간 이상 열심히(?) 가라고 했다.

조금 더 내려가니 길가에 샘이 있다.

약간 지저분해 보이지만 물맛은 그런대로 괜찮다.

중간에 흙길 위에 돌을 깔아 토사 유실을 방지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계곡을 건너는 다리들이 몇 개 있다.

다리 중 하나가 이름이 북해도교이다.

지리산에 북해도라?  순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집에 와서 지도를 보니 북해도라는 지명이 있다.

저 아래 거림마을에서 여기까지는 겨울철에도 추위를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따뜻한 무풍지대인데 여기만 들어서면 본격적으로 추위가 느껴지고

눈도 이곳에서는 유독 녹지 않고 남아 있어서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거림매표소에 도착하니 13시 15분, 7시간 45분 산행이었다.

천왕봉 오름길에 속이 안 좋아서 고생했지만 대체로 만족스런 산행이었다.

날씨가 춥고 눈이 쌓인 심설산행이었더라면 더할 나위가 없었겠지만.

 

산에 올라가려고 매표소 앞에 서있는 父子의 모습이 다정해보인다.

표를 파는 공단직원이 점심 먹으러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버스 정류장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시외버스를 기다리려니 차라리 포장도로를 걷는다.

걷다보면 버스나 지나가는 승용차가 있겠지.

 

30분 정도 걷다보니 오는 차가 있어 얻어 타고 큰길까지 나와서

다시 택시타고 중산리로 차를 회수하러 갔다.

오는 길에 덕산농협에 들려 곶감 한 박스를 샀다. 곶감은 덕산의 명물이다.

매년 집사람과 아들에게 사주는 연말 선물이다.

 

이리하여 올해의 산행이 끝났다.

산길을 걸으며 떠오르는 좋았던 일, 그렇지 않았던 일, 모두 떠나보내고

내년에는 보다 밝고 좋은 생각들로 송년 산행 할 수 있기를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