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시작 30분전( 새벽 2시 )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등반대장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세상 모르고 자던 사람들의 잠을 깨웠다.

차 천장의 형광등도 파르르 떨며 하나 둘 잠에서 깨어났다.

 

< 아 여기가 집이었으면……>

산이 좋아 오긴 했지만 언제나 이순간 만큼은 움추려 진다.

창 밖으로 보이는 차디찬 어둠은 앞으로 다가올 몇 시간의 고통과 함께할 것이다.

<아~~ 집에서 맥주한잔 하고 아침까지 폭 잘걸>

 

등반객들은 갑자기 밝아진 차안에서 실눈을 하며 등반대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등반대장이 곳 산행을 시작할거라고 하면서 몇가지 당부를 하자, 여기저기서 똑같은 말을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한다. 모두들 부족한 잠 때문에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그 와중에도 선배는 잠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선배가 과연 무사히 산행을 할 수 있을까????>

난 다행히 무박산행에 익숙해져 흔들리는 차안에서도 충분히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지리산 종주때 잠이 부족해 급격히 떨어진 페이스를 추스리느라 고생한적이 있어 차만타면 무조건 자는 습관을 들여놨다. 장기 산행에서는 적절한 숙면이 영양가 있는 식사 보다 더 중요했다.

 

 

등반대장의 안내와 함게 이내 차가 멈춘 곳은 육십령 고개 길의 조그만 휴게소였다.

전날 저녁 식사가 부족했던 사람이 산행 전 요기를 할 수 있도록 일부러 들른 곳이다.잠도 깰 겸, 찌푸둥한 허리도 풀 겸 아직도 자고 있는 선배일행을 놔두고 차에서 내렸다. 해발 700m 지점의 육십령 새벽공기가 알싸하게 다가왔다.

자다 일어난 탓에 몸이 바짝 쪼그라 들었다.

휴게소로 들어가니 맘씨좋게 생긴 아저씨 내외가 주문을 받는다.

삼십여평 남짓한 가게 한 귀퉁이에는 직접 짠듯한 진열대가 있었고 그 위엔 언제 만들어졌을지 모를 과자들이 놓여있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누렇게 뜬 회벽으로 휴게소의 이력을 알수 있었다. 등반객들은 제각각 널려있는 식탁에 나눠 앉아 옅은 불씨만 남아있는 난로를 응시했고, 주인내외는 열심히 음식을 날랐다.

식탁에는 김이 모락모락나는 구수한 된장찌개가 놓이고 있었다.

 

형 뭐좀 먹어야지~~

아직도 자고 있는 선배를 깨우기 위해 난 다시 차안으로 들어갔다. 언제 일어났는지 선배와 동료들은 집에서 이쁘게 싸온 삼각 주먹밥을 나눠 먹고 있었다.

응~` 우리는 이거 먹구 올라 갈거야. 너두 먹어라

 

<카하~~ 와이프 있는 사람들은 간식도 럭셔리 하네..원..서러워서리..그나저나 차안에서 시달린 깔깔한 입맛으로 주먹밥을 먹구 있네....>

정말 선수들은 달라 보였다.

 

난 국물이 생각나 라면을 시켜 국물은 후루룩 다 마시고 면은 반만 먹었다.

아무런 맛이 없다. 먹구 싶어서 먹은게 아니라 올라가기 위해서 필요한 양분을 보충한 것 뿐이었다. 너무 많이 먹어두 안돼구 안먹으면 더 불안한 이순간.

산행직전 이순간이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다.

난 덕유산을 알지 못한다.오늘의 날씨가 어떻게 전개될지 알수가 없다.선배를 제외하고는 나의 페이스에 관심을 가져줄 사람은 하나도 없다. 아니 어쩌면 선배도 나에게 나줘줄 체력이 없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산이라 유난히 긴장이 됐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하늘을 보니 달빛과 별빛이 유난히 밝다 . 너무나 아름다웠다 .

강하게 분비되던 위산이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종주시작 2시간째( 새벽 4시 )

 

<우와 큰일이다. 이거 오늘따라 왜 이러지.이거 병이 도진거 아녀. 아 쪽팔려 ~~>

종주시작 점인 영각사를 출발하여 1시간 여를 올라왔을 때 쯤이었다.

 

출발만큼은 연대장과 함께 하는 선두 일행에 합류하여 무리 없이 진행이 됐다.  선배와 동료들도 매우 빠른 속도로 초반부의 수직 코스를 박차고 나아갔다. 특히 빡빡 머리를 한 무섭게 생긴 아저씨의 보폭은 매우 힘차게 느껴졌다.

억지로 억지로 쫒아가던 나의 발걸음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63kg밖에 안돼는 호리호리한 몸 때문에 등산에 있어서 유리한 나였지만 선수들 앞에서는 어쩔수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형 저분 모하는 분이야

남부서 형사야 선배가 조용히 대답했다  덕유산 종주만 4번째래

힉!! 형사

맨날 범인 잡으러 뛰어나니는 양반이 모가 아쉬워 이렇게 산에서 진을 뺀대? 좀 천천히 가라구 해, 이러다 개거품 물겠어

 

최형사의 속도는 더더욱 빨라졌고 그 이후 한참동안 최형사를 볼 수 가 없었다.

 

1시간전 차에서 내려 종주 출발점에 섰을 때 모두들 안도했다. 달빛이 너무 밝아 헤드렌턴이 불필요할 정도였고 기온도 영하 5도 내외로 최상의 상태였다. 게다가 바람한 점 없어 짚티만 입고도 산행이 가능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인기척은 없었고 오늘의 종주팀은 우리가 유일했다.

장비를 점검하고 출발신호가 떨어지자 마자 모두들 마라톤 경주를 하듯이 튀어나가기 시작했다.

정말 이번 팀들은 산에 다 미친 사람들 같았다.

 

잠깐 이어진 마을길을 지나자 마자 시작부터 계곡을 끼고가는 좁다란 등산로가 나왔고, 그길은 가파랐다. 워밍업구간 없이 바로 심산유곡에 진입한 우리팀은 초반부터 선두와 후미의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1차 고비가 되는 초반 30분에 벌써 수백미터 이상 거리가 늘어선 일행들 옆으로 하얗게 쌓인 눈이 달빛에 반짝였다.

 

종주시작 30분이 지나자 사람들은 군데 군데 쉬어가며 더워진 몸에 맞게 복장을 셋팅하고 물 한 모금씩을 들이켰다. 1시간쯤 지났을까 선두로 가던 사람들이 하나둘 쉬는 모습이 들어왔고 더 이상의 선두는 보이지 않았다. 연대장이 올때까지 나 역시 베낭을 잠시 쉬게 하고 물을 꺼내 드는데 생수통에 얼음이 동동 떠다녔다. 아무리 날씨가 풀렸어도 겨울산은 겨울산이었다.

한겨울 산에서 들이키는 얼음생수.

더워진 몸이 순식간에 냉각되며 새로운 힘이 솟았다.

선두일행과 함께 다시 출발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페이스가 급격히 떨어졌다.

얼음물이 왠수였다.

처음 신호는 아랫배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아 ~~씨 ..하필 지금..아까 육십령 휴게실에서 다 보구 오는건데>

처음엔 그런대로 버티면서 올라갔지만 지속되는 하체운동은 장의 활동을 더욱더 왕성하게

했다.

속도가 처지자 속도 모르는 선배가 빨리 따라오라구 단도리를 한다.

줄줄이 늘어선 대열을 이탈해야 하는 순간.

일단은 헤드렌턴을 끄고 등산로를 벗어났다.

등산로를 벗어나니 눈이 무릅까지 빠졌다.달은 왜 이리도 밝은지 한탄 스러웠다.

속도 모르는 연대장이 헤드렌턴을 나한테 비추며 어디가냐고 했다.

등산로를 20m 쯤 벗어나 커다란 나무뒤로 돌아갔다.

읏 차거~~~

자세를 잡는 데 깊게 쌓인눈이 무척 가깝게 느껴졌다.

아름다운 산에서 별일이 다 있다.

 

- 3편으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