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동(冬)종주 (3/4)

여행지 : 벽소령, 칠선봉, 세석고원, 촛대봉


지리산 공비토벌 루트 안내도어제에 비해 조금은 맑아진 하늘사이로 해가 떠오르더군요.
아침을 차려먹고 산행을 시작하려다 보니 산장 앞에 세워진 ‘지리산 공비토벌 루트 안내도’가 보이데요.
60년대 군사작전을 위해 만들었다는 벽소령의 Z자 도로의 강한 흔적만큼이나 빨치산과의 전투가 치열했던 곳(대성골)이죠. 옛날에 읽은 ‘태백산맥’에서 무섭도록 차분하고, 강열한 투사로 기억되고 있는 이현상이 죽은 곳과 남부군 잔당이 섬멸된 곳도 표시되어 있더군요.
겹겹이 둘러쳐진 지리산의 주름마다 이념의 아픈 흔적이 깊이 남아있는 듯 하여 조금 씁쓸하데요. 무엇을 위해 싸웠으며, 누구를 위해 죽었는가... 말없는 지리산의 아침 태양만 우리의 현실을 내려보는 듯 합디다.

선선한 아침기운을 맞으며 오늘의 일정을 시작했었죠.
마지막으로 지리산을 종주한지가 5년 정도는 지난 듯한데, 능선길 중간에서 문득 옛 종주 때의 기억들이 떠오르더군요. 커다란 바위들을 지나 야트막한 언덕, 그리고 가시나무길을 헤치며 갔던 S자형 대숲길... 기억이 떠오르는 장소를 지나칠 때면 마치 이상한 나라를 탈출해 집으로 돌아오는 엘리스만큼이나 반갑게 느껴집디다.

칠선봉 앞에서오전의 화창한 하늘과는 달리 오후가 되면서 일기 시작한 구름들로 능선길을 뒤덥더군요.
비록 날씨가 흐려 기암의 전체적인 모습은 잘 볼 수 없었지만 그 힘만은 여전하더군요. 음침하게 들어찬 구름사이로 당당하게 호령하고 선 칠선봉을 지나, 깎아지는 듯 날카로운 바위봉들 틈사이로 뻗은 샛길을 교모하게 빠져나가면서 마치 성난 황소 등짝에라도 올라탄 듯이 들쑥날쑥 봉우리를 넘었읍죠.

이렇게 벽소령을 출발하여 두 시간 삼십분 정도 지났을 쯤, 영신봉이 눈앞에 보이는가 싶더니 세석고원의 광활한 분지가 펼쳐지데요.
'세석철쭉(제6경)'의 붉은 기운은 아니지만 새하얀 눈을 맞은 눈쭉(?)들이 작은 벚꽃들 마냥 화사하게 펼쳐지더라구요. 더군다나 구름에 쌓인 세석산장의 모습과 어우러지면서 꿈속 같은 평온함까지 느껴지게 되더군요.

우리는 갑자기 굵어진 눈발과 뚝 떨어진 기온을 피해 세석산장에서 라면으로 간단히 요기를 했읍죠. 어제의 조금 빠듯한 일정 탓에 오늘은 시간적 여유가 많았거든요. 조금 쉬엄쉬엄 가기로 하며 여분의 버너로 손발을 녹였읍죠.
1시10분, 근데 정말 춥더군요. 가만히 앉아있으려니 몸이 더 얼어붙는 듯 하여 도저히 못참겠데요. 다시 걷기로 했읍죠.

눈길 속에서...구름 속을 지키고 선 촛대봉, 삼신봉, 연하봉을 차례차례 넘으며 발길을 옮겼지요.
그렇게 눈보라 속을 헤치며 2시간여, 고사목이 우리를 환영하는가 싶더니 곧 장터목산장(1인 5000원)이 나오더군요. 내일의 일출을 보기위해 천왕봉과 제일 가까운 이곳에 여장을 풀었지만 시간이 너무 이르더군요... 오후세시!
무료한 나머지 안테나를 돌려가며 핸드폰을 켜 보지만 그마져도 불통... 날이 추워 밖에 나갈 엄두는 못 내겠고... 모두 남은 간식만 먹으며 잡담을 나누며 빈둥빈둥(?) 휴식을 취했읍죠.

모두들 피곤한 몸인 탓에 저녁을 산장에서 구입한 초코파이(3000원)로 대신하려다 준비한 음식도 남은 상황에서 조금 귀찮다고 저녁을 건너뛴다는 건 ‘여행’의 진미를 스스로 놓쳐버리는 듯해서 억지로라도 밥을 해먹었읍죠.
국에다 장조림 캔으로 밥을 먹는데 주변 여기저기에선 서로 둘러앉아 술잔을 주고받고 있더라구요. 이런... 술도 고프고, 배도 아프고... 첫날 노고단에서 너무 많이 마셨던 게 조금 아쉽더군요. ^^
반주는 없었지만... 어쨌든 밥이라도 먹으니 속은 든든하더구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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