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주 시작 10시간째(1월 29일 오후 12시)

 

드디어 동행하던 선배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고통을 호소했다.

강풍 때문에 중심도 잡기 힘든 오르막 능선 한가운데서 선배는 가던 길을 멈춘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마지막 고비가 되는 중봉(1,594M 덕유산 제2봉)까지 2KM의 오르막에서 체력이 바닥난듯했다. 오늘은 휘몰아치는 눈보라와 발목까지 쌓인 눈 때문에 평소보다 몇배 힘든 산행이었다 .

이미 남부서 최 형사와 베테랑 박사장도 함박만큼 벌어진 입에서 하얀 김을 토해내고 있었다.

 

눈보라 때문에 쉬기에는 매우 위험한 곳이었지만 우린 잠깐이나마 짬을 갖기로 했다

 

<휴 다행이다~~나도 죽는줄 알았네>  

앗 따가, 앗 따가

바람에 날린 눈빨이 사납게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산행시작 5시간 전(전날 밤 10시)

 

어!! 선욱아!!

평소처럼 버스에 올라 이번 멤버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하고 버스전체를 돌아보는 순간 눈길이 마주친 중간의 한명이 내 이름을 불렀다.

무역상과 부동산 사업이 성공해 수십억 자산을 모았단 소문이 돌던 대학교 서클 선배였다.

혼자였던 나는 우연한 만남이 너무도 반가웠다.

 

아니 형도 등산하우

골프나 다닐 것이지 형이 무슨 등산이야

등산은 우리 같은 헝그리 한 사람들의 전통 레포츠 아녀?

 

선배도 웃었고 버스안 사람들도 웃었다.

하지만 선배의 장비와 옷 차림이 예사가 아닌걸로 봐서 꽤 산을 다닌듯했다

그 형의 등산 경험은 이미 대학교부터 시작되었고, 그동안 바빠서 못 오다 한달 전부터 다시 산행을 시작했다고 했다.

 

반갑게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던 선배는 2명의 동행을 소개 했다.

그들은 선배와 함께 매주 산에 오르는 산악동호회의 주요 멤버들이었다.

머리를 박빡 민 조폭 같은 사람과 거칠게 생긴 또 한명의 중년은 반갑다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난 악수를 나누다 섬찟함을 느겼다.

손을 맞잡은 중년의 손길이 왠지 어색했다.

잠깐 사이였지만 스치는 눈썰미로 난 그 중년의 오른손에 검지 손가락 하나가 없는걸 알 수 있었다.

왠지 선배와는 어울려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이었다.

내 느낌을 눈치 못채게 하기 위해 난 형에게 또다시 농담을 걸었다.

아니 근데 이 배로 무슨 등산이야 ? 낙오해서 개망신 당할려구

실제로 앉아있던 형의 배는 맹꽁이 마냥 볼록하게 솟아 있었다.

그러는 사이 동대문에서 출발한 산악회 버스는 양재동을 들러 나머지 빈자리를 채우고 차가운 고속도로로 진입하고 있었다.

 

난 선배랑 얘기하느라 이번 팀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들이 탓는지, 어느정도의 등산 내공을 지닌 사람들인지, 연령때는 어떤지 등등..

앞쪽에 앉아서 버스를 슬쩍 둘러본 나는 깜짝 놀랐다.

27인석 우등 산악회 버스에 빈자리가 하나도 없었고 , 모조리 남자였다.

산악회 입장에서는 대박이었지만 내 입장에서는 사실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이런 한겨울 무박 산행을 하는 여자들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 세상 모든 일이 음양의 조화이거늘

군대도 아니고 남탕도 아니고 어찌 아줌마 여자도 하나 없는 등산팀이 다 있던가..

요샌 히말라야등반도 베이스켐프까지는 여자들이 동행한다던데.

 

집 나올 때 덕유산에 간다던 나에게 하던 어머님의 당부가 맴돌았다.

그런대 가서라도 여자들 좀 잘 사귀어바..너도 올해는 장가가야 하지 않겠니?

습기찬 창가에 뿌연 얼굴이 비추어 졌다.

선욱아 너 제대루 살구 있는거니?

창밖의 나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산행시작 4시간전(전날 밤 11시)

 

아~아~~ 마이크 테스팅

 

버스가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누군가 등반코스를 표시한 덕유산 지도를 돌리기 시작했고 그사이 등반 대장이 마이크를 들었다.

오늘 등반은 한국의 희말라야 덕유산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완전종주하는 총 12시간의 산행이 되겠습니다 총거리는 약 28Km 이고 1400m 이상되는 10여개의 봉우리를 넘게 될 것입니다

<으잉!!  12시간.>

7시간인줄 알고 편안한 마음으로 온 나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난 옆 사람에게 물어봤다 . 오늘 7시간 산행 아니에여

그 사람은 더 얘기를 듣자며 검지 손가락을 자기 입에 세로로 가져다 댔다.

<우와 이거 x 됐네>

 

등반대장의 안내는 이어졌다.

현재까지 내일의 날씨는 매우 좋을거라는 예보가 있습니다만 언제나 그렇듯 산을 알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오늘 산행의 과정중에는 두군데의 하산 탈출로가 있습니다. 4시간째 삿갖재에서 황점으로 나가는 하나가 있고 그 다음은 2시간쯤 더가서 동엽령에서 안성으로 빠지는 길이 있습니다

만약 생각보다 힘들거나 페이스를 잃은 분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탈출을 선택하시는게 좋을 듯 싶습니다 명심할 것은 무리한 사람들 때문에 전체 시간이 지체되면 시간내에 하산이 어려워 낭패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등반대장의 설명에 차안에는 긴장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누군가 뒷자리에서 말했다

겁나게 시작부터 왜 그래여????

 

< 그러게 말이여 아니 살벌하게 저 얘기를 왜 하는거야 ?>

그나저나 생각보다 긴 산행이 걱정스러웠다.

초코파이나 빵 같은 걸로 간편한 산행을 즐기는 나로서는 12시간을 버틸 장비가 없었다.

 

그때 등반대장이 질문을 했다

혹시 덕유산 종주가 처음인분 계십니까 ?

뜨끔한 나는 손을 반쯤 들고서 고개를 뒤로 돌려봤다.

다행이다.

나말고도 7~8명 있다.

 

잠깐 무슨 생각을 하더니 등반대장은 다시 말을 이었다.

또 한가지 , 자기주력이 좋다고 두 세시간 미리 내려가서 늦어진 사람들에게 불평하는 사람들 있는데 그런 분들은 회비를 돌려 드린 뒤 가차없이 하차 시킬 것입니다

요건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얘기였다.

등반대장의 카리스마가 엿보이는 순간이었다.

 

난 선배는 어떤모습인가 궁금해 선배가 앉아있는 자리를 보았다.

아니 !

선배와 동료들은 등반대장의 말은 아랑곳 하지 않고 이미 잠을 자고 있었다.

그거만 봐도 그들이 갖춘 장비가 후까시를 위한 멋만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자 질문 없으시면 이제 소등하고 도착까지 3시간 정도 수면을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등반대장의 안내가 끝나고 지도를 돌리던 젊은 연대장의 소개가 짤막하게 이어졌다.

 

난 다시 지도를 펼쳐보았다.

표시된 등반로가 무진장 길었다.

싸한 기분이 아랫배에서 올라왔다.

어쟀든 자야했다.

 

2편에 계속