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동(冬)종주 (4/4)

여행지 : 지리산, 천왕일출, 법계사, 중산리코스


새벽 5시 전인데도 장터목산장은 부산하더군요. 일출시간이 7시30분이라는 설명을 듣고, 천왕봉까지 가는 시간(1시간30분)과 여유시간을 남겨놓은 5시 40분 정도에 천왕봉으로 출발했읍죠. 다른 일행들도 3대가 적선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일출’을 향해 서둘러 짐을 꾸리는 모습이더군요.
천왕봉에 오르길 십수번. 하지만 일출을 목적으로 이렇게 일찍 출발하기는 처음인지라 그 기대가 사뭇 다르더라구여. "과연 오늘 일출을 볼 수 있을런지... 이 많은 일행들 중 설마 적선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랴?"하고 위로해보지만 어제의 잔뜩 찌푸린 날씨 탓인지 여전히 불안하긴 마찬가지데요.

어둠을 헤치고 달빛과 손전등을 의지하며 희미한 눈길을 살며시 걸어갔었죠. 이렇게 장터목산장을 조금 벗어났을 무렵, 고사목 지대가 나타나데요. 인간의 방화로 훼손된 수많은 고사목의 가지가 한밤의 어둠과 요란한 바람소리에 더욱 을씨년스럽게 느껴집디다. 마치 인간들의 무례함에 자연이 대신 절규하는 듯한 기분이데요.

이미 우리보다 일찍 출발한 사람이 있기에 길을 가기는 수월했지만, 첫 산길을 지나간 사람은 쌓인 눈에 고생 꽤나 했을 법 하더군요. 눈길을 조심스레 쫓아가는데 산아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진주, 구레, 하동을 밝히는 도시의 불빛들이 안개 속 섬처럼 드문드문 떠있더군요.
한걸음한걸음 옮길 때마다 동쪽 하늘은 점점 검붉은 빛으로 물들어갔었죠.

한 시간 정도 걸었을까... 통천문을 지나 드디어 지리산 정상(1915m)에 도착했었죠. 천왕봉임을 알리는 지표석이 거친 바람 속에 꼿꼿이 서서 우리를 반겨주더군요.
여기저기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칼바람(정말이지 이 말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의 날카로운 추위 속에서 일출을 기다렸읍죠. 정말이지, 코와 귀는 떨어져나갈 듯 하고 눈에 젖은 발가락은 아무 감각도 없으며, 얼어붙은 손가락은 카메라 셔터를 눌리기도 힘들 정도로 춥더구먼요.

천왕일출

그런 고행 속에서의 20분. 드디어 해가 떠오르더라구요.
멀리 지평선을 검붉게 갈라놓으며, 시커먼 그을음이 일기 시작하데요. 검은 그을음 밑으로 용암 같은 붉은 선혈이 끓어 넘치는 듯 하더니 어느새 새빨간 ‘천공’이 고개를 내밀더라구요.
‘지리산10경’ 중 으뜸이라는 ‘천왕일출(제1경)’, 그 장엄한 감동이란... 입이 얼어서 그렇지 애국가라도 한판 불러야할 것 같이 가슴이 벅차더군요. 모두들 숨을 죽이고 자신만의 소망으로 붉은 해를 맞이했읍죠.

천왕봉에서 본 주능선(촛대봉, 반야봉, 노고단)날이 점점 밝아오면서 점점 발아래 펼쳐진 지리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디다.
하얀 허물이 아직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눈뱀(?)의 등처럼 우리가 지나쳐온 지리산의 종주 능선길이 구불구불 이어지더군요. 내가 있는 천왕봉을 기점으로 촛대봉, 삼각고지, 토끼봉, 반야봉, 노고단까지... 굽이굽이 땀방울을 흘리며 걸어온 산에서의 삼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더군요.
거기다 지리산 주변으로 아직 걷히지 않은 새벽구름으로 겹겹이 둘러쳐져 있었거든요. 마치 부드러운 솜털로 살포시 지리산을 껴안고 있는 모습이랄까. 그 솜털 위로 조그맣게 삐져나온 경남의 여타 산들도 꽤 운치 있더군요.

하산길과연 지리산은 지리산이구나! 하는 생각뿐이었지요. 그러나... 살을 에는 듯한 추위는 여전합디다. 이대로 조금만 더 있다간 천왕봉에서 동사할 것 같았기에 아쉬움을 달래며 발길을 돌렸읍죠.
눈길이 위험할 것 같아 초행길인 대원사 코스를 피해 천왕샘, 법계사를 지나 중산리코스로 방향을 잡았죠. 지리산을 온다면 대부분 거쳐가게 되는 기본 코스, 최초의 베이스캠프이자 언제까지나 포근하게 우리를 맞이할 것 같은 로타리산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죠.

그런데 ‘칼바위아지트’, ‘순두류아지트’라 적힌, ‘공비루트’를 인용해 만든 듯 보이는 표지판이 눈에 띄더군요.
빨치산 없는 순수한 지리산은 없단 말인지... 물론 빨치산(이현상의 남부군)과 연계한 역사 탐방로의 성격도 중요하지만 기존의 이정표도 있는데 그 옆에다 다시 이런 식의 이정표를 세운다는 게 조금 요란스레 느껴지더군요. 순수등반객인 내가 갑자기 빨치산 연락책이라도 된 듯한 느낌입디다.

10시30분 후들거리는 다리, 아파오는 무릎으로 칼바위에 도착했읍죠. 서슬퍼른 칼바위에 얽힌 이성계 할아버지의 전설보다 이젠 하산길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이정표로서의 반가움이 더하데요.
하산길의 미련 때문인가... 지리산과의 멀어지는 발걸음이 아쉬워서인지 몇 번의 엉덩방아를 찧은 후에야 중산리 매표소에 도착했읍죠.

지리산에 대한 예의(?)잠깐!
어찌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어제 주린 주(酒)의 미련도 남으려니와 으레 산을 내려갈 때면 파전에 막걸리라도 한잔 걸쳐야 하는 게 산에 대한 '당연한' 예의 아닙니까? 중산리 매표소 근처의 식당에서 반주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막걸리로 마지막 회포를 풀었읍죠. 물론 버스에서는 모두 기절한 상태로 부산에 왔읍죠.



두 친구와 함께했던 3박4일간의 지리산 동(冬)종주!
지리산과 하나 되어 눈과 땀 속에서 허우적거린 이번 종주에서는 처음 올라본 반야봉의 시원한 땀맛과 가슴 벅찬 느낌으로 다가왔던 천왕봉에서의 일출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지리산을 오를 때의 꾸준함과 천왕일출을 맞이할 때의 겸손함으로 내일의 ‘지리산’을 준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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