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통편                  

서울   출발 ; 1/8 (토) 청량리 역 23:30  à 1/9 (일)  희방사 역 02:30    /   구인사 출발 ; 1/9 (일) 구인사발 버스 15:50 à 1/9 (일) 동서울 터미널 19:00

2. 산행인 ; 오름이,막야

3. 산행 ; 03:30 죽령 입산 à 15:00 덕평마을 (구인사) / 산행거리 ; 약 30 km                       

죽령 à 제2연화봉 à 연화봉 천체관측소 à 제1연화봉  à 대피소 à 비로봉 à 국망봉 à 상월봉 à 늦은맥이재 à 신선봉 à 민봉 à 덕평마을 (차) à구인사

 

 

내게 있어서 겨울산행의 얘기 꺼리는,

 

눈이 펑펑 내리던 지난해1월, 북한산 의상능선의 용출봉에서 용혈봉에 이르는 좁은 바윗길을 잔뜩 채워 놓았던 눈더미 위에 풀썩 주저 앉아, 경사진 바위 협곡을 눈썰매 타며 내려오던 동심과, 삼각과 도봉의 눈익은 능선이 그려내던 천지가 오로지 청과 백의 두 색으로만 구분 짓던 스카이 라인으로 어우러지며, 산 국을 뒤 덮은 순백이 지닌 순수의 은세계에 동화되던 스노우 환타지의 기억이 새록 새록 쏟아나고,

 

그 해2월 안내 산악회를 따라 나선 정선의 장구목이로부터 올라 가리왕산에서 중왕산으로 러쎌 산행시 밤사이에 내렸던 눈 무덤이 허리까지 잠기는 그 엄청난 순백의 향연에, 산 길 한 켠으로 허허로이 속을 비운 채 새파란 잎 하나하나로 하얀 눈송이를 듬뿍 담으며 천 년을 지켜 왔을 주목 나무의 처연함을 떠 올리게 된다.

 

거기에 또 한가지 덧붙여야 할 겨울 산행을, 어제(1/9) 소백산에서의 산행 역시 첨가되어야 함이 옳다.

그러나 어제의 기억은 예전의 겨울 산행이 주던 그런 로맨티시즘과는 확연히 달랐다.
혹독했다.

 

그건 산행을 하고 나서,  아니 산행을 겪고 나서 적어도 겨울 고산에서의 종주산행은 낭만 외에 자칫하면 잊을 수 있는 근원적인 차원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안됨을 일깨워 주었으며 그 잔인한 칼바람을 온 몸으로 받으며 걸어 가야 하는 처절함은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자연에 대한 작은 도발이었다.

 

나, 이제 그 얘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새해에 보지 못했던 일출을 소백산 정상에서 맞이 하면서 아울러 경북 영주와 충북 단양의 맹주인 겨울 설경이 일품이라는 소백산 능선종주를 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려 오름이 아우와 나는 청량리에서 풍기로 가는 23:30 밤 열차에 몸을 싣게 된다.

 

토요일 심야이긴 하나 역사엔 적지 않은 등산객들이 부산하고 오랜만에 타본 중앙선 기차는 어둠을 좌우로 가르며 숱한 무리의 산객들을 잔뜩 담아 미지의 세계로 떠났다.

 

주기적으로 덜커덕 거리는 박자를 자장가 삼아 억지로 라도 눈을 붙여 본다마는 선 잠이 들었던 탓에 세시간 내달린 밤 기차는 중간 기착지인 단양이라는 차내의 안내 멘트에 너 나 할 것 없이 눈을 번쩍 뜨고는 다음 역인 풍기에서 하차 준비를 서둔다.

 

소백의 어둠을 가를 헤드렌턴을 배낭에 매달고 언제라도 쓸 수 있도록 라이너를 넣은 두툼한 장갑과 고소모를 배낭 어깨 걸이에 매 달면서 자켓의 손 쉬운 호주머니엔 초콜렛과 간단한 과자 몇 개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고 혹시라도 하며 등산화 끈을 다시 한번 단단히 조여 매었다.

 

산행계획은 남쪽의 희방사에서 올라 정상에서 일출을 맞이한 후 능선 종주를 하면서 북쪽에 있는 구인사로 하산키로 했다.


죽령에서 능선을 타고 고치령까지 가는 백두대간을 잇고 싶은 욕심도 있었으나 구인사 쪽이 서울 차편이 잦은 것이 코스 선택의 결정적 이유이다.

 

대략10시간 걸린다는 정보를 참고하여 가보지 않은 겨울 능선의 예기치 못한 돌발 변수와 사방으로 펼쳐질 벅찬 산 군을 가슴에 새기며 간다 해도 12시간 이면 충분할 것이라 여겼다.

 

중간 정착역이 아닌 간이역인 희방사 역에서 열차가 잠시 정차한 틈을 타, 어랍쇼! 이게 왠 횡재인가 하며 바삐 내렸다.


’풍기에서 타고 올 택시비 벌었구나’ 했다.

 

허나 이내 차장에게 발각되어 제지를 당하기는 하였지만 무대뽀로 밀고 나갔다.
’이왕 내린 거 어쩔래’하면서…

 

하루에 무궁화 열차 한 편이 정차하는, 어둠에 잠긴 희방사 역은 불마저 꺼진 채 깊은 고요에 묻혀 있다.

그건 여기서 내릴 승객이 예정에 없는 터일 게다.        

     

잠시 인기척을 느꼈는지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온 역무원은 불청객에게 별 관심이 없는 듯 이내 들어가버리고 그에게 길 동냥을 구하려는 이방인은 다소 난처해 졌다.

 

옛날 티브이 문학관에서 보았던, 정년을 앞둔 희방사 노 역무원의 애잔하고도 아름다운 얘기를 그린 흑백 화면이 불현 듯 뇌리를 지나친다.

 

역무원으로 입사하기 위해, 촌부가 인근 역 이름만을 간신이 외워 희방사 역에 근무하면서 과년한 딸을 둔 …그런 얘기가 있던 희방사 역.  

 

요즈음 티브이에서 보이질 않는 조역 단골인 그 노 배우가 처음으로 주연하였을 그가 갑자기 보고 싶어진다.   

 

역사를 나오면서 대체 길머리가 어디인지 막연하여, 하는 수 없이 핸드폰으로 흥정한 택시는 희방사 입구까지 이만원 달라한다. 

몇 걸음도 안 될 터인데, 다시 한번 무대뽀 정신으로 나갔다.                                                                                                             
‘가자! 북으로!’

그건 도상에서 희방사역이 남쪽의 들머리라는 걸 알고는 대략 콤파스의 붉은 자침이 향하는 쪽을 따랐다.

 

거기에는, 깜깜한 밤하늘이라 해도 백두대간의 주요 고봉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을 위엄에서 풍겨 나올 그 기를 온 몸으로 느끼면서 ‘길은 저기다’ 하는 감이 없질 않았던 것은 나름대로의 믿음이다.

 

허름한 둔덕 길을 걸은 지10여분도 안돼 이내 무대뽀 정신은 정확한 감 이었음 으로 판명된다.

 

차량통행이 거의 없는 죽령으로 가는 훌빈한 도로 위에서 운 좋게도 대구에서 왔다는 젊은 부부의 승용차를 히치하이킹하게 되고 그들의 처분에 힘입어 우리의 산행은 밤길이 위태롭다는 희방사를 버리고 천문관측소까지 7km나 콘크리트로 도배된 안전한 죽령을 택하게 된다.

 

차는 상당히 굽은 도로를 몇 번 씩이나 도는데 령의 좌로 때로는 우로 보이는 먼 불빛으로 보아 상당한 고도임을 알 수 있었고 죽령길이 낮엔 꽤 근사한 길이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었다.

 

옛날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영남의 선비들이 넘었다는 죽령마루에는 서 너대의 불꺼진 관광버스가 주차되어 있었고 한 무리의 산행 객을 앞서서 차가운 겨울 소백바람을 폐부 깊숙이 들이키곤  ‘나 이제 가노라’  하며 소백의 어둠 속으로 잠기었다.

 

좌우가 어딘지 모른 채 올라서는 발 아래에 놓인 불 빛이 모여 있는 쪽이 풍기인가 하며 짐작해 본다만 고도를 높일수록 더 해지는 냉기에 시야는 점점 좁아지게 되고 겨우 발아래 나마 지켜 보기에도 부담스러울 정도이다.

 

길 놓칠 염려가 없는 대신에 참으로 지겨운 콘크리트길이 산정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 무척 고역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파르게 길을 내린 희방사로 진입 해 볼 걸 하는 생각이 절로 난다.

 

두 어 시간 세멘트 길을 빠르게 오르기는 해도 겨울밤 소백산은 자신의 존재를 철없는 이방인에게 확연히 인식 시키려 하는지 매서운 추위는 사정없이 온 몸을 휘 감고 바짓 가랭이 사이로 스물스물 스며 드는 냉기에 오금이 다 저릴 정도이다.     

      

얼굴 한 번 제대로 들지 못하고 관측소에 다다른 화장실 앞에서야 겨우 배낭을 등에서 내리고 타이즈 하나를 꺼내어 입으려 한다만 옷 하나 입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배낭엔 허연 서리가 끼여 스치는 손 끝으로 엷은 얼음이 미끄러 지고 간신히 타이즈를 꺼내어 그것을 입으려 등산화와 바지를 벗고 팬티 위로 간신히 걸치긴 했으나 꽁꽁 언 손으로 바지를 추스리는 일이 왜 이리 어려운지…더욱이 등산화 끈을 단단이 묶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일 정도로 손의 기능은 정상의 반도 훨씬 못 미쳤다.

 

어거적 거리며 북새통을 떠는 나는 그렇다 손 치더라도 별 수 없이 보조를 맞추어야 하는 동행인 오름이 아우는 발가락이 시려운지 제자리에서 동동 뛰기도 하고 이리저리 빙빙 돌기를 반복한다.

 

겨우 옷 매무새를 추스리고 길을 재촉하는데 이번엔 눈 길에 미끄러지기도 수 번. 아이젠을 양 발에 채우니 한 결 낫긴 하나 그 놈의 혹독한 추위는 여전하다.

 

천문대에서 연화봉으로 오르는 탐방로 계단에서 여태 경험한 바람 중에서 가장 센 놈을 만나게 된다.           

난간을 잇는 가이드 줄이 없으면 오르는 중에 우측 계단아래로 떨어 질 것이 거의 틀림 없을 만큼 발 길 내딛는 순간마다 칠십키로의 중량이 허공에 뜨는 경험을 겪는데 하물며 날렵한 몸매의 오름이 아우는 어떨까 싶다.

 

2겹으로 낀 장갑을 파고 드는 소백의 동장군은 양 스틱을 잡을 수가 없을 정도로 손의 기능을 무력화 시켜 그나마 호주머니에 찌르고 다니긴 할 수 있으나 문제는 잔뜩 얼은 대기에 그대로 노출된 코와 입, 턱에 부딪히는 칼바람은 바늘로 쉴 새 없이 찌르는 듯한 통증으로 인해 숫제 떨어져 나갈 정도로 지독했다. 

 

수건으로 간단히 마스크를 했으나 내쉬는 가뿐 숨에 묻어 나오는 약간의 온기는 엉성한 수건 틈을 위로 비집고 나와 눈 앞의 냉기와 만나는 즉시 안경의 유리알을 뿌엿게 흐려 놓고는 이내 엷은 얼음 막으로 만들어 버린다.          

안경을 벗어 줄에 대롱대롱 매다는 수 밖에 없다.   

어차피 밤에 볼 것도 없고 고개 조차 들기 어려울 만치 바람이 몰아치는데… 

 

손으로 입을 감싸고 그러다가 손이 시리면 호주머니에 넣고 하기를 반복하는 수 외에 강풍에 그대로 노출된 안면을 보호할 방도가 달리 없다.    

                  

어둠 속에 얼핏 본 오름이 아우의 눈썹에 낀 허연 서리가 등골을 오싹하게 하고 그러고 보니 나의 자켓 목 부위에는 호기로 인한 얼음이 아예 붙어있다.

 

칼 바람이나 잠시 피할 곳이 있으면 좋겠다는 그런 기대감만으로 걸을 뿐이고 짙은 어둠 속에서 딱히 눈에 들어오는 경관은 커녕 최대한 몸을 작게 만드는 일 외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능선에 올라서자, 서서히 여명이 들어 어둠을 걷어 내고 있긴 하나 그 지독한 추위는 더 맹위를 떨치는 듯 했다.

 

비로봉 정상 직전의 대피소에 도착한 시각은 웬만큼 사방이 밝았고 이내 해 뜨기 직전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고산 일출 보다는 이 바람을 막아줄 대피소 안으로 피신하는 것 외에 아무런 생각도 없다.

 

대피소 안엔 어디서 갑자기 그렇게 많은 등산객들이 왔는지 꽉 차 있었고 버나로 불을 피워 라면을 끓이고 손을 녹이는 사람들 틈에 끼여 보온병의 따뜻한 물로 아침 요기를 했다.

 

대피소 벽면에는 ‘취사시 50 만원 과태료 부과’라고 관리공단에서 써 붙여 놓았지만 아무도 관심없다. 

산불조심이 너무 강조 되다 보니까 겨울 산행하면서도 비상용 라이터도 하나 없이 무모하게 등산하다가 길을 잃어 동사하는 사고가 간간이 일어 나곤 하는데 안타까운 일이다.                                                        

비상시엔 잔가지를 꺽어서 라도 불을 피우는 것이 얼어 죽는 것 보다 못하다고 누가 감히 말 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그로 인한 책임이 따르긴 해도.

 

대략 1시간 가량 대피소 안에 있었는데 바람만 막아 줄 뿐 추위는 여전했고 움직이지 않는 탓에 이제는 발이 시려워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가던 길을 재촉하였다.

 

밖은 이미 밝아 비로봉 정상에서 왠만하면 사진 촬영이나 하려 했으나 아… 그 칼 바람은 더욱 맹위를 떨치고 탐방로 나무 계단을 내려올 때는 실로 감당키 힘든 바람을 이겨 내고자 고함을 내지르는 것이 마치 고문을 당하는 자의 비명과 달리 볼 것도 아니나 그마저 몰아치는 바람소리에 묻혀 내 귀에는 잔인하기 까지 한 바람의 흔적만이 길게 남아있을 뿐이다.

 

길 옆 철쭉가지에는 하얀 눈이 달라 붙어 마치 크리스마스 장식 트리 처럼 철쭉밭에 핀 상고대가 구릉 위로 가득했고 잠시 돌아본 사방은 원근 감이 어울러진 산들이 중첩되어 대단한 장관을 연출하는 곳에서야 더 이상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되겠기에 수동 카메라를 들이댔다.

 

해가 뜨자 양지 바른 곳은 추위가 한결 덜한 것이 다행이고 느낌으로 몇 걸음 거리에도 무려 20 여도 정도의 차이가 아닐 까 싶다.

 

서울이 금년 들어 가장 추운 영하 11도 였다고 하니 소백산 능선 위 칼바람에 꼼짝없이 당한 새벽 녁에… 글쎄 영하30 도 이하는 더 된다. 

그건 25년 전 겨울 동부전선에서 겪은 경험을 비추어 볼 때 그렇다는 거다.   

 

아무튼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추위에 떨기는 처음이다.  

 

그렇게 맹위를 떨치던 혹한도 고도를 높힌 태양 빛에 의해 차츰 흡수되어 내게 익숙하고 만만한 겨울로 되 돌아 가는 것이 반가워 그제사 몸의 생기는 되 살아나고 자연이 빚은 능선의 설경과 온 사방으로 펼쳐지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산 군들의 장관들이 슬금슬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마의태자의 이야기가 있는 국망봉까지의 능선 길은 모처럼 여유가 주어져 일상의 겨울에서 볼 수 없는 앙상한 겨울나무 가지에는 눈과 바람은 상고대를 빚어 길 옆의 구릉에 지천으로 널려 있다.

 

지나온 국망봉을 지간에 둔 상월봉 아래의 늦은맥이재 길은 빠르게 경사를 내렸고 이내 직진 길인 백두대간으로 향하는 고치령과 좌측의 구인사로 떨어지는 갈림길로 접어들면서 아쉽게도 백두대간 길을 여기서 작별하고 구인사 길로 향한다.

 

신선들이 바둑을 두었다는 신선봉과 몇 개의 작은 봉우리를 힘겹게 다시 오르내리고 저 멀리 지나쳐온 능선 길의 조망이 좋은 민봉을 끝으로 소백은 이제사 내림 길을 내어준다.  

 

볕들은 민봉에서 언 김밥으로 마지막 기력을 채우고 얼어 붙은 지루한 계곡 길로 두어 시간을 내 달렸다.

 

 

 

<후기>

 

어렵사리 하산한 임도까지 10시간 남짓 산행을 하였으나 임도의 좌우 측이 내림 길이 아니라 모두 오름 길이고 더욱이 구인사 방향의 표지기 조차 없는 탓에 참으로 난감하였고  양 쪽을 두 번 이나 왕복하는 무려 1시간씩이나 허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길을 찾지 못하여 좌측 아래의 마을이려니…하고 철망을 월담하여 목장길로 내려선 것이 전혀 예기치 못한 남아 있던 마지막 낭패였다.

 

겨우 겨우 내려선 덕평마을의 외진 버스 정류소에서 다행이 구인사 방향에서 내려오는 경찰 차를 사정없이 세우니 고맙게도 4키로 떨어진 구인사까지 회차하여, 출발 직전인 오후 3시 50분발 동서울 행 버스를 탈 수 있었던 것은 이 번 산행의 마지막 행운 이었다.

 

임도를 만나는 곳에서 발 아래 보이는 마을이 아니고 우측으로 적어도 3,4 키로는 더 가야 구인사가 나온다.   

관리공단에서 반드시 방향표지기를 세워야 될 장소이다  

(있었던 것이 없어졌다면 관리부실임)

 

겨울 고산산행은 특히 야간산행시 나름대로 준비를 한다고 하였으나 해 있는 겨울 산행만의 경험으로 속 내의를 미리 입지 않고 능선에서 입었던 탓에 제대로 등산화 끈을 묶지 못하여 산행 내내 무려 5번도 더 풀리는 낭패를 당했다.       

      

그리고 바람으로부터 안면을 보호할 수 있도록 전문장비(바라클라바)가 좋겠지만 최소한으로 마스크 2개 정도는 있어야 큰 애로가 없을 것이다. 아니면 머플러라도.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해도 비상 라이터는 준비해야 할 것임. 

그래야 혹시라도 길을 잃고 날이 저물 때의 최악상황에 대한 대비가 될 것이다.

 

 

출발 전 배낭 속에 넣어 둔 물은 얼음 덩어리가 되어 되 가져왔는데 집에 도착하고 보니 물병 모양을 갖춘 얼음은 그대로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