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 2005년 1월 31일
§ 산행코스 : 삼공리매표소~백련사~향적봉~대피소~중봉~오수자굴~백련사~삼공리매표소
§ 산행시간 : 5시간 4분

11:23 삼공리 매표소 통과
11:42 신대휴게소
12:21 백련사
12:37 부도
13:40 향적봉· 대피소 갈림길
13:48 향적봉(1614미터)
14:05 향적봉 대피소(중식)
15:10 대피소 출발
15:27 중봉
15:53 오수자굴
16:36 백련사
17:32 삼공리 매표소
총 18.9킬로미터, 6시간 9분 소요(중식시간 포함)



지난해 환상적인 설경을 담아두지 못한 아쉬움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오늘은 만반의 준비를 해서 다시 덕유산을 찾았다.
지금까지 겨울에 세번을 찾았는데 그때마다 환상적인 설경을 보여주었으므로 오늘도 그런 기대를 처음부터 갖는것은 당연하였다.
 
2001년 2월 덕유산 사진...오늘도 이런 산을 기대했었다.

 

9시가 약간 넘은 조금 늦은 시각에 순천에서 출발을 했으므로 국도를 이용하려던 애초의 계획을 수정하여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가끔 이용하던 길이라 마음놓고 달리다 함양분기점과 지곡인터체인지 사이에서 발견한 두대의 패트롤카.
시커멓고 커다란 눈동자와 마주한 거리는 불과 50여미터 밖에 안되었으므로 이미 없질러진 물이라 생각하고 시선은 속도계로 향했다.
"헉! 137~8킬로미터? 그럼 6만원?"
예전에 녹동으로 2만원어치 숭어회 사러갔다가 9만원짜리 속도위반 걸린 뒤로 웬만한건 무덤덤해졌지만 그래도 기분은 썩 좋지가 않았다.

간밤에도 눈이 조금 왔고 전전날에도 눈이 내렸으므로 나뭇가지에 얼어붙은 하얀 설화를 기대했으나 고속도로에서 바라본 산들은 남덕유산 정상부를 제외하고는 별볼일 없어 보인다.
월요일이어서 그런지 조용하리만큼 한산한 무주리조트 입구를 지나 구천동 주차장으로 들자, 작년에 대설주의보 내려서 입산통제할 때 석기봉 가는길을 가르켜 주었던 그 매표관리원이 아직도 그대로 있다.
잔돈 100원이 부족하니 좀 깎아달라는 애원을 무참히 짖밟은 공원관리원을 향해 오천원짜리와 함께 가식적인 미소를 건넨 후, 돌려받은 4900원을 흔들어보이며 매표소를 통과했다.

삼공리 매표소에서 백련사까지 넓다란 길은 오늘도 역시 빙판길이었지만 다행이 간밤에 내린 눈이 빙판위를 살짝 덮고 있어서 속보를 하는데는 지장이 없었다.
33경에 속하는 명소들이 연이어진 구천동계곡은 두터운 얼음과 눈으로 덮여있어서 약간의 물소리도 들리지 않는 가운데 등산객들의 발자국소리와 맑은 새소리가 산중의 고요를 깨트리고 있다.

백련사를 지나 부도가 있는 능선에 이르자 지난해보다 더 많은 겨우살이가 참나무 가지마다 붙어 있다.
한방에서는 잎을 말려서 강장·진통제로 사용하며, 고혈압·신경통·관절통(關節痛)·태동(胎動)·태루(胎漏) 등의 증상에 사용된다고 하나 참나무한테는 웬수도 저런 웬수가 없을것이다.

 
백련사 입구

 

향적봉과 대피소 갈림길에 이를때까지도 기대하던 설경은 보이지 않고 눈의 두께도 30센티미터를 넘지 않았다.
"이럴수가...사람마다 설경하면 덕유산이 최고라고 광고를 하고 다녔는데 올 겨울엔 왜이런다냐."
산을 오르다 보면 이럴때도 있고 저럴 대도 있다는 친구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면서도 실망스러움은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는다.
"허긴, 산꾼 아닌 보통사람들이 볼땐 이만한 눈에도 입 헤~ 벌리며 좋아할테지."

마치 하늘로 향해 있는것 같은 계단으로 올라서자 비로소 민주지산을 배경으로 서있는 가늘디 가는 상고대가 순수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으메 아쉽던 마음은 서서히 환희로 바뀌어갔다.
  

향적봉 아래 계단에서 본 설경


차디찬 바람에 귓볼이 시리기도 하였지만 오늘 향적봉은 일기예보에서 체감온도 -20도라고 겁을 주던 것과는 달리 그런대로 참을만 했다. 이따금씩 구름때문에 햇볕이 가려지기도 하지만 지리산, 가야산, 운장산, 민주지산, 서대산 등 먼곳에 있는 산들까지 죄다 보일정도로 좋은 날씨다.
작년에 그토록 애를 태우던 디카도 오늘은 별로 심술 부리기가 싫은 모양이다.
 

향적봉 전상에서의 조망


우리의 점심시간은 평균 한시간 정도.
예외는 있지만 보통 사람들보다는 조금 긴 편이다.
서울서 왔다는 산님들은 대피소에서 파는 사발면을 5분도 안되서 헤치웠지만, 찌게도 끓이고 술도 한잔 하다보니 금방 한시간이 지나갔다.

대피소에서 중봉으로 가는 능선길에는 멋진 주목나무가 기다린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는 주목을 볼 때마다 군대있을 때 '살아방패 죽어충성' 이라는 부대훈이 생각나곤 했지만 '썩어서도 천년'이라는 말을 들은 후로부터는 부대훈을 잊기로 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지만 세찬 바람부는 추운 겨울에 하얀 속살을 드러내놓고 의연히 서있는 주목에 비하면 극히 미미한 존재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주목과 향적봉
 
향적봉~중봉 능선에 있는 주목에 핀 설화

 

주목과 구상나무가 철쭉과 뒤섞여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볼 만한 설화를 피우고 있는 능선에 이어 중봉의 밋밋한 봉우리가 흰눈에 덮힌채 군데군데 까만 바위를 돌출시키고 있다.
덕유평전을 지나 무룡산, 삿갓봉, 남덕유산으로 이어지는 장쾌한 능선의 유혹을 뿌리치고 오수자굴로 방향을 잡자 제법 많은 눈이 발목을 간지럽히고 경사도 조금 심해졌다.
3년 전까지만 해도 자연휴식년제구간으로 묶여 있어서 산행을 할 수가 없었으나, 2002년말 부터는 휴식년제가 해제되어 백련사~향적봉~중봉~백련사 원점회귀가 가능해졌다.

수십개의 나무계단을 내려서자 마치 거대한 고래가 입을 벌리고 있는것처럼 생긴 오수자굴이 나타났다.
오수자란 스님이 수도를 했다는 굴 내부는 수십명이 들어가 앉아도 될 만큼 넓었다.
친구는 굴의 이곳저곳을 살피는데 시간을 보내지만 나는 굴 옆에서 볼일을 보는데 시간을 보냈다.

오수자굴

 

눈덮인 계곡을 따라 하산을 하던 중 대체로 맑던 하늘이 서서히 구름에 휩싸이기 시작하더니 간간히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백련사에서 삼공리매표소까지 발길을 서둘렀지만 다리의 피로만 쌓일뿐, 오를 때 이상의 속도를 내지는 못했다.
간간히 날리던 눈발이 덕유대 야영장 입구에 이르렀을 때는 제법 많은 눈을 뿌리고 하늘은 더욱 짙은 구름으로 덮여 있었으므로, 눈이 내린다는 즐거움보다 먼 길을 가야할 불안함이 앞섰다.

덕유대 야영장 입구에 이르자 눈이 장난이 아니네

 

고속도로에만 들어서면 괜찮겠다 싶어 쉴틈도 없이 차를 몰아 눈발을 헤치고 안성인터체인지로 향하니 벌써 쌓인 눈이 장난이 아니다.
고속도로로 들어서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정작 큰일은 그 이후에 기다리고 있었다.
펄펄 쏟아지는 눈은 시계를 10여미터로 좁혀놓았고 시커먼 공간에서 갑자기 차 앞유리를 향해 내리꽂는 눈송이에 눈이 아프고 머리가 어지럽다.
육십령터널을 지나면 그래도 좀 낫겠지 싶은 생각에 잠시 희망을 품어보지만 웬걸, 눈은 더욱더 퍼부어대고 비상등을 켜고 뒤따르던 차량들은 어디서 멈춰 서버렸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아차하면 금쪽같은 두 아들을 두고 오늘로 이 세상과 하직을 해야한다 생각하니 나도모르게 핸들을 쥔 양손에 힘이 가해진다.

눈발이 약해진 것은 함양분기점을 지나고서 부터.
잠시 심신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경호강휴게소로 들어가니 사람들은 딴나라에서 온것인냥 내차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눈이 하동에서부터 다시 위세를 떨쳤지만 장수 거창에 내리던 눈에 비하면 조족지혈.
"굼벵이처럼 기어가는 차들이여! 덕유산 한번 갔다 오라."
험한 눈길을 헤치고 오느라 간댕이가 좀 부어오르긴 했어도 집앞에 이르기 전까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던 것이 덕유산에 한 번 더 다녀와야 될라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