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동(冬)종주 (2/4)

여행지 : 노고단, 반야봉, 삼도봉, 토끼봉


굳게 닫힌 노고단9시30분, 산장을 출발하여 노고단으로 향했죠. 하지만 아직 복원중인 노고단 정상부(1507m)는 예약을 통해 개방(5월1일~10월31일)되기에 눈과 마음으로만 다가설 뿐 직접 오르는 것은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죠.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코앞의 편리만 바라보는 우리 인간들의 만용(성삼재가 뚫리면서 급속하게 훼손된 노고단이죠) 앞에 상처 입은 민둥산. 그 노고단의 굳게 닫힌 입구만큼이나 보는 사람의 마음도 얼어붙게 하더라구요.
은빛 눈가루가 곱게 휘날리는 ‘침묵하는’ 노고단에서부터 본격적인 지리산 종주길에 올랐죠.

평탄하게 이어진 눈 쌓인 능선길을 타고 갔읍죠. 그러다 전 느린 걸음 때문에 일행과 떨어져 혼자 걷게 되었는데 오히려 그런 호젓함이 더 멋스럽게 다가오더군요.
‘토토로’가 되어 수풀로 이뤄진 터널을 통과하는 듯한 느낌의 여름 종주길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데요. 모든 잡생각 버리고 뽀드득뽀드득 발끝의 눈소리를 흘려들으며 걷는데, 하얀 백설의 선계 속, 무념무상의 ‘도인’이라도 된 듯한 여유로움이랄까, 즐거움이랄까...

병풍처럼 펼쳐진 ‘지리산 그림’

병풍처럼 펼쳐진 ‘지리산 그림’을 벗 삼아 걷다보니 어느새 임걸령 샘터(피아골로 오르내리는 등산로와 만난다)에 도착하더군요. 주변에서 사진을 찍는 고등학생들의 얘기소리처럼 재잘거리며 흘러내리는 샘물이 무지 시원합디다.

임걸령에서 목을 축이고 조금 오르면 반야봉으로 가는 갈림길(노고단에서 2시간)을 만나게 됩죠.
반야봉은 지리산 서부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이면서 '지리산10경'중의 하나로도 꼽히는 '반야낙조(제3경)'가 유명한 봉우립지요. 하지만 종주길에서 한발 물러나 있기에 늘 지나쳐왔던 봉우리였거든요. 이번만큼은 처음부터 단단히 벼루고 왔던 곳이라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반야봉으로 길을 잡았지요.

반야봉 정상지리산 서부의 툭하니 불거져 나온 반야봉이니만큼 그 경사도 제법 가파르더라구요. 아이젠을 의지하며 얼음길과 물고 물리며 오르길 50여분, 자그마한 표지석 하나가 거센 칼바람 속에서 반야봉 정상(1732m)임을 알리고 있더군요.
오른쪽(서쪽)으로는 우리가 지나왔던 노고단이 보이고, 왼쪽(동쪽)으로는 천왕봉의 모습이 구름 속에서 가물거리데요. 흐린 날씨였지만 지리산의 모습을 살펴보는데 이만한 명당이 또 어디 있을까 싶더군요.

삼도봉 기념물반야봉에서 내려와 닿은 곳은 세 도를 한걸음에 둘러볼 수 있는 축지봉(?), 삼도봉입죠.
경상남도, 전라남도, 전라북도의 3개의 도가 경계를 맞대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봉우리 정상부에는 삼각뿔 모양의 기념물이 서있더군요. 이 기념물처럼 삼도의 사람들 마음이 하나의 꼭짓점으로 잘 모아졌으면 하는 바램이네요...

삼도봉에서 간단히 요기를 마치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등산로 경사면을 따라 이어진 수많은 인조물(?)들이 보이더군요.
등산객들의 발길에 파헤쳐지는 등산로를 더 이상 두고볼 수 없었던지 등산로 곳곳이 나무계단으로 말쑥하게 복원되어 있데요. 나무뿌리를 드려낸 체 깊이 파여 버린 등산로를 생각하면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지만은 한편으로 옛날과 같이 흙길을 걸을 수 없다는 생각에 아쉬운 생각도 들더라구요.

삼도봉에서 바라본 토끼봉흐려진 날씨 속을 뚫고 ‘꾸역꾸역(?)’ 걸어 이번엔 토끼봉에 올랐읍죠.
토끼가 많아서 토끼봉일까? 알 수는 없지만(반야봉의 정동-묘방(卯方) 위치에 있어서 그렇다네요), 나뭇잎들은 모두 자연으로 돌려보내고 최소한의 가지와 뿌리만으로 겨울을 나고 있는 철쭉들이 우리를 반깁디다. 구름 속에서 흩날리는 진눈깨비만 토끼머리의 철쭉을 쓰다듬는 듯하더군요.
올랐다, 내렸다하며 아침부터 줄곧 걸어가는 능선길인지라 마음의 즐거움에 비해 몸은 점점 지쳐가데요. 더군다나 오후 들어 더욱 흐려진 날씨와 굵어진 눈발은 우리들의 발을 더 무겁게 누르더라구요.

오후 4시, 그렇게 ‘헉헉’거리고 있을 무렵 연하천산장이 보이더군요. 진눈깨비 속의 외소한 산장(1인 3000원)이지만 우리에겐 에덴동산의 별장처럼 천군만마의 느낌으로 다가오데요. 더군다나 따뜻한 커피(1000원)와 함께 부셔먹는 생라면의 그 찡한 맛(!)이란...
약간의 휴식으로 ‘몸’을 충전시키고 다시 출발! 고개를 넘고, 넘고, 넘고...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한 6시쯤에서야 오늘 숙박지인 벽소령산장(1인 5000원)에 도착하게 되었죠.
다들 피곤한 몸이었지만, 우짭니까. 먹어야지요... 달빛(벽소명월(제5경))을 벗 삼아 밥을 먹으며 함께 준비해간 삼계탕으로 얼마 안남은 ‘최후의 술잔’(천왕봉에서 먹자 약속했던)을 비워버렸죠.
든든한 배를 어루만지며 소등시간(9시) 이전에 모두 골아 떨어졌읍죠... 쿨... 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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